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보이는 명화의 '질서'
'알고 보면' 보이는 명화의 '질서'
- [그림을 보는 기술](2019), 아키타 마사코, 이연식 옮김, <까치>, 2020.
"현대 미술의 대다수는 이렇게 상식을 파괴함으로써 태어났지만, 기존 규칙 자체를 알지 못하면, 무엇을 부수었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 아키타 마사코, [그림을 보는 기술], <3. 균형을 보는 기술>, 2019.
피카소는 한 방향 시선에서 다양한 각도를 그려낸 '후기 인상주의' 선구자이자 미학자 진중권의 표현대로 "마지막 고전주의자이자 최초의 현대주의자"([진중권의 서양미술사])인 폴 세잔의 영향을 받은 '입체파'로 분류된다. 2차원 평면에 3차원을 담고자 했기에 그의 그림은 기괴하다. 그러나 피카소도 '정상적인'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미술가의 '파괴'와 '혁신'은, '무엇'을 파괴하고 혁신하는지 알아야 가능하다.
미국에서 메소포타미아 미술을 공부한 일본의 미술사 연구자 아키타 마사코는 '명화의 구조를 읽는 법'으로써 [그림을 보는 기술]을 정리한다. 그는 영국 탐정 셜록 홈즈가 친구 왓슨에게 한 말, "자네는 보고는 있지만, 관찰하고 있지는 않다네."([보헤미아 왕국의 스캔들], 아서 코난 도일)라는 문장으로 <서문>을 시작하는데, 명화를 감상하는 우리가 '탐정'이 되어 그림의 구조를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유홍준 선생의 '미술사'나 역사기행처럼 "알고 보면 보인다".
우리는 '파괴'나 '혁신' 이전에 먼저 '탐정'처럼 관찰하고 알아야 한다.
[그림을 보는 기술]을 요약하면,
1) 그림의 '초점', 즉 주인공을 찾는다.
2) 보는 이의 시선이 '초점'을 중심으로 따라가는 '경로(leading line)'를 나타낸다.
3) 그림의 척추에 해당하는 '구조선'을 찾아 '균형'을 본다(linear scheme).
4) 색상, 채도, 명도, 명암과 배색 등의 '색'을 본다.
5) '구도'를 통해서 그림의 의미를 알고 '비례' 결정의 기준을 본다.
6) 위와 같이 '초점'-'경로'-'균형'-'색'-'구도/비례'를 통해 본 그림의 '구조'를 바탕으로 그림의 '표면'적인 특징인 '통일감'을 본다.
초보자인 우리가 그림을 볼 때 일단 위의 순서로 아래와 같이 접근해 보자.
1) 중심이든 구석이든 주인공(초점)을 찾고,
2) 그 주인공을 강조하는 시선의 흐름을 따라가 보는데 '회전형'일 수도, '지그재그'일 수도, '방사형'일 수도, 복합적일 수도 있다.
3) 가로든 세로든 가상의 '구조선'을 그어 그림의 균형을 잡는데, 이 '선'들의 관계를 '리니어 스킴(linear scheme)'이라 한다.
4) 색의 종류인 '색상', 색의 선명함인 '채도', 밝기인 '명도'와 전체 '명암'의 관계를 본다.
5) '구조선'들의 복합관계로서 '십자선'과 '대각선' 등 구도의 '마스터 패턴(master patern)'을 읽는다.
6) 위 '구조'를 바탕으로 그림의 전체적인 '표면'적 '통일감'을 관상한다.
이 '그림을 보는 기술'을 토대로 진품 명화를 찾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탐정'이 되어 몇 개의 그림을 읽어보자.
1. [비너스의 탄생], 산드로 보티첼리, 15세기.
그리스 신들의 반란으로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 내다버린 먼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난 미의 여신 비너스(아프로디테)가 조개를 타고 육지로 올라오는 유명한 장면이다. 제우스와의 사이에 큐피드를 낳고 헤르메스와 관계하여 자웅동체인 헤르마프로디테를 낳고 전쟁의 신 마르스와 동침하여 공포의 신 포보스, 술의 신 바커스와도 바람 피우고 나서 남편인 헤파이스토스에게로 돌아간 미의 여신이다.
조개를 탄 비너스는 그림의 주인공으로서 '초점'이자 그 자체로 화면을 반으로 가르는 '구조선'이며, 좌측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우측 계절의 신 호라이의 몸짓을 통해 '회전형 경로'를 그린다. 세로로 삼등분된 '삼분할 구도'로 전체 균형을 맞추면서 '직사각형 속 정사각형'을 구분하는 '래버트먼트(rabatment)' 선을 중심으로 대각선을 그어보면 그 교차되는 안정된 구역에 주인공(초점)이 안착되어 전체적인 안정감을 준다. 마지막으로 좌우 등장인물들은 '황금비율'과 '프랙탈(같은 모양의 반복)'로 수렴된다.
2. [성 가족],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6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산치오 등과 같이 16세기 르네상스 전성기(친퀘첸토)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는 회화와 조각, 건축 등에서 거대한 스케일로 유명하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대작 [최후의 심판]을 거의 혼자 완성했을 정도로 무리했으나 90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피렌체의 거상 도니 가문은 20대에 이미 [피에타] 상과 [다비드] 상을 만들어 명성을 떨치던 미켈란젤로에게 젊은 부부에게 아이가 생긴 것을 축하하기 위해 '톤도(원형 그림)' 형식의 그림을 의뢰했고, 미켈란젤로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요셉이 등장하는 [성 가족]을 완성했다. 그림의 가로선 너머의 '이교도'적인 그리스식 청년들을 배경으로 이 가로선을 넘으면 '기독교' 세계로 진입한다. 그 경계에 앉은 아이는 세례 요한이다. 동정녀 마리아는 중앙에서 르네상스식 육체를 자랑하며 아기 예수를 어색하게 받고 있는데, 예수의 양아버지 요셉은 지나치게 늙었다. 이후 '성 가족' 작품에서도 그는 갈수록 늙어가는데, 마리아와 잠자리도 들기 전 '수태고지'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신'의 명령으로 파혼도 못한 채 예수를 키워야 했던 그는 마리아의 '처녀성'을 지키기 위해 명화 속에서 '늙은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냥 '마스터 패턴'으로서 '십자선'과 '대각선'만 그려 넣으면 주인공(초점) '성 가족'이 균형있게 배치된다. 거기에 가로세로 '삼등분' 선들을 그으면 마리아가 쏙 들어간다. '이교도' 청년들은 원근법과 좌우 대칭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성당 프레스코화, 미켈란젤로. )
3. [파리스의 심판] 연작, 파올로 루벤스, 17세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의 부모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식장에 던진 황금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꼬리표가 달렸고, 서로 예쁜 척 하는 세 여신인 헤라, 비너스, 아테나가 서로 사과를 차지하려다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심판을 맡겼다. 비너스는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를 강탈할 수 있게 하겠다는 약조로 사과를 차지했고 결국 트로이 전쟁으로 치달은 이야기의 발단인 '파리스의 심판'을 바로크 거장 파올로 루벤스는 연작으로 몇 편 그렸다.
그 중 두 편의 그림의 주인공은 비너스일 수도, 파리스(또는 사과)일 수도 있다. 이 두 '초점'을 중심으로 큐피드는 회전하며 어머니 비너스를 따라 흐르고, 파리스(사과)는 양치기 친구와 큰 나무를 배경으로 좌우 균형을 잡는다. 이 두 '초점'은 역시 '래버트먼트' 패턴에 따라 직사각형의 대각선과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교차점에서 중심이 안착되는데, 한편은 파리스가 들고 있는 황금사과가 있고 한편에는 비너스가 손으로 가린 성기가 있다. 전형적인 비너스의 자세는 한손은 가슴을, 한손으로 음부를 가린 '푸티카(putica:정숙한)'라고 하며 한눈으로 비너스임을 알 수 있는 '중심'이자 '초점'이다. 그외 헤라임을 알 수 있는 공작새, 아테나임을 알 수 있게 하는 투구와 방패 등이 있다. 이런 '아이콘(도상)'을 찾는 것도 '탐정'의 역할이다.
4. [당대의 결혼 풍속도] 연작, 윌리엄 호가스, 18세기.
지금은 영국의 유명 화가로 남았지만 혁명으로 들끓기 전 18세기 당시 '로코코' 유럽의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는 '만화 작가' 같이 알려져 있었다. '만화'도 '영화'도 없던 당시에 비해 현대로 치면 한 편의 '영화' 또는 시사풍자 '만화'를 상영하듯 호가스는 연작을 그렸다. 싸구려 술인 '진'이 애기들 우유보다 더 싸서 런던의 모든 빈민이 물처럼 마시다가 지옥처럼 변해가는 '진의 거리'나, 귀족으로서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술, 도박, 여자로 탕진하고 정신병원에 갇혀 생을 마감하는 '방탕아 일대기'는 당대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몰락하는 귀족 집안에 딸을 강제로 시집보내 명예를 얻으려는 졸부가 있었는데, 애초에 사랑 없이 맺어진 이 젊은 부부는 각자의 사치스러운 삶을 살던 중 부인이 불륜을 저지른 장면을 목격한 남편이 결투 중 살해당하고 결국 부인은 매독균에 감염된 어린 아들을 두고 시골에서 자살로 파국을 맞는다는 아주 우울한 이야기가 호가스의 [당대의 결혼 풍속도] 연작이다.
주인공은 젊은 부인으로 꼭 그림의 가운데 중심에 있을 필요는 없다. 이미 중세와 르네상스를 넘어 후기 르네상스 화가 티치아노나 그의 제자인 초기 바로크 시대 틴토레토, 매너리즘의 엘 그레코 등은 주인공(초점)을 구석이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그림의 전체 균형을 맞추었다. 모든 인물들의 등장은 주인공 젊은 부인 또는 그의 정부인 사기꾼 변호사의 주고받는 시선을 알 듯 모를 듯 암시하며 흐른다. 역시 '래버트먼트' 패턴에 따라 가상의 대각선을 교차하면 이 불륜 남녀의 시선으로 집중된다. 어수선하고 사치스런 당대 귀족의 일상을 '만화영화' 같이 그려냈으나 전체적 통일성을 지닌 균형을 갖춰 호가스의 연작들은 현재 '명화'로 남았다.
5. [이삭 줍기], 장 프랑수아 밀레, 19세기.
프랑스 시골 바르비종의 먼 배경을 등지고 이삭을 줍는 세 여인은 그림의 주인공이되, 현실에서는 저 멀리 추수를 하는 농부들로부터 소외된 시골의 과부들일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모두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이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는 말처럼 밀밭의 구석에서 '찌꺼기'들을 거두고 있는 세 주인공은 성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금색, 빨강과 파랑색의 모자를 쓰고 있다. 동시대 프랑스 귀족 시인 보들레르는 '육체 노동자'를 신성하게 그림으로써 지배계급을 위협한다며 밀레를 매우 싫어했다는데, 사실주의 작가 구스타프 쿠르베 못지 않게 바르비종파이자 인상주의 작가 장 프랑수아 밀레 또한 그림을 현실에 대한 '사실적 묘사'의 무기로 썼다.
그림을 가로세로 '삼등분' 하고 십자선을 그려서 보자. 가로 삼등분선 위쪽은 먼 지평선이 있다. 세로 삼등분선에는 세 명의 과부들이 중심을 차지한다. '래버트먼트' 패턴으로 그은 대각선의 교차점에는 각각 좌우의 여인들이 안착되어 있다. 이는 밀레의 다른 작품 [만종]에서도 비슷하게 보이는 구도와 균형이다.
이외에도 '명화'는 그냥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그림을 보는 기술]을 통해 '탐정'처럼 볼 수 있다.
물론, 이 '기술'들은 너무 '도식화'시켜서 기계적으로 도입하는 공식이 아니다. 다만, 막연하게 느끼는 '균형'과 '안정감'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있는 '기술'은 일반인인 우리에게 '명화'를 '명화'로 식별하고 구분하는 안목을 준다.
예술이나 미술에 반드시 '이론'이나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대의 배경에 대한 '지식'과 그림을 종합적으로 보는 '이론'을 바탕으로 보는 그림은 어디서나 '명화'가 될 수 있다.
'알고 보면' 명화가 담고 있는 '질서'가 보이는 것이다.
"미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거장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낸 질서를 파악하고 감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아키타 마사코, 같은책, <5. 구도와 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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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림을 보는 기술](2019), 아키타 마사코, 이연식 옮김, <까치>, 2020.
2. [무서운 그림 3 - 위험한 진실의 명화들](2009), 나카노 교코, 이연식 옮김, <세미콜론>, 2010.
3. [新 무서운 그림 - 명화 속 숨겨진 어둠을 읽다](2016), 나카노 교코, 이연식 옮김, <세미콜론>, 2019.
4. [운명의 그림 - 명화로 풀어내는 삶의 불가사의한 이야기](2017), 나카노 교코, 최재혁 옮김, <세미콜론>, 2020.
5.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인상주의], 진중권, <휴머니스트>,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