- 미술사의 '대비열전(對比列傳)'
미술사의 '대비열전(對比列傳)'
-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 월터 아이작슨, 신봉아 옮김, <북이십일 arte>, 2020.
"그들의 각기 다른 접근법은 피렌체 미술계의 두 작풍을 상징했다. 레오나르도, 안드레아 델사르토, 라파엘로, 프라 바르톨로메오를 위시한 인물들은 '스푸마토(연기)'와 '키아로스쿠로(명암)'의 사용을 강조했고, 미켈란젤로, 아뇰로 브론치노, 알렉산드로 알로리 같은 인물들은 조금 더 전통적인 접근법에 따라 윤곽선을 기반으로 한 '디세뇨(소묘)'를 선호했다... 바사리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킨 두 밑그림을 구경하려고 피렌체로 갔으며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그리기도 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25장. 미켈란젤로와 사라진 전투 그림들>, 월터 아이작슨, 2017.
[서양미술사](1950)에서 '미술' 자체가 아닌 '미술가'들의 도전과 혁신을 서술한 오스트리아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 : 1909~2001)는 16세기 초를 "이탈리아 미술에 있어서, 또한 전 역사를 통해서도 가장 위대한 시기"(같은책, <15장>)로 소개한다.
그에 의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특유의 말솜씨로" 15세기(1400년대)를 '콰트로첸토(400년대)'로, 16세기(1500년대)를 '친퀘첸토(500년대)'로 불렀는데, 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가장 위대한 시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경쟁'적으로 열었고 라파엘로 산티, 바첼리오 티치아노, 조르조네, 알프레히트 뒤러 같은 거장들이 뒤를 따랐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암굴의 성모>, 1486. )
"이러한 유명한 거장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 1452~1519)는 토스카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와 같은 사람들의 야심은, 그림 또한 학예에 포함되어야 하며 그림 그릴 때의 손작업은 시를 쓸 때의 그것 만큼이나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 [서양미술사], <15잘. 조화와 달성 - 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결국 우리에게 '화가'로 남았지만 격동의 '르네상스' 초기였던 16세기 '친퀘첸토' 시기에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와 밀라노의 스포르차 공국, 잠시 이탈리아 공국들을 도륙한 체사레 보르자(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모델)와 프랑스 국왕 등의 후원자를 번갈아 가며 과학연구와 문예활동을 왕성하게 이어갔다. 그는 군국주의 도시국가로 분열되어있던 당시 이탈리아 공국을 오가며 특유의 호기심과 창의력을 기반으로 '군사학'을 개진하였으나 무자비한 전쟁기계 체사레 보르자 정도만 잠시 관심을 두었을 뿐 다른 군주들에게 채택되지는 못했다. 다만 레오나르도의 제자들이 전수받은 수천 장의 연구록과 필기 및 스케치 노트가 그의 천재성을 증명해주고 있다. 피렌체와 밀라노를 오고가며 미완성작만 남발하던 이 천재는 예순이 넘어 프랑스 파리에서 <모나 리자>를 남긴 채 숨을 거둔다.
그는 평생동안 '손을 쓰는' 미술은 '머리를 쓰는' 다른 예술에 비해 천박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적 전통에 반발하여 "시를 쓰는 손이나 그림을 그리는 손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도니 톤도> 또는 <성가족>, 1508. )
"16세기(친퀘첸토:500년대) 이탈리아 미술을 그토록 빛나게 한 두 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 1475~1564)였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보다 스물세 살 아래였지만 그가 죽은 뒤로 사십오 년을 더 살았다. 긴 생애 동안 그는 미술가의 지위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변화는 어느 정도 그 자신이 이룩해 놓은 것이기도 했다... 30살이 될 무렵 그는 천재 레오나르도와 필적할 수 있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거장들 중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 [서양미술사], <15장>,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동시대 후배였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제자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 1511~1574)는 1550년에 [가장 저명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 열전]을 지어 특히 그의 스승인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을 칭송했다고 한다. 바사리 본인도 화가였는데 이 [열전]은 아마도 미술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저작과도 같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영웅들을 다룬 기원후 1~2세기의 작가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크 영웅전]이 첫 출간된 시기도 1517년 이탈리아 피렌체였다. 물론 이는 역사의 '우연'이 아니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그에 따른 출판업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해 [플루타르크 영웅전]과 바사리의 [열전] 등이 같은 시기에 만나는 역사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 '필연'의 역사 속에서 바사리의 [열전]이 어쩌면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본보기로 삼았을 수도 있다.
르네상스의 역사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경쟁'의 관계에 있다. 실제로 월터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전기인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를 보면, 그 두 거장은 서로를 경멸하고 증오했다. 레오나르도보다 스물세 살 어린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를 대놓고 비웃었고, 연장자 레오나르도는 그 천재적 게으름과 나태함을 배경으로 무심한 척 했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미켈란젤로를 깠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 최고의 조각상인 '다비드'상을 어디에 전시할지 결정하기 위해 메디치 공화국이 조직한 위원회에 참석한 레오나르도는 음모와 성기를 드러낸 이 조각상은 광장이 아니라 전시관 실내에 그것도 성기를 가린 채 보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성애자에다가 자유분방한 그의 평소 성정과는 모순되는 주장이다. 분명 미켈란젤로의 성공을 시기해서였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겉으로는 다비드상을 무시했지만 실은 그의 노트에 자신만의 다비드상을 몰래 스케치하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레오나르도는 '화가'였고,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였다는 사실인데 물론 주전공이 그렇다는 것이지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이나 '천지창조'와 같은 대작 명화도 남겼다. 아마도 '완성작'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보다 더 많이 남겼을 테지만, 이는 레오나르도가 호기심 많고 게으른 천재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이지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보다 그림을 더 잘 그려서가 아니다. 아마도 미켈란젤로는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외모와 차림새도 출중한 레오나르도를 항상 의식했을 것이고 외향적인 레오나르도에 비해 음침한 본인 스스로 열등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스푸마토(연기)' 기법으로 선의 경계를 붕괴시킨 레오나르도의 작풍에 반발하여 명확한 선으로 형태를 배경과 구분했다.
이런 미술계 두 거장의 경쟁관계는 객관적으로 당시 이탈리아 군국주의 도시국가를 배경으로 한다. 군사적 무력으로 옆 도시를 침략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내부 권력투쟁도 살벌했지만 이 권력자들은 겉으로 온화한 이미지가 필요했으므로 역시 '경쟁'적으로 예술가와 수학자 등의 자연과학자 등을 유치하고 후원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도 적어도 구직과 후원 걱정은 다른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했을 것인데, 레오나르도의 생부 피에르 다빈치는 피렌체의 이름난 공증인이었으므로 필요할 때는 '아빠찬스'도 썼다. 실제로 [모나 리자]는 아버지가 성사한 계약이었는데 레오나르도는 의뢰인이었던 실크상인의 '리자 부인(모나 리자)'을 그대로 그려줄 마음이 없었다. 수십년 간 갈고 닦은 연구를 토대로 화가 본인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걸작을 완성하고 싶었다. 아버지 피에르는 계약 미이행에 화를 냈고 부자지간도 험악해졌겠지만 레오나르도는 그러거나 말거나 16년간 그가 죽기 전까지 [모나 리자]를 들고 다니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스푸마토' 기법은 물론 어디에 있든 우리와 눈을 맞추는 모나 리자의 시선과 웃는 듯 마는 듯 하지만 결국 우리 생각 속에 신비의 미소를 각인시키는 그녀의 입술은 그렇게 레오나르도가 죽어서야 '완성'되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 리자>, 16세기 )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원래 '대비열전'으로 영웅들을 비교하는 형식의 [열전]이다. 실제로 이 [영웅전]은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 시조 테세우스와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의 '비교열전'으로 시작하며 이후로도 수많은 영웅들을 대립쌍으로 비교한다.
기원전 1세기 동양의 사마천 [사기] 또한 그 <열전>이 백미인데, 인간군상들을 수시로 비교한다. 대표적으로 [사기]의 절정인 '초한전쟁'을 그린 한고조 유방의 전기 <고조본기>와 라이벌 항우의 전기인 <항우본기>는 대표적 '대비열전'이다. 나이가 스무살 이상 많은 유방은 항우장사의 기개에 속으로 엄청 쫄았지만 겉으로는 유연하고 여유있게 대처했고, 젊은 항우는 성급한 제 성미를 못 이기고는 나이 서른에 고향으로 건너지 못한 채 자결했다.
젊었던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보다 40년 이상을 더 살았지만, 항우가 유방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유분방하고 능글맞은 레오나르도를 공개적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81
https://brunch.co.kr/@beatrice1007/36
바사리의 [열전]을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전기작가이자 역사학자 월터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6세기(친퀘첸토)의 두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대비(비교)열전'으로도 충분히 읽힌다. 물론 주인공은 레오나르도이며 미켈란젤로는 전체 33장 중 <25장> 한 챕터만 할애되었음에도 두 거장의 '경쟁'적 비교열전으로 읽기에 충분하다.
( 루벤스가 모사한 레오나르도의 <앙기아리 전투> 밑그림 )
( 미켈란젤로의 <전투 그림> 모사도 )
"1504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을 때, 한 젊은 화가가 움브리아 지방의 우르비노라는 작은 도시에서 피렌체로 왔다. 그는 바로 라파엘(Raphael)로 알려져 있는 라파엘로 산티(Raphaello Santi : 1483~1520)였다."
- [서양미술사], <15장>,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역시 동시대 후배였던 라파엘로가 찾아간 피렌체 시뇨리아 궁전의 '전투 벽화'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경쟁'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밀라노에 비해 힘이 밀리는 듯 하던 피렌체의 지도자들은 오래전에 경쟁국 밀라노로부터 얻은 승리를 상징할 필요가 있었고 1503년에는 레오나르도에게, 1504년에는 마켈란젤로에게 각기 다른 전투장면을 벽화로 그려달라는 의뢰를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것이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앙기아리 전투> 묘사도다. 바사리는 분명 각기 다른 작풍의 두 밑그림을 보았을테고, 라파엘로를 비롯한 당대 미술가들은 이 '경쟁작'을 보기 위해 피렌체 시뇨리아 궁전으로 향한다.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의 표현에 의하면, 이 두 거장의 '경쟁'적 밑그림은 당대 화가들에게 "세상의 학교"(같은책, <25장>) 역할을 했다. 라파엘로도, 바사리도 그 '학교'의 학생이었고, 결국 완성되지 못한 두 벽화는 다른 사람도 아닌 조르조 바사리의 손에 의해 사라졌단다. 1560년 미완성의 대회장을 보수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바사리가 손수 두 거장들의 '경쟁' 작품들 위에 여섯 개의 전투 장면을 그렸다는 것이다. 후세의 미술복원 전문가들이 두 거장의 밑그림을 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바사리의 작품이 훼손될 우려가 있어 복원을 중단했다고 하니 시뇨리아 대회장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밑그림과 바사리의 작품이 공존하는 '친퀘첸토'의 응집된 공간이겠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전투 그림> 습작도 )
결국,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경쟁'은 예술가들의 지위를 높였다.
레오나르도는 원래 이단적이고 천재적인 교만함이 있었을 테고, 미켈란젤로는 그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태도와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미술로서 신에게 봉사하게끔 하려거든 교황이 나를 만나러 오라"고까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중에 교황에게 무릎꿇고 빌기는 했다지만 당시로서는 유명 미술가의 대단한 사회적 지위를 시사한다. 아마도 400년 후 "비틀스는 예수만큼 유명하다"고 말한 존 레논식 자신감의 시작이 미켈란젤로가 아닐까.
월터 아이작슨은 말한다. 16세기 르네상스 전성기를 관통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경쟁'과 대결은 "예술가의 위상을 끌어올리는데 그 어떤 '파라고네(비교)'보다 더 강력한 역할을 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명사가 되었고-당시로서는 자기 작품에 서명도 거의 하지 않던- 다른 예술가들이 그들처럼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이제 최고의 예술가들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도공계급의 일원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스타로 대접받게 되었다."(같은책, <25장>)라고.
스스로를 높이고 위상을 확립한 동력은 기본적으로 미술가들의 천재성과 노력에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여기에 미술을 우대하던 당시 사회적 배경을 토대로 이 천재성과 도전이 유기적으로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관점대로 '미술사'가 단지 '미술' 또는 '미술가'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사회사'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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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 월터 아이작슨, 신봉아 옮김, <북이십일 arte>, 2020.
2.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 에른스트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예경>, 2003.
3.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Social History of Art)](1951), 아르놀트 하우저, 백낙청/염무웅 외 옮김, <창비>, 1974~2016.
4. [플루타르크 영웅전](AD 1세기), 플루타르코스, 홍사중 옮김, <동서문화사>, 2007.
5. [사기(史記)](BC 1세기), 사마천 지음, 김원중 편역,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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