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은 무엇이냐?"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은 무엇이냐?"
- [헤르메스의 기둥 1~2], 송대방, <문학동네>, 1996.
"이 작품은 일명 [긴 목의 마돈나(성모)]라고 불리는데, 그 까닭은 이 화가가 성모를 자기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나머지 성모의 목을 마치 백조의 목처럼 길쭉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파르미자니노는 자기가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인 형태를 좋아한다는 것을 열심히 보여주려고 했다. 이런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이 그림의 배경에 인체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비례를 가진 괴상한 모양의 높은 원주를 세워놓았다... 이 화가는 전통적인 수법을 피하고 싶어했다. 그는 완벽한 조화에 관한 고전적인 해결 방식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 에른스트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8. 미술의 위기>, 1950.
1995년 10월에 처음 써 본 단편소설 습작을 학보사에 버리듯 응모하고 군에 입대했다. 창피함에 아무에게도 말은 안 했는데, 결과는 궁금했기에 복학생 선배 한 명에게는 확인해 달라 살짝 부탁을 했다. 휴가 때 그 형한테 들은 얘기로는 "입대를 앞둔 한 젊은이의 넋두리"라는 한 줄 평이었다는데 부러 확인하지는 않았다.
본부대 근무로 부대 밖에서 책을 들여와서 읽을 수 있었다. 1996년에 읽은 소설 중 하나가 [헤르메스의 기둥]이었다.
기갑여단 '민사심리처'에서 예하부대에 신문을 돌리던 나는 아마도 부대내 민간 일간지의 '신간 안내'를 통해 그 책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내가 좋아했던 그리스 신화 속 '헤르메스(머큐리)' 이름을 보고 구입했을 거다.
스물세살의 '소설가 지망생'이 군대에서 읽은 스물일곱살 미술사 전공생의 미스테리 소설은 놀라웠다. 집에 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원서는 먼지만 쌓여 있었고 '추리소설'은 중학교 때 이후로 읽어본 기억이 없었다. 한참 후인 2003년에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보다 앞선 우리 작가의 '미스테리 걸작'이었다.
[헤르메스의 기둥]에서는 하나의 소재로부터 수백년 전의 문예와 역사, 그리고 철학 등 인문학의 향연이 꼬리를 물고 펼쳐졌다.
제대 후 3일만에 단편소설 습작을 한 편 쓴 것도, 다음달에 또 하나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송대방 작가의 [헤르메스의 기둥] 덕이리라. 20대 특유의 조절되지 않는 감성적 문장과 아는 거 다 끌어다가 인용하고 적용하려는 지적인 의욕이 20대의 내 습작들에서도 난무했다. 내 단편들의 모티브는 단연 1996년에 만난 송대방의 소설, [헤르메스의 기둥]이었다.
"파르미자니노, [긴 목의 성모], 1535년경 작, 우피치 미술관 소장.
파르미자니노의 대표작이며 매너리즘 미술의 대표작. 기다랗게 기둥처럼 그려진 성모의 옷은 젖은 옷의 드레이퍼리(drapery) 양식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아기 예수가 누워 있다. 왼쪽에는 목동들이 있으며 한 명은 암포라(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몸통이 불룩나온 항아리)를 들고 있다. 성모의 오른쪽으로는 작은 예언자와 기둥이 있으며 그 의미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둥은 곰브리치에 의하면 길게 늘여진 신체의 미를 좋아했던 파르미자니노의 미학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처럼 뱀 모양의 S자 곡선으로 길게 늘여진 양식을 '스틸레 세르펜티나타(Style Serpentinata)', 곧 '뱀의 양식'이라고 부른다. 파르미자니노는 16세기 초반 이탈리아의 북부 파르마에서 활동했던 작가다. 그는 이외에도 [자화상]이라는 독특한 그림을 남겼다."
- 송대방, [헤르메스의 기둥 1], <1장>, 1996.
( 파르미자니노, [볼록 거울 속의 자회상] )
아마도 르네상스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유학을 간 작가의 논문 주제는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마니에리스모) 화가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1503~1540)였을 것이며, 본격적인 '픽션'이 시작되기 전 대부분의 배경 이야기는 '자전적' 내용일 것이다. 나의 단편 습작들도 그랬고 대부분의 소설가들 초기작은 '자전적 소설'에서 출발한다. 주인공 외 다른 인물들은 주변 사람들의 형식에 나 자신의 분열된 의식을 나누어 인격화된 내용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르네상스의 엄격한 규범을 비틀어 기이한 형태로 표현했던 '매너리즘' 화가 파르미자니노의 대표작은 [긴 목의 성모]다. '이교도'적인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더욱 신비주의적으로 빠진 파르미자니노는 37세에 요절했는데 죽기 전에는 연금술에 빠졌고 [긴 목의 성모]는 죽기 전 6년 동안 그렸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우측 기둥의 기단에 서명을 남겼다고 한다.
움베르토 에코가 [푸코의 진자](1988)라는 소설에서 던진 메시지는 "세상에 중심은 없다"였다. 즉, 거대한 만물의 진자를 지탱하는 거대한 하나의 축이라는 건 없다는 것. '일자'나 '유일신'이 아닌 '다원성'의 세계를 부각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였다. 송대방의 모티브는 분명 움베르토 에코였다. '일자(일원성)'가 아닌 '다자(다원성)', 획일적인 규범이 아닌 구체적인 다양성, '일탈'이 아닌 하나의 양식으로서의 매너리즘과 이를 은유하는 파르미자니노의 [긴 목의 성모].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이 모든 것의 미학적 출발이 되는 그림이다.
그리스 신화 속 '전령의 신' 헤르메스(머큐리)가 그렇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 자체가 인간의 다른 모습이었으므로 기독교식 유일신 같은 전지전능함이 아니라 좌충우돌 모순 덩어리였는데, 그래도 하나의 신은 하나의 표상이 있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처럼. 그러나 헤르메스는 사기꾼, 장사꾼, 도박꾼, 이야기꾼, 운동선수 등을 대표하는 신으로 가장 예측불허한 신이다. 이 헤르메스(Hermes)는 아프로디테(Aprodite)와 교합해서도 특이한 자식을 낳게 하는데, 남성과 여성을 한 몸에 지닌 '자웅동체(雌雄同體)' 헤르마프로다이트(Herma-prodite)'다. 내 전공이 영문학이라 그리스 신화는 관심이 조금 있었음에도 송대방의 [헤르메스의 기둥]을 통해 기억하게 되는 르네상스 인문학 지식이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이후 글쓰기의 소재로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아무튼, 서양미술사 시간에 접한 파르미자니노의 그림에 관심을 갖고 비록 성적은 'B+'였지만 전공논문의 주제로 채택했을 작가 송대방은 관련 자료와 지식을 총망라하여 흥미진진한 내용을 전개해 간다. 오래 전 읽은 소설이라 세부 내용은 잊혀졌으되, 목이 길어 슬퍼보이던 성모 마리아의 좌측 기둥이 지닌 메타포는 남는다. 성모의 옷자락을 기준으로 위로는 하나의 기둥이나 아래로는 여러 개의 기둥들의 형태로 기존 르네상스식 규범을 깬 성 모자(聖母子)에게 기이하게 작은 예언자 히에로니무스(제롬)가 말하는 듯 하다. "하나는 없으며 전체가 하나다"라고. 물론, 이 사상을 대변하는 '이교도'적 신은 말할 것도 없이 '헤르메스' 밖에 없다.
"그리스 태생의 이탈리아계 미술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 1888~1978)는 예기치 못한 것이나 완전히 수수께끼 같은 것과 마주쳤을 때 우리에게 엄습해 오는 낯선 느낌을 포착하고자 했다."
- 에른스트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27. 실험적 미술>, 1950.
작가 송대방은 이 소설 발표 후 나의 기대와는 달리 '종적을 감추었다'. 난 사실 그의 지적인 여행이 계속되기를 기대했고 제대 후 단편소설 몇 편을 끄적일 때도, 졸업 후 '소설가'의 꿈을 접은 후에도 가끔 그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역시 파르미자니노의 '이단'적 매너리즘과 조르조 데 키리코의 '신비'적 초현실주의에 주목했던 그의 소식을 더 찾을 수는 없었다.
현대 초현실주의 화풍을 선구했던 조르조 데 키리코는 20대에 [거리의 신비와 우울](1914) 같은 그림으로 당대의 주목을 받았다. 1차 대전의 먹구름이 다가올 때의 불안과 우울 등을 그려냈다는 평을 들었으나 그 진위는 작가 본인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 이후 후기에는 그런 화풍을 접음으로써 "초현실주의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기도 했다지만, 그의 20대 초기의 작품들은 이후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작가 송대방은 [헤르메스의 기둥] 초반에 조르조 데 키리코의 초반 작품 중 [위대한 형이상학자](1916)를 인용한다. 즉, 그의 이야기가 상당한 '형이상학'적 사고에 기반한다는 것을 암시라도 한다는 듯이. 역시나 [헤르메스의 기둥]을 읽고 난 사람들의 후기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이며 지적 유희에 기반한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나처럼 '글쓰기'에 무한한 모티브를 제공했던 매우 흥미로운 그것으로 말일테다.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자들은 '다다이즘'의 무의식적 '자동기술' 기법에 이어 '콜라주(붙이기)'와 '데페이즈망(추방하기)' 기법 등으로 새로운 작법을 선보이는데, 사물을 현실의 익숙한 장면에서 분리시켜 생뚱맞은 다른 사물과 결합하는 양식이다. 시쳇말로 "니가 왜 거기서 나와?"다. 꿈에서 본 것일 수도, 무의식의 흐름에 따른 표현일 수도 있는데, 현실을 넘어서는 표현으로 '초현실주의'의 특징이다.
1924년에 정립되지 않은 '다다'를 넘어선 하나의 새로운 문예이론으로 '초현실주의'를 선언한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조르조 데 키리코가 '초현실주의'에 미친 결정적인 영향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키리코의 작품에서는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어떤 황홀한 순간을 기다리는 듯 하다. 엇갈린 원근법, 길게 늘어진 그림자, 정체불명의 광원이 만들어내는 신비스러운 분위기. '초현실주의자'들은 거기서 수수께끼 같은 '경이'를 보았다."
- 진중권,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8.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 기법 중 '오브제'는 전통적 조형물의 '초현실주의'적 대체물인데, 조르조 데 키리코는 '폐허'와 얼굴없는 '마네킹'을 통해 전통적인 조형을 대체한다. 그의 작품 [위대한 형이상학자]는 이 무면 마네킹과 폐허를 이루는 사물들의 결합체로 인문학적 유희의 '초현실성'을 표현하는 듯 하다.
1995년 10월 입대 전 응모했던 학보사 당선작은 흡혈귀가 나오는 SF식 소설이었다는 말을 건너건너 전해 들었다. 나는 사실 '지적 유희'를 동반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지향한다고 했지만, 마지막 단편소설에서는 '무의식'과 '살인사건',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4차원에서 넘나들었다. 내 마지막 소설의 모티브는 시인 임화의 '4차원'인 '제4의 점령(占領)'이었다.
인간이 표현하려는 그 어떤 '초현실'도 '현실'에 근거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나는 문학과 예술에 어떠한 '이론'이나 '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적 유희'든 흰소리든 일상을 비틀고 경계를 넘어 다니며 한 바탕 놀면 그만이다. 어차피, 그 어떤 글이 나오든 그 배경은 견고한 지금의 정치경제 현실체제일 테니.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사라졌으나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은 무엇이냐?" 묻던 뛰어난 작가 송대방이 다시금 소설을 쓴다면 과연 어떤 내용과 형식일지 문득 궁금하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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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르메스의 기둥 1~2], 송대방, <문학동네>, 1996.
2. [서양미술사](1950), 에른스트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예경>, 2013.
3.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진중권, <휴머니스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