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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Feb 12. 2022

기담(奇談)을 나누던 시간 : 1993~1995년

[서양기담] / [경성기담] / [청나라 귀신요괴전]

기담(奇談)을 나누던 시간 : 1993~1995년

- [서양기담] / [경성기담] / [청나라 귀신요괴전]





1.


- 다리가 둘 달린 짐승을 죽여야 하는데...


알 수 없는 저주를 벗기 위해 소년은 '다리가 둘 달린 동물의 피를 보라'는 무당의 말을 듣고는 매일밤 화장실에서 새를 죽여 피를 변기에 버렸다. 소년이 갈수록 미쳐가던 어느날, 새를 구할 수 없었던 소년은 어쩔 수 없이 '다리 둘 달린' 다른 동물을 죽여서 피를 흘려보냈는데, 그 동물은 다름아닌 소년의 엄마였다... 는 이야기에 둘러앉은 남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농활은 엠티가 아니었다.

대학의 '농촌활동'은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노동자-농민 연대를 만드는 대중적 '조직활동'이었다. 물론 돌이켜 보건대, 농민들의 생각과 대학교 학생회의 생각은 달랐을 것이지만. 학생들은 며칠도 안되는 농활 기간동안 낮에는 억지로 도움도 안되었을 일손을 돕는다며 다녔고 저녁에는 선교사처럼 '청소년부', '청년부', '부녀회' 등을 조직하여 '시국'을 논하고는 들어와서 자기들끼리는 새벽까지 '평반(평가와 반성)'을 했다. 그날 하루의 '농촌조직활동'에 대하여 심각하게 '평가'를 하고 각자 '반성'을 한 후에는 추상같은 선배들로부터 칼날같은 '비판'을 받으며 괜히 혼나고는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산으로 들로 일하러 가는 '자학'적이고 '금욕'적인 생활의 연속이었다. 심한 곳은 아마도 산장에 들어간 1970년대 일본의 '적군파' 못지 않았으리라. 마을 농민들에게 담배 태우는 모습을 함부로 보이면 안되었기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몰래 주워 피우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면서 평소엔 관계 좋았던 선배들로부터 공연히 혼나야 하는 그런 농활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걸 보면, 이 무슨 종교집단이나 고립된 사상집단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했던, 1980~90년대판 '기담(奇談)' 자체였다.


1993년 봄농활만 해도 강원도 양구의 민통선 아래 마을에서는 대학생들을 마뜩치 않아 하여 마을회관이 아닌 흉가와 같은 폐가에서 숙식을 했다. 선발대로 간 2학년 상연이 형과 1학년 신입생인 나는 한해 전인 92년도까지 군부정권이 대학생 농활대를 '빨갱이'라 선전하는 통에 마을에서 받아주지도 않아 무슨 기습작전이라도 하듯 선발대가 마을로 진입했다는 경험을 토대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진짜로 무슨 '간첩'이라도 된 양으로 마을 이장님 댁의 문을 두드렸고 그나마 흉가라도 겨우 구한 터였다. 물론 '문민정부' 첫 해인 1993년 여름농활부터는 마을회관에서 숙식할 수 있었지만 그해 5월의 봄농활 선발대로 간 나는 분명히 보았다. 마을 이장님의 경계하는 섬뜩한 눈빛을. 아마도 지난 시절 '농활 기담'을 말로만 전해 들었던 스무살의 신입생 도시 청년의 과민반응이었을 게 분명하지만, 그 때의 내 느낌은 아무튼 그랬다.


봄농활 전 나는 학교 앞에서 우연히 함께 카레덮밥을 먹던 여학생 동기에게 같이 농활을 가자고 했고, 극구 싫다던 동기 연혜가 농활 본대 깃발을 따라 내가 전날 자리잡은 그 폐가로 올라올 때, 하마터면 나는 버선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내달려 그 아이를 안아줄 뻔 했다. 연혜는 나의 첫 '조직사업' 성공사례가 되었고, 그후로도 한참을 나는 폐가로 이어지는 시골길을 올라오던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방탕무례한 일상을 보내던 우리 농활대는 담배도 지참하면 안되고 우리끼리 더더욱 금주와 금연을 철저히 지키는 지극한 금욕의 시골생활을 해야 했는데, 그날은 무슨 연유였는지 1학년 신입생들끼리 저녁을 지어먹고는 둘러앉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처럼 '기담(奇談)'을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무서운 선배들이 모두 '청년회'와 함께 마을회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나 보았다.


모두들 자기가 알고있는 무서운 이야기나 기이한 이야기, 또는 어이없는 반전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는데, 내가 풀었던 고등학교 때 알던 개그는 별 반응이 없었던 것 같고, 동기 중 삼수생 진호 형이 해준 무서운 얘기는 그 어둑한 저녁 시골의 폐가에 딱 어울리는 소재였다. 소년이 '다리 둘 달린' 엄마의 피를 보았다는 마지막 대목에서 나와 연혜를 비롯한 둘러앉은 1학년 신입생 동기 모두 소리를 지르며 나자빠졌다.


언제 어디서든 틈만 나면 둘러앉아 '기담'을 나누던 1993년 봄이었다.



2.


"프랑스가 아직 갈리아라고 불리고 로마 제국에서는 야만인이 사는 변두리 땅으로 여기던 기원후 3세기(261년), 윤회를 믿으며 조상과 수목을 숭배하던 드루이드교의 땅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도착한 선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센강의 시테섬을 거점으로 포교 활동에 힘쓰며 신자를 점차 늘려갔다. 하지만 곧 붙잡혀 투옥되었고, 주교 디오니시오와 사제 루스티코, 엘레우테리코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 언덕이 바로 몽마르트다. 디오니시오는 훗날 바티칸에서 성인으로 봉하였고 프랑스어 표기에 따라 '성 드니(생 드니 : Saint Denis)'라고 불리게 되었다."

- [나카노 교코의 서양기담], 나카노 교코, 2020.



휴대폰이 없던 시절, 남녀노소 불문하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당시에는 친구들과 이불쓰고 무서운 이야기나 음담패설을 나누었고 그런 '기담'의 대표적 사례는 단연 중세의 '데카메론(10일야화)'이었다. 중세 흑사병의 격리기간 14일 중 주일과 휴일을 제외한 열흘 간 지어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대중에게 널리 퍼지면서 인류 보편의 기괴하고 기묘한 이야기인 '기담'을 이어갔으며 현재도 수많은 '데카메론'들이 이어진다. 문자기록보다 훨씬 오래된 '구전'의 힘이다. 인터넷 포털과 유투브가 팽배한 지금도 '기담'의 가장 결정적인 강자는 '구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혼자 읽는 책이나 혼자 보는 영상보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구전'은 그 이야기를 전하게 되는 '실천'의 마력이 분명 있다. 이야기 잘하는 사람을 보면 따라서 해보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끼게 된다. 나만 그런가?




내 개인적으로 가장 무서운 '기담' 또는 '괴담'은 '머리가 잘리는' 이야기다.

동양에서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여 신체를 훼손하는 형벌이 가장 극악한 거였고, 서양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육체를 훼손하면 영혼이 살지 못한다 믿었단다. 이는 물론 동양의 유교와 서양의 기독교 이야기일테고 동서양을 불문하고 토속신앙에서의 차이는 없었을 것인데 동북아시아 선조들의 장례형식이었던 '조장'은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망자의 육체를 기꺼이 바쳤다. 유일신이 아닌 자연의 근원으로서 하늘과 땅을 섬기던 고대인들에게 새는 하늘의 상징이었으므로 망자의 영혼은 새들이 쪼아간 신체의 일부와 함께 하늘로, 썩은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는 물아일체의 합일 과정이었다. '혼비백산(魂飛魄散)',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으로 스며든다.

그러다가 사유재산과 계급, 부족과 국가가 생긴 후 군인들의 '칼'이 지배하기 시작한 시공간에서는 목을 치는 '참수형(斬首刑)'이 그나마 '명예로운' 형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호전적 게르만 혈통인 '프랑크족'을 조상으로 둔 프랑스에서 20세기인 1970년대까지도 '참수형'이 행해졌다고 하는가 보았다. 프랑스대혁명에서 고안된 '기요틴(Guillotine)'은 '참수형'의 역사에서 혁신적 장치였다. 프랑크족의 도끼나 큰칼이 무디거나 망나니 또는 집행인이 미숙하면 '한 칼'에 목이 달아나지 않으니 희생자의 고통과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1940)의 주인공 뫼르소가 '단두대' 참수형을 떠올리며 그 '확정적 조치'와 '기정 사실'의 예외로서 "만약에 혹시 어쩌다가 목이 잘 베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으면 다시 내리칠 뿐"(같은책, <5장>)이라고 했듯이 말이다. 참수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댕강'이 아니라 생각보다 잘 안 떨어지는 목을 장작 패듯 패거나 고기 썰듯 '썰어버리는' 작업이었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므로 '기요틴'은 그나마 프랑스대혁명의 '인권사상'이 낳은 근대적 결과물일 수 있겠다. 오죽하면 죄인의 가족들이 깔끔하게 한 칼에 보내달하고 사형집행인에게 뇌물을 줄 정도였겠는가.

영국의 폭군 헨리8세는 '앤(Anne)'이라는 이름의 부인을 두 명이나 참수형에 처했는데 미운 앤에게는 일부러 미숙한 망나니에게 무딘 칼을 주었다고 한다. 대신 아들을 못낳는 바람에 억울한 죄명을 쓴 앤 불린의 목을 칠 때는 '한 칼에' 가도록 고액을 들여 외국에서 유명한 집행인을 빌려오기도 했단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친모인 이 앤 불린 왕비가 지금도 영국 런던탑에서 잘린 머리를 들고 밤에 돌아다닌다는 그 '앤 불린(Anne Boleyn)'이다.



참수형이 무서운 이유는 갖가지다. 그 중에서 최고는 잘린 목을 찾아 헤매거나 들고 다니는 '기담'들이다. 기독교가 국교화되기 전이며 프랑스가 야만의 갈리아 지방으로 불리던 기원후 3세기(261년) 성 디오니시오는 갈리아 지방의 토착신앙인 드루이드교도들에게 기독교를 알리다가 참수형을 당했는데, 그 처형 장소가 지금의 '몽마르트' 언덕이란다. '몽마르트'라는 이름의 유래가 바로 '순교자의 언덕(Mont des Martyrs)'인데, 성 디오니시오와 2인의 제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분명 무딘 도끼날로 여러 번의 가격 또는 수차례 칼질 후에 목이 떨어졌을 성 디오니시오는 태연히 잘린 머리를 들고 개울가에서 피를 씻고는 10킬로미터 거리인 '생 드니(Saint Denis)'까지 두시간 반을 걸어가며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는 그곳에서 절명했다고 한다. 아마도 잘린 목을 들고 출현하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독일 용병 슬리피 할로우나 일본 전국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한 후 목이 날아간 오다 노부나가의 무사 시바타 가쓰이에, 영국의 앤 불린 괴담 따위의 원조이겠다. 제단화가 아니라 프랑스 절대왕정 파리의 고등법원 배경그림에 나오는 그리스도 십자가책형의 기괴한 그림에 묘사된 '성 디오니시오'(우측에서 두 번째)가 가장 괴이하고 무서운 '기담'에 어울린다.



한편, 나가이 고의 마징가Z에 등장하는 악당 닥터 헬의 부하 중 하나인 브로켄 백작이 잘린 목을 들고 다니는데, 브로켄 산은 독일에서 유명한 '기담'의 장소라고 한다.




일본의 미술사학자 나카노 교코는 '미술사'를 좋아하는 내가 수년전 [무서운 그림] 시리즈로 알게 된 작가다. 그녀는 명화 속에 담긴 당대의 역사와 미술가 이야기를 엮어내는 실력이 뛰어나다. 나카노 교코의 책 몇 권을 재미있게 읽다 보면 서양미술사를 두루 섭렵하게 되는데 전혀 이론적이거나 학술적이지 않고 다분히 대중적이다. 2020년에는 '미술사'의 본업을 떠나 [서양기담] 21편을 짧게 엮은 이야기책을 냈는데, 브로켄 산에 모이는 마녀들의 집회인 '사바쓰(sabbath)' 이야기나, 드라큘라(블라드3세)와 늑대인간(제보당의 괴수), '유령선(Flying Dutchman)'과 퇴마사제의 '엑소시즘(exorcism)' 이야기 등의 '기담' 또는 '괴담'을 풀어낸다. 역시나 '미술사'처럼 서양의 '기담'을 중심으로 한 당대 시대적 배경의 이야기다.

청나라 문인 원매의 [자불어(子不語)](국역 : [청나라 귀신요괴전])나 카이스트 교수 전봉관의 [경성기담] 등의 이야기 등 '기담' 일체는 명시적이든 아니든 당대 시대상황을 맥락 속에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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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목을 들고 다니는 장면을 상상하면, 억울한 원혼이 절명한 육체를 끝내 다시 잇지 못하는 무한반복의 슬픔이 그 공포의 이면에서 신음하고 있다. 브로켄 산에서 한밤에 사탄의 현신인 숫양과 집단 난교를 벌이는 마녀들의 광란에는 중세 종교재판으로 억울하게 찢기고 불태워진 억울한 여성들의 한이 서린다. 그리스어로 '엄중한 권고'를 뜻한다는 'exorkismos'를 어원으로 하는 '엑소시즘'은 악마에게 물러날 것을 엄중하게 권고하는 행위인데 최초의 엑소시스트는 '가다라' 땅에서 인간에 씌워진 악령들에게 인간들로부터 돼지에게로 '가라'고 외친 예수란다. 17세기 루덩이라는 수도원에서 수녀들이 집단 광란을 일으킨 사건은 잘생긴 외모와 자유분방한 '이단성'으로 수많은 수녀들을 후리던 그랑디에 신부를 제거하기 위한 조작극이었을 수도 있다.

청나라에서도 잘린 목을 들고 달을 바라보던 귀신은 그 억울함이 신원되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1933년 조선의 경성에서 일어난 유아 단두(斷頭) 사건은 식민지 조선에서 '최고의 치안'을 자랑하던 일본경찰의 허위와 무능을 폭로하고 식민지 민중의 피폐한 삶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 중 하나였다. '죽첨정 단두유아 사건'은 수많은 영아들이 죽어서 암매장되었고 영아의 뇌수를 먹고 병이 낫는다는 무지몽매의 시대에 그럴듯 하게 식민지 '근대화'로 포장하던 일제의 허위를 벗겨낸 대표적 '기담'이기도 하다.




3.


나는 농활을 아홉 번 다녀왔다.

1993년 봄, 여름, 가을, 1994년 봄, 여름, 가을, 1995년 봄, 여름, 그리고 마지막 가을.

모두다 선발대로 가서는 폐가에 터를 잡고는 본대를 기다리기도 했고, 영문과 농활대장을 맡은 2학년 때부터는 '문민정부' 덕에 대부분 마을회관 옥상에서 1993년 봄농활 때의 그 여자 동기를 추억하며 본대를 기다렸다. 농민회와 학생회의 공개적 연대활동이었으나, 우리는 나름의 '철의 규율'로 진지하게 임하기도 했다. 그 정기적 '데카메론'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예전 군부독재와 달리 학생들의 농활을 탄압하지 않았다던 '문민정부'는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급격히 수입하는 '세계화'를 통해 자영농을 순식간에 몰락시켰다. 대학생들은 농활 마지막날에 전농이 개최하곤 했던 전국 각지에서의 농민대회를 함께 했지만, 이미 우리 농업은 죽어가고 있었다. 돌아보면 농촌마을에서 우리가, 농민들이 나누던 '기담'의 실체가 그것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다. 잘린 목을 들고 피를 흘리며 배회하던 억울한 원혼은 죽어가던 우리 농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1993  삼수생 동기형의 '기담'에서 소년이 목을 긋던 '다리  달린' 동물이 자신의 엄마였다는 이야기에 모두가 소스라치던  순간에도 나는, 내가 처음으로 '조직' 여자 동기의 모습만 살피고 있었다. 비록 93년 봄농활 이후 두 번 다시 참여하지 않았으나,  말을 들어주고 힘든 농활까지 따라와  강릉 출신 도시 소녀의 고마움에 나는  후로도 오랫동안 나보다 키가 컸던  동기를 심심하면 쫓아다니며 장난스레 나의 '첫사랑' 운운했지만, 그러기에는 남중과 남고를 나와 여자라고는 어머니와 누나  밖에 제대로  적이 없던 너무도 미숙했고 어설펐다.


이 또한 '데카메론'처럼 여럿이 둘러앉아 '기담'을 나누던 스무살 시절 나의 '기담'이다.



***


1. [나카노 교코의 서양기담](2020), 나카노 교코, 황혜연 옮김, <브레인스토어>, 2022.

2. [처음 가는 루브르](2013), 나카노 교코, 지종익 옮김, <아트북스>, 2016.

3. [경성기담], 전봉관, <살림>, 2006.

4. [청나라 귀신요괴전 1~2], 원매, 조성환 옮김, <글항아리>, 2021.

5. [이방인](1940), 알베르 카뮈, 박용철 옮김, <덕우>,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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