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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Dec 27. 2020

[붉은 머리 연맹](19세기) - 코넌 도일

미스터리의 '고전적 모티브'

미스터리의 '고전적 모티브'
- 셜록 홈즈 [붉은 머리 연맹] / 영화 [도굴]




"빨강 머리 연맹 - 미합중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바논의 고 이제키아 홉킨스 씨의 유언에 의해 결성된 이 연맹에 빈자리가 새로 하나 생겼다. 회원은 극히 형식적인 일만 하며 그 보수로 주 4파운드의 급여가 지급된다. 심신이 건강한 21세 이상의 붉은 머리를 가진 남성이라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
월요일 11시에 플리트 가의 포프스 코트 7번지에 있는 연맹 사무실로 본인이 직접 와서 던컨 로스에게 신청할 것."
- [빨강 머리 연맹], '홈즈단편 베스트 걸작선 17', 아서 코난 도일, 박현석 옮김, <동해출판>, 2006.


코로나 집콕 크리스마스 기념 하루 지난 집에서 영화 [도굴]을 봤다. 어린 시절 꿈이 '고고학자'였던 나는 아는 것도 없이 '고대 유물!'하면 무조건 본다. 나같은 사람만 있으면 이런 영화 무조건 대박일텐데 현실은 물론 그렇지 않다. 내 취향은 여전히 소수 중의 소수다.



코미디 영화 [도굴]에는 예상보다 실제 유물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태조 이성계의 '보검'도 다른 계획을 숨기기 위해 친 뻥이다. 그냥 '유물' 관련 영화의 분위기만 풍긴다. 영화 중간에 도굴꾼들이 고구려 벽화를 털기 위해 중국 길림으로 가는데 그들이 훔치는 게 아무래도 황해도에 있는 '안악3호분' 벽화로 보임에도 왜 국내성 부근으로 갔는지는 모르겠고 물론 그런 '고증'이 영화흥행에 도움이 될런지는 영화를 모르는 나로서는 더더욱 모를 일이다.


(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 )


어쨌든, 조선 9대 왕 성종의 무덤인 서울 강남 선릉이 임진왜란 때 도굴되면서 왜군에 의해 왕의 시신이 불태워졌으며 선조가 '조선의 엑스칼리버'인 태조 이성계의 보검을 대신 관에 넣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미스터리와 주변 단란주점을 사서 도굴용 지하땅굴을 파는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순간 어린 시절로 갑자기 돌아갔다. 셜록 홈즈가 나오는 단편소설을 읽던 시절로. 그 시절은 내가 '고고학자'를 꿈꾸던 시절이었다.



때는 1890년, 홈즈의 베이커가 하숙집에 '붉은 머리' 남자 윌슨이 찾아왔다. 보통의 의뢰인들은 살인, 협박, 도난 등의 사연을 들고 오는데 윌슨의 사연은 의뢰라기 보다는 단순상담꺼리 같다. 보잘 것 없는 전당포를 운영하며 새로 온 젊은 점원도 임금을 반만 받는 사람을 고용했는데 어느날 '붉은 머리 연맹'의 회원 공석이 생겨 하루 4시간 대영 백과사전 단순 필사만 해도 고액을 받던 윌슨은 어느날 '연맹' 해체소식에 무슨 일인가 한다는 이야기. 단순상담 같지만 홈즈는 냄새를 맡는다. 항상 그렇듯 현장 답사를 다녀온 홈즈는 결국 친구 왓슨과 런던 경시청 경관들을 대동하여 사건을 해결하는데, 월슨의 전당포 뒷편 대형은행에 맡겨진 프랑스 나폴레옹 금화 3만 달러를 훔치려는 도둑이 빨간 머리 윌슨을 전당포로부터 꼬여서 자리를 비우게 하려는 수작으로 '붉은 머리 연맹'을 급조해냈고 도둑의 우두머리는 반값임금만 받는 새로온 전당포 점원이었다는 게 줄거리다. 도둑은 윌슨이 '붉은 머리 연맹' 사무실에 가 있는 동안 빈 전당포 지하에서 은행지점까지 지하땅굴을 파고 있었으며 홈즈는 첫 현장답사에서 유명한 도둑 존 크레이라는 그 점원의 얼굴을 확인한 게 아니라 땅굴을 파느라 더러워진 바지무릎을 슬쩍 본다. '연맹'이 해산했으니 그 주말에 바로 작업이 들어갈 거라는 정확한 예측은 물론이고.



영화 [도굴]에서 선릉을 파기 위해 유령 주점을 확보하는 식의 이야기는 비슷한 도둑질 영화의 단골메뉴일 텐데, 아마도 이런 미스터리극의 '고전적 모티브'가 바로 듣보잡 [붉은 머리 연맹]일 게다. 감독이나 작가는 분명 어린 시절 코넌 도일 경의 [붉은 머리 연맹]을 읽었으리라.



'붉은 머리 연맹'은 '빨강 머리 연맹'이나 '붉은 머리 클럽'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나는 어릴적 초등시절 읽은 대로 이 정체불명의 유령단체를 '붉은 머리 연맹'으로 기억한다. 윌슨씨의 머리는 도둑이 처음 보고 '연맹' 이름을 급조할 정도로 빨간 편에 가깝지만 왠지 '붉은' 게 더 미스터리한 것 같기도 하고 '연맹' 대신 '클럽'은 한참 나중에 나왔지만 남성전용미용실 같아서 내게는 변함없이 '붉은 머리 연맹(The Red-Headed League)'으로 남아 있다.



영화 [도굴]은 코미디 복수극으로 도굴 문화재를 모으는 악당에게 오래전 원한을 갚으면서 동시에 본의 아니게 도굴된 문화재를 국가에 되돌려주며 결말짓는데, 한술 더 떠서 일제가 가져간 우리 문화재를 되털러 일본으로 간다는 호방한 '애국'의 메시지를 남기며 끝난다.
착한 일 하는 도굴꾼들의 결말을 보니 역시 영화를 만든 사람의 '모티브'는 의도했든 아니든 또 다시 [붉은 머리 연맹]이다.


19세기 말 사그라지던 조국 대영제국이 유럽의 오래된 라이벌 프랑스로부터 빌려온 나폴레옹 금화를 지켜내고 역시 본의 아니게 조국의 '자존심'도 지켜낸 홈즈에게 친구 왓슨이 "전 인류의 은인"이라 치켜세웠을 때 그런 거 원래 안 좋아하는 냉소적인 셜록 홈즈는 다음과 같이 '어깨를 들썩이며' 또 굳이 프랑스 작가를 인용하며 말한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 무엇인가에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인 플로베르가 조르주 상드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말이 있네.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것도 아닐세. 그의 일(그가 한 일)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네.'"
- 같은책.


***

1. [빨강 머리 연맹], 아서 코난 도일, 박현석 옮김, <동해출판>, 2006.
2. 영화 [도굴], 박정배 감독, <사이런픽처스>, 2020.
3.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이태호, <덕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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