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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Feb 05. 2022

'미술사'를 읽던 시간 : 2016년

곰브리치와 하우저, 뵐플린과 파노프스키, 그리고 진중권 등의 [서양미술사

'미술사'를 읽던 시간 : 2016년

- 곰브리치와 하우저, 뵐플린과 파노프스키, 그리고 진중권 등의 [서양미술사]





"대수학(代數學/algebra)-아라비아인과 페르시아인에 의해 후기 르네상스 학자들에게 전해진, 자연의 법칙과 변수를 숫자와 문자로 표시하는 훌륭한 도구-의 경우, 레오나르도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그는 자연에서 포착한 패턴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방정식이라는 붓을 사용할 수 없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아니라 '아날로그' 도구가 더 편한 사람이었고, 형태를 통한 '유추(analogies)'도 그 도구 중 하나였다(그렇다, '아날로그analog'라는 단어는 여기서 파생되었다). 그는 (자신의 노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산수는 참되고 완벽한 단위를 사용하는 산술적 계산과학이지만, 연속적 성질을 다루는 데는 무용하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13. 수학>, 월터 아이작슨, 2017.




1.


취학 전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16절 누런 갱지와 모나미 볼펜만 있으면 되었다.

인천직할시 동구 송림동의 2층집은 지금도 아련하게 창밖 풍경이 떠오르는데, 아마도 네다섯살 세상 풍경에 눈을 뜬 첫 그림이었을게다. 위로 누나만 셋이었던 나는 국민(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나가서 놀 친구가 없었다. 그 당시 1층에서 고무신 가게와 만화방 등을 운영하다 망한 어머니는 직장을 다니셨고 누나들이 학교 간 시간 집에 혼자 있던 내게 어머니는 예의 갱지 몇 권과 모나미 볼펜 한 다스를 주고는 일을 나가셨다. 그렇게 나는 이층 창을 열어놓은 어두운 방에 엎드려 혼자 글씨도 베껴 써보기도 했고, 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어머니의 만화가게 영향이었던지 나만의 스토리로 만화책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우연히 밖에 나갔다가 보게 되거나 운좋게 주워 온 영화 '산딸기'나 '애마부인' 포스터의 여주인공의 나체를 몰래 그려보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같은 15세기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주의로 돌아가('부흥'/'Renaissance') 이상적인 인체를 그리고 조각하는 '시각예술(Visual Arts)'을 발전시켰다. 그들 고전주의 예술가들은 여체보다는 우람한 남성의 육체를 이상화하였다지만, 예닐곱살의 나는 그림을 통해 신비한 여성의 육체를 넘보기 시작했다. 어린 내가 몰래 그렸던 '춘화'들은 이층 창가방의 다락방에 숨겨두었지만 아마도 부모님과 누나들에게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기억엔 없지만 '춘화'는 아주 가끔 그렸고 주로 백과사전 삽화에 나오는 공룡 같은 걸 그렸던 것 같다. 할머니 집 티비에서 보았던 마징가도 그렸는데 내가 봐도 꽤 잘 그렸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있다.


매일 방구석에 엎드려 갱지에 모나미 볼펜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당시 나의 장래희망은 '화가'가 아니었다. 아마도 '화가'였다면 채색을 시도했겠으나 나의 꿈은 '화가'가 아니라 '고고학자'였기에 스케치만 했다. 아마도 어린 시절 꿈이 '대통령'이나 '과학자'가 아닌 소박한 '고고학자'였던 이유는 갱지에 스케치한 공룡들과 화석들을 직접 발굴하고 싶어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징가Z에 나오던 헬박사가 실은 고대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을 재발굴하던 '고생물학자'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닥터 헬이 부활시킨 '기계수'는 크레타 문명의 '청동거인' 탈로스들이었고, 더 진화된 악당들이자 그레이트 마징가의 천적인 '전투수'들은 미케네 문명의 부활한 전사들이었다.

고고학자의 동기는 바로 공룡과 화석. 그리고 마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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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말은 그럴싸 했지만 사실 '고고학자'의 장래 희망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학교 다니기 시작하며 혼자 방에서 그림 그리며 공상하는 시간이 줄었고 대부분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게 되었기 때문이겠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다시금 '고고학자'를 생각하게 된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장래 희망이나 꿈은 아니었고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나는 이미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란 걸 알게 된 나이였고, 어린 시절 그 갱지에 모나미 볼펜으로 그림을 그릴 게 아니라 숫자와 수학공식을 가지고 놀았었더라면 '문과'적 인간이 아닌 '이과'적 신인류가 되었을 지도 몰랐겠다는 망상을 하던 시기였다.

내가 다시 '고고학자'를 상기한 동기는 아마도 고대 그리스 미케네 문명을 발굴한 독일의 상인 하인리히 슐리만과 아랍의 페르시아 문명 등을 발굴한 영국의 군인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알게 된 후였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슐리만은 마징가의 모티브였고, 로렌스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 살인을 다룬 추리소설의 모티브라고 난 생각했다.




나와는 아주 다른 '이과'적 인류였을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쓴 미국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 2017년에 출간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전기는 피렌체와 밀라노 등지에서 르네상스의 문을 열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를 주로 레오나르도의 방대한 노트를 토대로 서술해 나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피렌체의 공증인이었던 아버지 피에로 다빈치의 사생아였지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종이와 펜을 늘 가까이 할 수 있었는데, 사실 노트와 펜을 지참하는 습관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도 일종의 유행과도 같았으므로 레오나르도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다만, 레오나르도의 메모와 필기노트는 세상만물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고 분량이 많았으며 집요했기 때문에 유명하다. 인체해부학과 전쟁무기, 수학적 비례와 인력으로 하늘을 나는 비행기, 딱따구리의 혀까지 묘사하는 무한한 호기심과 창의력의 보고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활동하던 당시는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한 동로마 비잔틴제국에서 탈출한 학자들이 서양에 이식한 '르네상스'의 시작점이기도 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의 저자인 월터 아이작슨에 의하면 당시 "레오나르도, 콜럼버스, 구텐베르크가 활약한 15세기는 발명, 모험, 신기술을 통한 지식 전파의 시대였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비슷했다"(같은책, <머리말>). 중세를 극복하려던 그 당시의 시대는 '사생아, 동성애자, 왼손잡이'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포용했고 이들 '르네상스주의자'들은 왕성한 호기심과 창의력을 발휘해 인류 문명을 한층 발전시켰다.





3.


그림은 열심히 그렸으되 꿈이 화가는 아니었던 나는, 어릴적 '숫자(number)'가 아니라 '시각화된(visualized) 그림'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기에 '수학'보다는 '미술'을 더 사랑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수학경시대회는 못 나갔지만 미술경시대회에서 작으나마 상장을 받은 기억도 난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겠지만, '미술'과 '수학'은 상극과 같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 역사적 증거는 창의력과 호기심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위대하게 보여주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그로 인한 출판업의 비약적 발전으로 레오나르도는 선배들처럼 라틴어를 완벽하게 배우지 않아도 갖가지 신문물과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고, '신성비례(황금비례)'와 복식부기의 창안자였던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와 친구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림으로 표현되는 '시각화'에 능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단순한 산수를 틀리기도 했으며 세상만사 법칙을 숫자 대신 변수와 공식으로 표현하는 아라비아의 '대수학(代數學/algebra)'에는 더더욱 약했다. 멈추지 않는 호기심과 관찰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학'과 '군사학' 따위는 밀라노 시절 스포르차 공국으로부터 채용되지 못했고 결국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후세에게 '화가'로 남았다.


레오나르도는 천재였지만 보티첼리나 미켈란젤로 같은 경쟁자들에 비해 '완성작' 별로 없다. 경쟁자들은 권력자들로부터 의뢰받은 작품을 무수히 찍어대는 공장과도 같은 공방을 운영했다. 레오나르도 또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나 밀라노 스포르차 가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모델이었던 사레 보르자 등의 권력자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조수와 장인을 거느렸지만 결국 '화가' 그가 완성한 그림은 [최후의 만찬]  거의 없다. [동방박사의 경배] [모나리자] 같은 작품은 평생 들고 다니며 생각날 때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아마도 초기작 [수태고지] 중기작 [최후의 만찬] [암굴의 성모] 같은 그림도 그가 보기엔 '완성작' 아니었을 정도로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럼에도 그의 호기심은 그의 '완벽주의' 넘어섰다. 의뢰받은 그림을 그리다가도 인체나 말의 움직임 등에서 막히면 그림을 중단하고 노트를 통한 관찰과 연구로 빠져들었다. 아이작슨은 이런 레오나르도의 습성은 지금으로 치면 '주의력 결핍' 수도 있겠다고 진단한다. 평생 강박증과 집요함에 시달렸지만 관심사가 너무도 많았던 그에게 '완성작' 죽어서야 가능한 거였을 테다.





4.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형태와 색채가 '제대로' 될 때까지 그것을 조화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드물기는 하지만 어중간한 해결방식에 머물지 않고 모든 안이한 효과와 피상적인 성공을 뛰어넘어 진정한 작품을 제작하는데 따르는 노고와 고뇌를 기꺼이 감내하는 뛰어난 남녀들이다. 미술가는 계속해서 태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적지 않게 우리들 자신, 즉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느냐 아니냐에 따라, 편견을 갖느냐 이해심을 갖느냐에 따라 미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의 흐름이 끊이지 않게 하고 미술가가 과거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이 미술이라는 보물에 귀중한 것을 하나 더 보탤 수 있게 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 [서양미술사], <27장. 실험적 미술 - 20세기 전반기>,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2016년에 유독 '미술사(美術史)'를 파고들었던 계기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와 아르놀트 하우저, 그리고 진중권 덕분이었다.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아이들을 위한 세계사 이야기로 알게된 오스트리아 출신 예술사가다. 아르놀트 하우저는 문과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내가 도서관에서 몇 번인가 뒤적이고 발췌도 해보았을 문예를 전공하던 학생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헝가리 태생 마르크스주의 예술사학자다. 진중권은 우리가 잘 아는 그 좌충우돌 논객으로 내가 대학 신입생 때 [미학 오디세이]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인데, 발췌와 인용을 중심으로 박식한 해설을 풀어내는 글쓰기 방식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애용하는 구성과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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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던 그 시기는, 바야흐로 내가 노동조합 사무국장 임기를 마치고 위원장 후보가 되기 위해 준비하던 시기였다.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 광풍이 매섭게 몰아치던 시기였고, 내가 활동했던 집행부는 임금피크제 도입과 신인사제도 개편 합의로 인해 조합원 지지도가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다. 파업의 실력이 없는 노동조합은 노사협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던 시기였고, 그 집행부 사무국장이 위원장 후보로 나온다는 것은 이미 예정된 패배라고들 예측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역점'을 쳤고 온통 물에 빠지는 '택수곤'과 '중수감' 괘가 나와 무척 실망하였지만, 내 결정을 되돌리지 않았다. 손자는 고전적 병법에서 "먼저 이겨놓고 싸운다"는 원칙 아래 이기는 싸움만 하라고 전했지만, 내가 아는 인류의 역사는 지는 싸움에도 뛰어들어야 하는 거였다.

결국 나는 패배했지만, 혼자 결정하고 만류하는 주변을 거스르면서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고 생각되던 그 외로운 시기에 대뜸 떠오른 게 아주 오래 전 어두운 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그림을 그리던, 꿈이 화가는 아니었지만 고고학자를 바라며 모나미 볼펜을 휘두르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미술'과 '고고학'은 '미술사학'이었고 그렇게 나는 곰브리치와 하우저,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를 읽으며 그림에 빠져들었고 곰브리치의 말대로 '미술'이 아닌 창의적이고 도전적이었으며 성공도 했지만 더 많은 실패자들로 남은 '미술가'들을 만났다.

'미술사'는 '미술'을 좋아하고 '역사'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놀기 딱 좋은 놀이터였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의 주제는 '모더니즘'이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지성계에서 '모더니즘'은 '혁신'의 다른 말이었다. '미술'은 없고 '미술가'만 존재한다는 곰브리치에게 미술사는 창의적 도전과 실패로 점철된, 그러나 늘 새롭게 혁신되는 시공간이었으며 다양한 예술사조를 돌아보기는 하지만 결국 큰 관점에서는 이 모든 것이 '모더니즘'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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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문예의 역사만이 아닌 '사회사'를 풀어내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즉, 문예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의 정치경제적 배경을 그 나름의 형식으로 반영하고 투영한다는 관점이다. 20세기 중반의 서양 마르크스주의자였음에도 그리 교조적이거나 도식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문학과 예술 일반의 사회적 역사를 서술하는 하우저의 저작은 박정희 군사독재가 한창이던 1974년, 내가 태어난 그 해에 백낙청과 염무웅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처음 국역본으로 우리 사회에 소개했고, 1980~1990년대 대학생 사회에서 문예 전공자들의 필수도서가 되었다. 물론 나는 당시 다 읽지는 못했고 곰브리치로부터 촉발된 [서양미술사]로 인해 처음으로 하우저를 다 읽을 수 있었다. 곰브리치에게 '모더니즘'이 있었다면, 하우저에게는 모든 것이 '낭만주의'였다. 그가 말한 문예계의 '혁명'은 모두 '낭만주의'적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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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양미술사]의 '원조'로 치면 영국의 미술비평가이자 시인이었던 허버트 리드의 [예술의 의미](1931)를 들 수도 있다. 리드는 1부 '예술의 정의'부터 2부 각종 '문예사조'를 비롯하여 3부 예술의 주체인 '예술가의 관점'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미술사의 고전인 허버트 리드의 이 저작은 그럼에도 매우 무미건조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독일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의 [미술사의 기초개념](1915)이 있다. 빙켈만의 18세기 미술비평은 너무 직선적이고 고전주의적이며 시대 변화에 따라 오류도 많아 나는 부러 찾아 읽지는 않았는데, 20세기 초 뵐플린의 미술사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를 통해 원전으로 읽고자 마음 먹고 열심히 메모하면서 읽었다.


뵐플린은 15세기 조토, 마사초, 보티첼리 등의 고전기 르네상스(콰트로첸토)에서 16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뒤러 등의 전성기 르네상스(친퀘첸토)를 지나 17세기 렘브란트, 루벤스 등의 바로크(세이첸토)로 이어지는 시각표현양식의 이행을 다음의 다섯가지 개념쌍으로 이론화한다.


1. '선적인 것(소묘)'에서 '색채적인 것(회화)'으로의 이행

2. '평면성'에서 '깊이감'으로의 이행

3. '폐쇄적 형태'에서 '개방적 형태'로의 이행

4. '다원적 통일성(개별적 완성미)'에서 '단일적 통일성(전체적 완성미)'으로의 이행

5. '절대적 명료성(명료성)'에서 '상대적 명료성(불명료성)'으로의 이행


독일 근대 관념철학의 관점에서 미술사를 서술하는 뵐플린이 칸트 철학에서 차용했을 '직관 범주'로서 이 개념쌍들은 상호 중첩되기도 하고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동일한 사태에 대한 다섯 가지 관점"(같은책, <결론>)이라고 하는데 뵐플린의 이 역작은 딱딱한 이론서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매력적인 미술사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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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글쓰기의 교본과도 같은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1권인 <고전예술편>에서 자주 인용하는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미술사와 미술비평의 최고봉이다.


"과학이 자연현상의 혼돈의 다양성을 이른바 자연의 질서(cosmos)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반면, 인문학은 인간기록(문헌)의 혼돈의 다양성을 이른바 문화의 질서(tabula)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마치 자연과학이 현상이라 불리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듯이, 인문학은 역사적 사실이라 불리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한다... 결국, 자료가 자연의 질서로 조직화되는 연속단계들과 자료가 문화의 질서로 조직화되는 연속단계들은 서로 유사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함의되는 연구방법의 문제들도 마찬가지이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앞에서 얘기했듯이 자연현상의 관찰과 인간기록의 검토가 행해진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자연으로부터의 메시지'가 관찰자에게 받아들여지듯이, 기록도 '판독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관찰과 검토의 결과가 '의미를 지니는' 일관된 체계로 분류되고 정의되어야 한다."

- [시각예술의 의미], <서장: 인본주의적 학제로서의 미술사학>, 에르빈 파노프스키, 1955.


그림, 조각 등의 '시각예술(Visual Arts)'에서 '일차적-자연적 주제'를 넘어 '이미지', '일화', '알레고리' 등을 구분하는 '이차적-관습적 주제'를 파악하는 것, 즉 "미술작품의 형식에 대비되는... 주제 또는 의미에 관련된 미술사 분야"(같은책, <1장. 도상학과 도상해석학 : 르네상스 미술연구에 관한 서문>)로서 '도상학(iconography)'에 그치지 않고 '도상해석학(iconology)'을 개척한 미술사학자가 바로 독일 출신의 미국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1892-1968)이다.


그의 '도상해석학'은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 '일화', '알레고리' 등의 관습적 의미 등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련 문헌과 당시 예술사조 등을 바탕으로 시대의 '문화적 징후' 또는 '상징'을 읽어내고 해석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데 철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림 자체를 읽고 해석하는 '도상학'을 넘어 당시 시대적 상황과 문헌 등을 토대로 미술의 역사적 의미까지 '해석'하는 파노프스키의 '도상해석학'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미술 또는 예술 일반을 접목시키는 위대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어렵고도 난해하다. 만약 내가 '미술 고고사학자'를 꿈꾸었다면 문헌적이고도 서지학 분야를 아우르는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도상해석학'을 로망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다행히도 '미술사학자'의 꿈은 내 인생에서 멀리 빗겨나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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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하지만 그(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가장 주된 재능은 여전히 '화가'로서의 그것이었다. 피렌체에서 지내던 시절에도 그랬고,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그럴 터였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15. 암굴의 성모>, 월터 아이작슨, 2017.



결국 '외로운 결단'에도 불구하고 나는 2016년의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서양미술사]의 시간들은 지금껏 내 독서와 글쓰기 리스트 윗 줄에 있다. '숫자'를 갖고 놀지 못했던 바람에 수학이나 더더욱 대수학과는 먼 길을 걸어왔지만 어릴 적부터 '미술'과 함께 컸고 중년 이후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깨닫게 된 '역사'라는 영역이 '미술사'만큼이나 더 어우러지게 접목되는 교차지점은 없다.


이제 [서양미술사] 관련 고전들을 찾아 읽지는 않지만, 일본의 미술사학자 나카노 교코와 우리나라 신예 미술사 작가 김선지 선생의 책은 꼭 우선 읽어보려고 한다. 다른 미술사학자들도 많겠지만 더 관심을 넓히고 싶지는 않다. [무서운 그림] 시리즈를 통해 고전 명화들의 의미와 역사를 이야기하는 나카노 교코와 '그림속' 시리즈로 천문학과 그리스 별자리신화 등을 고전명화 해설과 접목시킨 김선지 작가의 글쓰기 또한 내 글쓰기의 표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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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군대에서 읽었던 우리나라 미술사 전공학생 송대방 작가의 [헤르메스의 기둥](1996)과 일본 미술사학자 아키타 마사코의 [그림을 보는 기술](2019) 또한 그 유익한 미술 이야기와는 별도로 매우 훌륭한 '미술사'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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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있으니 16세기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화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다. [가장 저명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 열전](1550)이라는 미술사 고전은 해당 분야에서 단연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나 사마천 [사기열전]과 비슷한 반열일 수 있겠는데, 분량이 너무 많고 역시 오류도 많아 일부러 찾아 읽을 엄두를 못내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회사 동기의 책소개로 읽게 된 월터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전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뿐만 아니라 바사리가 역시 추앙하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열전까지 대신 읽을 수 있는 매우 유익하고 귀한 책이었다. 어차피 바사리의 책 목차를 보니 내가 알만한 예술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정도였는데,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바사리의 원전을 읽지 않고도 그 내용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어준다.



다양한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우리에게 '화가'로 남았다.

나 또한 몇 가지 관심사에 도전해 보았지만 이제 중년을 지난 내게 남은 건 '독서'와 '글쓰기' 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였음에도 완성작이 별로없었고 그러나 천재였기에 역사에 이름과 수많은 노트를 남겼다.

결코 천재가 아닌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그리 대중적이지 못해서 이번 생은 망했다.

그래서 나에게 '독서'와 '글쓰기'는 매우 즐겁기는 하나 만만치 않게 고독한 작업이다.

그나마 '미술사'를 읽던 2016년 이후로 '미술'과 '역사'는 나의 독서와 글쓰기가 한바탕 신나게 뛰어노는 무한한 놀이터라 다행이다.



***


1.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 월터 아이작슨, 신봉아 옮김, <북이십일 arte>, 2020.

2.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 에른스트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예경>, 2003.

3.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Social History of Art)](1951), 아르놀트 하우저, 백낙청/염무웅 외 옮김, <창비>, 1974~2016.

4. [미술사의 기초개념(Kunstgeschichtliche Grundbegriffe)](1915), 하인리히 뵐플린, 박지형 옮김, <시공사>, 1994~2016.

5. [예술의 의미(The Meaning of Art)](1931), 허버트 리드, 임산 옮김, <에코리브르>, 2006.

6. [시각예술의 의미(Meaning in the Visual Arts)](1955), 에르빈 파노프스키, 임산 옮김, <한길사>, 2013.

7. [서양미술사], 진중권, <휴머니스트>, 2008~2016.

8. 나카노 교코, [무서운 그림] 시리즈, <세미콜론>, 2008~2019.

9. 김선지, [그림속 천문학]/[그림속 별자리신화], <아날로그>, 2020~2021.

10. [그림을 보는 기술](2019), 아키타 마사코, 이연식 옮김, <까치>,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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