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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Feb 26. 2022

루터, '배반'의 시간 : 1999~2022년

[루터, 브랜드가 되다], 앤드루 페트그리, 2015.

루터, '배반'의 시간 : 1999~2022년

- [루터, 브랜드가 되다], 앤드루 페트그리, 2015.





"인쇄술은 루터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었다. 루터 역시 독일 인쇄업을 형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결정적인 힘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초기에 많은 것이 서로 협력하며 불가능해 보였던 루터의 생존을 확실하게 해주었다. 그 중 하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쇄술'이었다... 루터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합심한 독일인들의 결의였다... 하지만 '저술가'로서 본능적이고 빼어난 재능이 없었다면 루터는 결코 독일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 이후 '출판업'과 대중 커뮤니케이션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았다. 이는 비범한 인물에 걸맞는 비범한 유산이었다."

- [루터, 브랜드가 되다], <4-12. 유산>, 앤드루 페트그리, 2015.



1.


90학번 선배가 입당원서를 내밀었다.

눈앞에 한 줄기 빛이 잠시 스쳤다. 나는 바로 서명했다. 아직 학생이었으니 당비는 아마 매월 5천원이었을 게다.

민주노총이 결국 해냈다, 고 판단했다.


1999년도 민주노동당 창당준비를 할 때 우리 학교에도 입당원서가 돌았다. 내가 군입대 전이었던 1995년은 1990년 설립된 전노협의 중소기업 직종연대의 선도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이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줄곧 강화되어 온 대기업 노동조합 흐름과 결합하여 전국 단위의 노동조합 총연맹을 추진하던 해였다. 이승만 분단정권의 '대한노총'이 전신인 '한국노총'은 애초에 어용노조들의 연합이니 이제 진정한 민주노조들의 '내셔널센터'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름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줄여서 '민주노총'이었다. 민주노총은 경제투쟁을 앞세우는 '조합주의'가 아니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전면에 걸었다. 민주노총은 창립과 함께 '노동자정당'을 건설할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과 다가올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함께 이야기하고 기대하던 나는 아쉽게도 민주노총 창립대회 한달 전에 입대했다. 그럼에도 그 시절, 노동자가 될 내 눈 앞에 역시 한 줄기 광명의 빛이 내리고 있었다.

이듬해인 1996년에 나는 부대에서 민주노총의 구조조정 저지 총파업 소식을 들었고, 전역을 한 1997년 12월에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위였던 민주노총이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고 본격적 노동계급 대선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물론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탈계급적 슬로건을 내건 권영길 후보의 결의에 찬 삭발투혼이 '불심으로 대동단결'을 외치던 호국당 스님후보와 헷갈리면 어쩌나 염려되기도 했던 군소후보 상황이었지만 학교앞 친구의 자취방에서 군소후보 티비토론을 보던 나는 그래도 조금 가슴이 벅차 올랐다.


21세기 초벽두의 민주노동당 창당 준비대회에서는 신입사원 노동자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 최초의 진보정당의 이름을 짓는 데 작지만 한 표를 행사하기도 했다. 지금은 민주당의 주요 정치인이 된 우리 학교 총학생회장 출신 선배는 '사회민주당'이라는 이름을 밀었고, '정치'적 등급으로 친다면 그보다 좀 아래였을 다수의 노동자들, 아마도 대부분 민주노총 조합원이었을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을 지지했을 것이다. 최초의 진보정당의 당명에는 반드시 '노동'이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민주노총 조합원인 나도 '민주노동당'에 한 표를 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알았지만 '민주노동당'은 오롯이 '노동자정당'은 아니었다. 민주노총은 물론 전국연합의 민족주의 세력,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거대 보수정당 연합에서 배제된 소수 재야정치인 등이 뭉친 '정파연합당'이었다. 무릇 정치란, 통합과 합의, 타협과 연합의 예술이라지만 그 당시 이십대의 나에게 그러한 '정치'의 역사는 타파해야할 구습이었다. 신입사원이라 정신도 없었지만 선배의 지역구에 페이퍼당원으로 남아있던 나는 결국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보고는 내가 사는 지역구 민주노동당 지구당사를 찾아갔고 그 동안 밀린 당비를 특별당비 형식으로 내고는 지구당적을 거주지로 옮겼다. 내가 보기에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우리 사회 '부르주아민주정권'의 마지막 징후였다. 이제 다음은 '노동자민중권력'의 시대라고 나는 감히 예측했고 그 무기는 바로 '진보정당'이었다.

도봉구 지구당으로 당적을 옮긴 나는 퇴근 후 많은 사람들을 지역에서 만났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60003760707&referrerCode=0&searchKeyword=절반의%20승리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민주노동당은 공직선거와 같은 의회주의 투쟁을 하기 위해 활동가가 필요했고 상근자가 절실했다. 노동자들의 소박한 활동만으로는 보수정당과 선거투쟁을 치를 수가 없었다. 점점 더 많은 활동가와 명망가까지 진보정당의 지역구에 연결되었다. 사람들과 만나서 놀고 이야기하고 술마시는 게 실은 더 좋았던 나는 점점 진보정당 지역운동보다 내가 일하는 직장의 노동조합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내건 나의 조직 '민주노총'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종의 퇴행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편'을 정하고 싶었다.


'의회정치'가 아니라 '계급정치'의 '편'으로 말이다.



2.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이런 기존 독자층에 속하지 않는 많은 구매자에게 책을 제공했다... 새로운 운동은 새로운 종류의 책을 요구했다. 디자인과 관련된 이런 도전을 해결해 나가면서 독일 인쇄업자들은 점차 독특하고 즉각 알아볼 수 있는 스타일을 확정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바로 '루터 브랜드(Luther Brand)'였다."

- [루터, 브랜드가 되다], <2-6. 루터 브랜드>, 앤드루 페트그리, 2015.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1483~1546)다. '반대하는 자'를 뜻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운동은 천 년 왕국의 권위를 누려 온 '보편적 교회' 가톨릭 교황에 명확히 반대하기 시작한 대중운동이었다. 독일봉건제국인 신성로마제국의 북독일 지역 소도시 비텐베르크가 그 중심지였고, 대부분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강직한 사제 루터는 평생 교황과 타협하지 않았다. 파문당하고 목숨도 위태로운 이 투쟁에서 루터를 지켜준 것은 그의 글쓰기, 인쇄술과 출판업, 그리고 교황에 적대적인 제후들의 기득권 정치권력동맹이었다.

그리고 잊으면 안되는 요소, 바로 민중에 대한 '배반'도 빠뜨릴 수 없겠다.




영국의 역사학자 앤드루 페트그리(Andrew Pettegree)는 종교개혁의 역사와 인쇄술 및 출판업, 그리고 책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가 2015년에 낸 [루터, 브랜드가 되다(Brand Luther)]라는 책은 단순한 루터의 전기는 아니다. 루터의 결연한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객관적 요인으로 페트그리는 루터의 왕성한 자국어 글쓰기 능력과 구텐베르크 인쇄술 혁명 50년 후 시골도시에서 인쇄업을 대중적으로 번창하게 만든 루터의 관심,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변함없는 출판업의 대성공을 주목하고 있다.



1517년 10월 31일에 루터가 교황의 '면벌부(면죄부:Indulgence)'의 문제점을 반박하는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교회문에 게시했을 때, 사실 '면벌부' 반박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단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도 가톨릭 교황의 이런 행태를 비판했고 정신 제대로 박힌 각지 민중의 성직자들은 이미 자신의 지역에서 반교황의 종교개혁 투쟁을 전개해 온 터였다. 루터보다 한 세기 전 체코 프라하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 : 1372~1415)가 화형에 처해진 후 오랜 동안 '후스운동'으로 봉기한 농민반란은 교황은 물론 당시 농노들을 착취하던 정치권력에 대한 반정부투쟁의 성격도 강했다. 그러나 백년 후 루터에게는 있었으나 백년 전 후스에게는 없었던 것이 바로 '인쇄술'이었다. 루터 시기 바로 전에 시작된 15세기 구텐베르크 인쇄술 혁명은 르네상스 본거지 이탈리아나 남독일 또는 절대왕정 프랑스에서는 활발했을지 모르나 루터가 자리잡은 북독일 비텐베르크 지역에서는 운영 자체가 어려웠다. 라틴어로 낸 인쇄물을 읽을 사람도, 유통할 필요도 없었던 것인데, 라틴어도 유려하게 구사한 젊은 성직자이자 비텐베르크 대학교수 루터는 반교황 투쟁문건을 라틴어만이 아니라 주로 자국어인 독일어로 썼고 지역 인쇄업자가 자신의 저작들을 출간하는 과정을 일일이 관리했다. 디자인과 판형, 문체와 교정 일체를 인쇄업자가 아닌 저자인 루터 자신이 지휘했다. 또한 한 곳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다소 부족한 업자라도 고르게 배분했단다. 루터가 탐욕스러운 교황체제를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규정하며 열었던 '새로운 교회'에서는 독일어 성경을 누구나 읽으며 설교를 들었고 자국어로 찬송가를 함께 불렀으며 소년과 소녀를 망라하면서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을 강조했다. 이것이 루터가 쓴 반교황 반박문건에 대해 라틴어로만 반박하려던 그의 친교황 논적들이 결코 루터를 이길 수 없었던 배경이었다. 의도했든 아니든 루터는 도시 시민들의 지지와 함께하는 '대중운동'을 전개했고, 도시산업으로서의 '인쇄술'과 '출판업'이라는 무기를 통해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을 대폭 강화하고 증폭시켰으며 전유럽으로 확장시켰다. 물론 교황과 대립하던 비텐베르크의 프리드리히 현공의 정치적 후원이 없었다면 루터 또한 파문에 이어 화형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통한 저작권이나 저작료 일체를 주장하지 않은 강직하고 단호한 성직자 루터는 한편으로 인쇄업을 실질적으로 경영했고 정치권력과 실질적으로 결탁했다. 루터를 보호해 준 프리드리히 현공은 반교황의 기치는 내걸었으되 교황이 팔던 '면벌부(면죄부)'와 '성유물'을 대량으로 사들였고 수집했다.



루터의 추종자 중 급진적이었던 토머스 뮌처가 농민반란군의 반정부투쟁에 개입하고 이 농민투쟁이 루터를 보호해주던 봉건지주계급에 도전했을 때 루터는 어쩔 수 없이 '편'을 정해야 했다. 지주의 세속권력과 그리스도의 영적권력의 통합을 바라던 루터는 현재의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계급투쟁과 선을 그었다. 교황의 탐욕과 부패에 한 치도 타협하지 않던 루터의 단호함은 1525년 농민전쟁의 참혹한 패배 후 민중들의 생존투쟁도 용인하지 않았다. 어쩌면 종교개혁의 '대의'를 위한 현실적 계급타협이었을 수도, 애초부터 계급투쟁일 수가 없었을 종교개혁 자체의 한계였을 수도 있겠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19




"가난하고 재산을 박탈당한 자들은 1525년에 루터가 쓴 글들을 읽으면서 가혹한 깨달음을 얻었다. 1525년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결국 그 순수성을 상실한 해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쇄신과 갱신 운동을 이끌던 루터의 지도력이 고취한 원대한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프랑켄하우젠에서의 (농민전쟁의) 끔찍한 결말은 루터가 말한 희망은 내세에서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였다. 루터가 보기에 사회 복음의 약속은 당치 않은 것이었고 결국 참혹한 망상이었다."

- [루터, 브랜드가 되다], <3-9. 결별>, 앤드루 페트그리, 2015.




반교황 종교개혁운동의 지도자 마르틴 루터에게는 논적도 많았지만 정치적 후원자는 물론 실천적이고 지적인 동지도 많았다. 이 동지들은 루터 사후 그의 유산을 둘러싸고 계승권 투쟁을 벌이지만 정작 종교개혁가 루터는 그 어떤 성상과 성인숭배는 배척했다. 아마도 예수도 마르크스도 같았겠지만, '개인숭배'는 인류의 역사에서 인상깊은 운동의 후유증과도 같다. 루터와 동시대 스위스 취리히의 츠빙글리는 루터에게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당신 뜻대로 돼야 한단 말인가?"라고 반발하며 그와 함께하지 않았다는데, 츠빙글리의 후예 칼뱅은 루터 사후의 '유산싸움' 중에 종교개혁계에 '칼뱅주의'를 확장한다. 1세대 루터처럼 지역 권력과 결탁하여 지역 도시민에 밀착한 운동보다는 영국과 프랑스까지 넓혀가는 종교개혁운동 두번째 시즌이 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드루 페트그리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전공인 '인쇄술'과 '출판업', '글쓰기'와 '책', 그리고 '대중 커뮤니테이션'의 역사에서 루터가 남긴 유산 일체를 '루터 브랜드([Brand Luther])'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3.


역시나 2022년의 이번 대선에서도 수구정당과 '민주당'이라는 오랜 역사의 보수정당이 대격돌을 하고 있다. 여당인 민주당 후보의 발차기와 야당인 검찰총장 출신 후보의 어퍼컷이 난무하고, 또 역시나 '노동'은 오래전 '노동운동'을 했던 명망가들이 명판만 챙겨서 들고는 '민주당'으로 대거 들어갔다.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기대했던 '노동자정당'은, 2016~2017년 촛불항쟁 후 들어선 민주정권의 정체와 퇴행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십대와 삼십대에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말에 언뜻 보았던 '한 줄기 빛'의 환영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을 때, 이미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운명은 항상 나를 빗겨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 또한 루터처럼 '편'을 정하기 시작했는가 보다. 차이가 있다면, 루터의 당파성은 '대의'가 있었고 지금의 나는 다분히 '생계'형이라는 점 뿐이다. 반교황적이었으나 반민중적이었던 루터의 단호함은 얼핏 '생계형'으로 볼 수 없겠다.



말과 글로만 씨부리던 르네상스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적그리스도' 교황에게 말과 글은 물론 온몸으로 끝까지 저항하던 루터의 손을 끝내 잡지 않은 이유가 '평화'를 사랑해서였다고 한다.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을 보고 그 옛날에 훈족 아틸라를 보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듯, '신의 채찍' 또는 '하느님의 회초리'로 여기던 루터는 말년에 정치권력과 더 견고히 결탁하면서 그 '이단적 악마'인 투르크 무슬림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해서 그렇지 종교개혁 내내 '평화'를 옹호했음에도 말이다. 다수 농민들의 생계형 '전쟁'을 루터는 한사코 거부했다.



21세기 초에 노무현 정부를 '마지막' 민주정부로 오판하고 다음은 '노동자 진보정당'의 차례라고 내가 생각했을 때, 그 근거는 말할 것도 없이 다수 노동자와 민중의 일상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는 믿음이었다.

대선 후보 발차기의 원조와 짝퉁을 가리자는 희극과 느닷없는 어퍼컷 응수가 재미있기는 해도 나는 대선토론회는 물론 관련 뉴스도 잘 읽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변함없이 거대보수정당들의 기득권동맹이 아니라 다수 대중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편' 들어주는 후보를 지지하기로 한다.


단호했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농민들을 '배반'했던 데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듯이, 나 또한 당선 가능성 없는 '사표'를 행사할 이유가 있다.


나의 생활은 거대 보수양당이 발차기와 어퍼컷을 주고받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그랜드 슬램 한 판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1. [루터, 브랜드가 되다(Brand Luther)](2015), 앤드루 페트그리, 김선영 옮김, <이른비>, 2022.

2. [유럽민중사](2016), 윌리엄 펠츠,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18.

3.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사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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