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무서운' 것은 '그림'이 아닌 '인간'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림'이 아닌 '인간'이다
- [무서운 그림 1~2], 나카노 교코, 이연식/최재혁 옮김, <세미콜론>, 2008~2009.
( [무서운 그림 1~2], 나카노 교코, 2007~2008. )
( [무서운 그림], [운명의 그림] 연작 )
"내가 '무서운' 그림에 대해 쓰려고 생각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앙투아네트를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의 스케치였다. 머리는 짧게 깎고 손은 뒤로 묶인 채 짐마차에 실려 단두대로 끌려가는, 한때는 '로코코의 장미'였던 이의 깜짝 놀랄 만한 모습. 이 그림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고성쇠의 낙차를 느꼈기 때문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림을 그린 이의 악의가 날카롭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다비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꾸었고 생애 내내 동료를 배신하며 권력자에게 아첨한 화가였다. 이 앙투아네트를 그린 1793년 무렵, 국왕을 처형하는 쪽에 표를 던진 그는 왕비였던 앙투아네트에 대한 증오 또한 숨기지 않았다... 정말 '무서운' 노릇이다."
- [무서운 그림 1], <서문>, 나카노 교코, 2007.
( <마라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18세기. )
( <단두대로 끌려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스케치>, 자크 루이 다비드, 18세기(좌) / 프랑스 대혁명 전 '로코코'의 여인이자 루이 16세의 왕비, <장미를 든 마리 앙투아네트>, 르브룅, 18세기(우). )
자크 다비드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기의 '투사'였고 로베스피에르의 급진 '자코뱅파' 당원이었다가 나폴레옹 황제의 '남작'이기도 했다. 또한 혁명가 '마라'의 타살을 예수의 죽음과도 같은 '피에타'처럼 그린 18~19세기 신고전주의 대표적 화가였다.
그는 루이 16세와 그 '음탕한'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을 주장한 로베스피에르의 동지로서, 단두대로 향하는 왕비의 마지막 초상을 '무서운' 스케치로 남겼는데 권력에 아부하는 화려한 '로코코'식 궁정화풍을 단순한 스케치로써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자코뱅파가 실각하고 몸을 피했던 다비드는 형장으로 끌려가던 로베스피에르를 또 스케치했다는 것이다. 이후 20세기에 역사소설 [마리 앙투아네트](국역 : [베르사유의 장미])를 쓴 독일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로베스피에르의 혁명동지였으나 '왕당파'에 기운 정적 조르주 당통의 입을 빌어 다비드를 "이 못된 종놈"이라고 저주하고 있다.
'로코코' 궁정화풍을 비판했던 신고전주의 대표화가 자크 다비드는 역시 권력에 빌붙는 '무서운' 인간의 초상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서 '신고전주의'적으로 보여준다.
(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 )
그리하여, 내가 보기에 다비드의 가장 '무서운' 그림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케치>도 <마라의 죽음>도 아닌 단연 대혁명을 배신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그림이다.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7세기. )
"... 이에(카라바조의 유딧에) 반해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유딧은 단호한 의지를 지닌 성숙한 여인이다.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사내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조차 꺼리지 않고 만약 실패한다면 목숨을 잃을 각오도 되어 있다. 그녀를 돕는 젊은 몸종도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의 동지로서 강한 연대감을 내보인다. 둘은 예사롭지 않은 기백으로 임하고 있다. 곯아떨어졌다지만 상대는 한 군대의 우두머리다. 정의는 우리 편이라고 믿기는 해도,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사람의 목을 벨 수는 없다.
이렇게 하여 이때까지 전설의 미녀였던 유딧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피와 땀 냄새가 진동하는 범죄 현장을 생중계하는 듯한 그림이 나왔다. 만약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카라바조 그림의 유딧 같은 모습을 기대했다면 놀라고 당황할 것이 뻔했다."
- [무서운 그림 1],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나카노 교코, 2007.
(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 19세기. )
여기 또 다른 '혁명가'들이 있다. 이 여성 '혁명가'들은 권력이나 가부장적 권위에 순응하기보다 이에 용감하게 맞선 '무서움'의 상징들이다. 19세기 아르누보 계열의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프의 [유디트]로 잘 알려진 유대 여인 '유딧'과 17세기 이탈리아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다.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카라바조, 16세기. )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닛>,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17세기. )
구약성서의 외전에는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핍박하는 아시리아 군대의 장수 홀로페르네스의 장막으로 들어가 술과 섹스로 떡실신한 그 장수의 목을 썰어서 나온 유대인 과부 '유딧' 이야기를 전한다. 16세기 화가 카라바조나 17세기 남성화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그림에서 묘사된 '유딧'은 여리고 아름답고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카라바조의 '유딧'은 예쁜 척을 너무 유지한 나머지 도저히 목을 벨 수 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알로리의 '유딧'은 화가 자신의 구애를 뿌리친 창녀의 얼굴을 모델로 한 '유딧'이 알로리 본인의 머리를 들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17세기에 흔치 않은 여성 화가이자 동료 화가에 의한 강간사건의 피해자로 오랜 시간 송사에 시달리다가 결국 이겨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려낸 '유딧'은 강력하고 거침없다. 예쁜 척하면서는 결코 적군 장수의 목을 썰어서 가지고 나올 수 없다. '무서운' 현실보다 훨씬 더 '무서워' 지지 않고서는 베길 수도 없다.
젠틸레스키의 '유딧'과 그 하녀 '동지'는 그 강렬함 만큼 '현실적'이다.
( <베톨리아로 돌아가는 유딧>, 산드로 보티첼리, 15세기. )
그러므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의 그림 중 가장 '현실적'이기에 '무서운' 작품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딧'이다.
( <무희의 보상>, [살로메] 삽화, 오브리 비어즐리, 19세기. )
"그 중에서 유난히 선호되었던 것이 '악녀'들의 이야기였다. 남자의 피를 빠는 흡혈귀 여인, 마술로 남자를 미혹시키는 마녀, 어부를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인어, 예쁜 얼굴과 풍만한 가슴으로 남자를 유혹해 결국엔 잡아먹는 괴물 스핑크스, 그리고 남자의 목을 자르는 '유딧'과 '살로메'..."
- [무서운 그림 2], <비어즐리의 '살로메'>, 나카노 교코, 2008.
19세기 영국의 탐미주의 극작가 오스타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는 성서나 고대 유대사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순교사건을 다룬다. 실제는 '유대왕'의 재림을 두려워한 '이스라엘 왕' 헤롯왕가 이야기다. 동방박사로부터 '예수 탄생' 소식을 들은 헤롯왕은 그 시기 1~2년 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 전부를 죽이라 명하고 기독교 '최초의 순교'일 수 있는 '베들레헴 영아 대학살(피터르 브뢰겔, 16세기)'을 일으킨다. 헤롯왕가의 이후 다른 헤롯왕은 예수에게 세례를 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요한을 참수하면서 의붓딸 '살로메'를 희생자로 이용하는데,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던 요한의 목을 '살로메'가 원하여 마지못해 베었다는 식의, '종교 박해'를 다분히 '정치적 우화'로 전환시켜 버렸다. 이에 오스카 와일드는 한 발 더 나아가 감금된 세례 요한을 유혹하다가 뜻대로 안되자 헤롯왕에게 청하여 아예 목을 따버린 '악녀 살로메'로 진화시킨다.
( <베들레헴의 영아 대학살>, 피터르 브뢰겔, 16세기. )
스물 한살의 영국 화가 오브리 비어즐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삽화로 유명해졌는데,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려 외국 도피 중 결핵으로 스물 다섯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무튼 이렇게 '악녀'의 이미지는 '남성'의 잘린 머리와 자동적으로 교합('베톨리아로 돌아가는 유딧' / 산드로 보티첼리, 15세기)하면서 하나의 상징적 우화가 되었고, 그 아이콘이 바로 '유딧'과 '살로메'다.
로마를 대신하여 세금을 징수하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방의 왕이 되었고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유대교'로 개종까지 했음에도 정작 유대인들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은 '헤롯왕가'는 지역의 힘없는 영아들을 대학살하고 성자를 죽였으며 동시에 나약한 여인 '살로메'를 '악녀'로 만들어 후세들, 특히 '남성'들에 의해 두고두고 죽게 만들었다.
하긴, 이 가부장제는 '성녀' 마리아의 '수태고지' 자체도 폭력적으로 관철하는데, 결혼예정자 요셉과 '별도 못 봤는데' 임신했다는 황당무계한 소식을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들은 마리아의 대답은 결국,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임하소서."라는 순종의 언어였다(<수태고지>, 자코포 틴토레토, 16세기 / 프라 안젤리코, 15세기).
가부장제는 '악녀' 뿐만 아니라 '성녀'조차도 폭력적으로 양산한다.
( <수태고지>, 자코포 틴토레토, 16세기(좌) / 프라 안젤리코, 15세기(우). )
이로 인해, 가장 '무서운' 것은 욕정과 욕망에 가득찬 '악녀'와 그녀의 쟁반에 올려진 참수된 '남성의 머리'가 아니라, 수단을 가리지 않고 특히 '약자'인 타인의 희생을 통해 본인의 이익과 목적을 쟁취하는 '정치'와 그런 권력을 탐닉하고 유지하는 '인간'이다.
( <사기꾼>, 조르주 라 토르, 17세기. )
"그러면 이 야무진 악당들과 우둔한 젊은이가 엮어내는 드라마는 왜 이처럼 보는 이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걸까?
그건 어리석은 청년을 비웃은 뒤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갑자기 불안에 사로잡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그림에서는 남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인간의 사악한 시선이 훌륭하게 포착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처럼 분명하게 보일리 없다...
위기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렇지 않다니, 무척이나 두려운 노릇이다. 왜냐하면 어찌 되었든 그 위기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아예 모른 채로 있던 시간이 길면 길수록 파국은 해일처럼 몰아칠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순식간에 전후로 지각이 확장되어 가는 순간, 그것이야말로 '공포의 본질'이리라."
- [무서운 그림 1], <라 투르의 '사기꾼'>, 나카노 교코, 2007.
역시 '무서운' 건 '인간'이다. 사기를 치는 '인간'도 그렇고, 사기를 당하는 '인간'도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이야기일 수 있기에 그러한 관계와 상황 자체가 '공포'다.
17세기 프랑스 루이 13세 궁정화가였던 조르주 라 투르의 그림 <사기꾼>은 이런 상황을 카드 게임 장면을 통해 간명하게 보여준다. 사기를 당하는 '호구'인 귀족 청년은 처음에 쉽게 딴 금화들을 앞에 두고 자기 패에만 몰두하느라 상황을 모르고 있지만 나머지 두 선수와 하인까지 모두 다 한 패거리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만 가능한 장면인데 '짜고차는 고스톱'인 건 사기당하는 사람 혼자만 모른다.
루이 13세의 궁정화가 조르주 라 투르의 이런 단순하고 평면적이며 노골적인 화풍은 이후 루이 14세의 화려한 '바로크'식 분위기에 맞지 않았다. 궁을 나와 고리대금업 등을 통해 재산을 불린 전 '궁정화가' 라 투르는 아마도 전쟁과 약탈, 학살과 페스트가 만연한 당시 유럽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의심하고 세상을 불신하는 극도의 '개인'으로서 '나'만을 믿었을 테고, 이런 세태는 지금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가속화하는 현상이겠지만, 역시 가장 '무서운' 것은 '유령'도 '그림'도 아닌 '인간'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 <카드 사기꾼>, 카라바조, 16세기. )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독일문학과 서양문화사를 가르치는 나카노 교코는 [무서운 그림 1](2007)과 그 속편인 [무서운 그림 2](2008)를 통해 "가장 무서운 건 '천재지변'도, '유령'도 아닌, 바로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20년이 지난 지금, 이제 그런 '무서운' 인류는 '천재지변'이나 '호환마마' 같은 '기후위기'와 '생태위기'적 '바이러스'라는 더 '무서운' 것들에게 잠식당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무서운' 인류의 탐욕과 이기주의가 초래했다는 사실이 '공포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임박한 파국을 정작 당사자 본인만 모르는,
조르주 라 투르의 <사기꾼>에서 극적으로 묘사된 이런 상황과 현실이,
이것을 만든 '인간'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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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서운 그림 1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2007), 나카노 교코, 이연식 옮김, <세미콜론>, 2008.
2. [무서운 그림 2 - 매혹과 반전의 명화 읽기](2008), 나카노 교코, 최재혁 옮김, <세미콜론>, 2009.
3. [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창비>,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