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연속성'의 무질서에 '정합성'을!
'불연속성'의 무질서에 '정합성을!
- [지식의 고고학], 미셸 푸코, 1969.
"'동일성'은 결코 규준이 될 수 없다."
- [지식의 고고학], <4. 고고학적 기술>, 미셸 푸코, 1969.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 '책 좀 읽으니' 어려운 프랑스 현대철학으로 다시금 관심이 갔다. 그냥 순수한 호기심으로 왠지 미셸 푸코 정도는 읽어줘야 할 것 같았다. 푸코의 초기 대표작인 [지식의 고고학](1969)과 그 선행작업으로서 [말과 사물](1966)을 구했다. 두 책의 <서론>을 읽다가 까맣게 잊고 있던 이십여 년전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여태껏 유일하게 읽었던 푸코의 저작 [감시와 처벌](1975)이라는 그 유명한 책이 왜 나의 책장에 없는지 기억이 났다. [감시와 처벌]은 정확한 문장으로 "내 다시는 이 미친놈의 글을 읽는 일은 없다!"는 선언과 함께 쓰레기통에 처박힌 아마도 유일한 책이었다. '미시적 권력학'과 그 은유로서의 감옥감시탑 '판옵티콘' 이야기를 세상 최악의 장황함과 횡설수설 글장난으로 쓸데없이 분량만 늘린 내 일생 최악의 책이기도 했다. 이십여 년 전의 나에게 온갖 철학적 도그마와 '일자(一者)'적 '동일성' 또는 '일관성'을 거부하며, 일종의 현대철학적 정신분열을 거듭해대는 미셸 푸코는 '미친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탄생, 연속성, 총체성 : 이들이 '지성사(知性史)'의 위대한 테마들이며, '지성사'는 이들을 가지고서 (전통적이고) 역사적 분석의 어떤 형태에 밀착된다.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역사에, 그의 방법들에, 그의 요구와 가능성에, 이제는 다소 퇴색해 버린 이 개념들에 여전히 집착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성사'와 같은 분야를 포기할 수 없다고, 나아가 언설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의 다른 모든 형태들은 역사 자체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考古學)'적 기술(記述)은 정확히 '지성사'에 대한 포기이며, 그 가설들과 과정들에 대한 체계적 거부이며, 사람들이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 [지식의 고고학], <4. 고고학적 기술>, 미셸 푸코, 1969.
프랑스 현대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 1926~1984)의 1960년대 초기 대표작 [지식의 고고학](1969) 중에서 내가 뽑은 가장 '정상적'이고 평이한 대목이다. 푸코가 이 장황하고 읽다보면 욕이 나오는 책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사실 이것이 전부라고 봐도 좋다. 고전철학의 전통적 주제인 '주체'를 배제하는 프랑스 '구조주의'의 영향으로 철학을 논하면서 본인은 '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성질을 부리기도 했다는 푸코는, 내가 보기에 결국 철학적 '주체' 개념과 이로 인해 펼쳐지는 철학적 '일자'의 '동일성'과 '일관성', 그로 인한 '역사성' 일체를 거부하는 푸코는, 본인이 뭐라 하든 말든 '구조주의자'가 맞다. 가스통 바슐라르와 루이 알튀세르 등의 '인식론적 단절(절단)' 개념을 차용하면서 '본인은 그들과 다르다'고 한다. 철학이나 '지성사' 일반의 '일관성'을 거부하는 푸코에게 바슐라르나 알튀세르가 말하는 온갖 '인식론적 단절(절단)'과 본인이 말하는 '단절(절단)'은 맥락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니 역시 같은 말이 아니라는 푸코 철학 나름의 '일관성'에 따른 논리적 결론이다. '일관성'의 '지성사'를 '배신'하고 [지식의 고고학]을 세우려는 현대철학자 푸코의 '지성'에도 부득불 '일관성'은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식의 고고학]에 관한 최근의 독자평을 보니 '악플'들이 좀 있던데, 내가 보기에 이 책의 문제는 뜬금없는 한자어가 갑툭튀한다거나 번역문이 비문인 게 아니다. 굳이 불어 원전으로 읽지 않아도 원저자 미셸 푸코의 문장 자체가 뒤죽박죽에 장광설 투성이가 맞을게다. 그런 철학자를 전공한 우리나라 철학자들인 이정우 교수([지식의 고고학])와 오생근 교수([감시와 처벌]) 같은 옮긴이들의 잘못은 내가 보기엔 푸코를 전공했다는 점 말고는 없다. 오죽 했으면 [말과 사물](1966)을 번역한 이규현 선생은 세간에 '제2의 창작'으로 여겨지는 번역 작업은 "두 언어 사이의 이동일 뿐만이 아니라" 그 작업 자체를 넘어, "저자나 작가가 지향하는 방향으로 저자나 작가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하고 실제로 나아가는 작업"([말과 사물], <역자해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푸코 원문 자체를 "저자가 지향하는 방향"대로 번역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읽는 나도 내내 책을 찢어버리고 싶었는데, 그걸 우리말로 옮기던 분들은 얼마나 욕을 해대었을까 생각하니 새삼 번역자들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하게 된다.
전통적인 고전철학이 종교적 교리와 같은 '도그마'가 된 이유를 종교적 '신'과 같은 '일자(一者:The One)'의 '주체성'과 그로 인한 순환논리적 '동일성'에서 찾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이 구조주의 자체가 교리화되는 것을 경계하는 미셸 푸코는 사실 따지자면 '후기-구조주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정도로 보면 된다. [지식의 고고학]의 마지막 5장 <결론>에서도 푸코는 스스로를 '당신'이라고 타자화시키면서 "당신은... 구조주의라는 딱지를... 벗어버리려고 노력했다"(같은책, <5>)고 자화자찬하며 빡빡머리를 스스로 쓰다듬고 있다. 그가 '포스트-모더니스트'인 이유는 '나는 구조주의자이면서 아니기도 하다'는 식의 자기 정체성 규정의 태도 자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푸코가 장황하게 말하는 [지식의 고고학]은 무엇인가.
"문제는 더이상 전통과 흔적이 아니라 '절단(단절)'과 극한인 것이다... '총체화'의 가능성을 의심... '불연속'의 개념... 그것은 역사의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비밀스러웠던, 그러나 결국 '주체'의 종합적인 활동에 연결되어 있던 역사의 이러한 형태의 소멸인 것이다... 그곳에서 마지막 인간학적 구속들이 해체되는 시도... 이 과제들은 어떤 무질서 속에서, 그리고 그들의 일반적인 분절이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은채 소묘되었다. 이제 이들에 '정합성'을 부여할 때이다-아니면 적어도 이를 시도할 때이다. 이 시도의 결과, 그것이 여기 이 책이다."
- [지식의 고고학], <1. 서론>, 미셸 푸코, 1969.
그가 본인의 장황한 '글놀이'에 미쳐서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전 내가 보기에 몇 안되는 '제 정신'으로 쓴 1장 <서론>의 대목이다. 즉, 푸코에게 [지식의 고고학]이란,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연속성'를 과감하게 깨부수고 '불연속성'의 무질서에 '정합성'을 부여하려는 철학적 시도를 그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 형식으로는 2장에서 <언설적 규칙성>을 밝히고 3장인 <언표와 문서고>에서 '언설'의 기표인 '언표'의 '좌표계'를 통해 "언표들의 형성과 변환의 일반적인 체계"(같은책, <3>)인 '문서고'의 요소 속에서의 "특이화된 실천들로서 기술하는 것"(같은책, <3>)이다.
위의 내용과 형식을 종합하면, '총체성'이라는 자루에 언설과 언표, 개념들을 몽땅 쓸어담지 말고 각자의 층위와 역사와 결이 다른 특이한 '맥락'들을 읽어내고 표시하며 밝혀내는 작업이 바로 푸코가 말하는 [지식의 고고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푸코에게 '모순'이란 헤겔식 변증법처럼 서로 지양되고 종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모순' 자체이다. 그냥 다른 것인데 억지로 통합하고 합치자고 하지 말라는 거다. 따라서 [지식의 고고학]은 세상만물을 '일관성'으로 해석하는 '지성사'에 반발하며 각 '언설'과 '언표'들의 차이를, 그 맥락 속에서 그들이 찍은 '좌표'를 읽어내는 철학적 작업인 것이다.
"창조하는 주체의 심급은... '고고학'에 낯선 존재... '지성사'는, 다소 심오한 수준에서, '언설'을 조직화하고 그에게 숨겨진 통일성을 복원시켜주는 '일관성'의 원리를 찾아내는 것을 그의 의무로 삼는다... '고고학'적 분석에 있어서는,... '모순'은,... 그들 자체로서 기술해야 할 대상들이다... '고고학'은 화해의 점을 찾지 않는 것이다... 그들(모순)을 해석 내지 설명에 있어서의 하나의 일반적인, 추상적인 그리고 균일한 원리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지성사'와는 달리, '고고학'은 상이한 '불화의 공간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 [지식의 고고학], <4. 고고학적 기술>, 미셸 푸코, 1969.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에서 정의하는 '고고학'적 분석은 "통일화하지 않고 복수화하는 것"이자, "연결의 특이한 형태들(관계들)을 정의하는 것"이고, "불연속성 자체의 분산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상 같은책, <4>)이다.
푸코에게 '단 하나의' 개념이나 진리 같은 건 없다. 모든 것은 해당 맥락에서의 '관계'들로서 정의되고 기술된다. '지성사' 일반의 통일성에 반발하여 [지식의 고고학](1969)이 갈 길은 이런 '관계'들을 읽어내고 그 정합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 '고고학'의 철학으로 '권력'의 미시학과 계보학까지 푸코는 내처 나아간다. 그 완성작이 바로 1975년에 나온 [감시와 처벌]인 것이다. 지금의 현대철학에서 당연시되는 사유방식의 본격적인 시작을 푸코가 열어제친 것은 맞다. 한세기 전 "신은 죽었다!"면서 니체가 망치를 들고 깨부수려 했던 '신'의 철학을 푸코도 넘어서려 했다. 19세기 근대의 니체가 있었다면, 20세기 현대에는 푸코가 뒤를 이었다. 당시는 지금의 슬라보예 지젝처럼 언제가 되어도 한 지점에서 통일적으로 만나는 날이 오지 않는 '시차적 관점'도 없었고, 아도르노식 끊임없는 '부정의 변증법' 등도 당연시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운동 뿐'이라는 변증법 고유의 진리를 독일 사민당에서 실천하려던 베른슈타인은 '개량주의자'이자 '기회주의자'로 규정되던 시절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부단한 '운동'과 '혁명'이라기 보다 인류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목적'이거나 다른 한편으로 '악마의 사상', 그 둘 중 하나였던, 에릭 홉스봄의 말마따나 이른바 '극단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장광설로 '지식의 고고학'과 '권력의 미시학' 따위를 글놀음하는 철학자는 정신분열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동시대 프랑스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르는 푸코와 비슷한 철학적 사유놀이를 하다가 미쳐서 죽었다. 이러한 시대의 맥락에서 보면 미셸 푸코의 '고고학'적 사유방식은 선구적이고 기념비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니체처럼 너무 장황하다. 비전문가인 독자대중들이 당최 다가갈 수 없는 사유놀이를 통해 철학자 스스로 '영웅'이 된다. 역사를 끌어가는 다수대중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영웅이 되는 점에서 최근 뜬금없이 유행하는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의 면모도 있다.
군복무할 때 진중문고에 있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는 읽을 책이 없던 군시절 아니었으면 읽을 생각도 안 했을 것이었는데, 욕을 해대며 책장을 넘겼음에도 내 책이 아니었으니 부러 버리지는 않았다. 한편, 위대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장황함으로 인해 폐기당하고 만 내 책 [감시와 처벌]은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니 아깝기도 하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시 읽은 푸코는, 또 다시 나의 앵두같은 입술에서 육두문자가 나오게 했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귀한 책을 찢어발길 뻔 하게 만들었지만, 지금의 나는 본래 나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십년 전의 내가 아니다. 난 또 다시 열을 내면서 푸코의 [말과 사물](1966)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열받는 사람들을 최소화하면서도 선구적이고도 위대한 프랑스 현대철학자 미셸 푸코를 최대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의 장황한 저작을 요약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지식의 고고학](1969)이라는 푸코 사유의 계보학에서 중요한 '사전작업'으로 평가되는 책, [말과 사물](1966)을 펼친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272
***
1. [지식의 고고학](1969), 미셸 푸코, 이정우 옮김, <민음사>, 2000.
2. [감시와 처벌](1975), 미셸 푸코, 오생근 옮김, <나남>, 2003.
3. [말과 사물](1966),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222730927364&navType=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