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용원 Jul 15. 2022

종이를 접는 시간 - 1 : 1984~2022년

- [신화동물접기백과], 존 몬트롤, 2010.

종이를 접는 시간 - 1 : 1984~2022

- [신화동물접기백과], 존 몬트롤, 2010.





"사자의 가슴과 얼굴에, 뱀의 꼬리를 가진 채 몸통에서 불을 내뿜는 괴물 키마이라(Chimaera)..."

-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9권>, 647행, 기원후 1세기



1.


재성이네 집은 미용실을 했다. 나는 학교 끝나면 재성이네 미용실 쪽방의 다락에 재성이랑 같이 올라가 놀았다. 가끔 싸우다가 녀석한테 등이나 허벅지 또는 팔을 물려 울면서 집에 가기는 했지만, 1983~1984년 경 나의 놀이터는 친구 재성이네 미용실의 어둑신한 다락방이었다.


1981년, 당시는 '국민학교'라 부르던 초등학교 1학년 때 인천에 살던 우리집은 서울로 이사와 동대문구 이문동 산동네 어귀 전파사집 '이오사'에 세들어 살았다. 재성이네 집은 우리집 골목 내려와 큰길 건너 미용실이었는데 아마도 이문시장 '오바로크집'을 연 우리 어머니의 단골 미용실이었을 수도 있고, 악착같던 재성이 엄마가 우리 어머니에게 고리의 일수놀이를 했을 수도 있다.


인천에서 '마징가'만 알던 나는, 1983년부턴가 재성이 다락방에서 마징가 말고도 수많은 로봇들이 지구를 지킨다는 걸 알게 되었다. 토종 태권브이는 물론 철인28호, 5종 합체 메칸더브이와 사자왕 볼트론, 고대의 용자 라이덴, 변신합체 게타로보를 [슈퍼로봇대백과사전]을 통해 알게 되었고, 사이보그009와 바벨2세의 초능력 만화도 읽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신문물 만화와 잡지를 보고 내 공책에 그림으로 베껴오느라 재성이 다락방에서 통 내려오지 않았을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려서부터 16절지 갱지와 모나미 볼펜으로 살아온 나는 창의력은 몰라도 모사력은 어디서도 뒤지지 않았다.


재성이의 다락방 컬렉션에는 일본 만화책의 모작들과 [로봇대백과사전] 외에 [괴수대백과사전]도 있었는데, 이것도 일본에서 1950년대에 만든 '고질라' 이야기였다. 재성이는 <다이나믹콩콩코믹스>에서 나온 해적판 일본 '대백과사전' 시리즈를 수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한 권에 1천원이었으면 지금으로 치면 20~30배 정도로 보아 2~3만원 정도 아니었을까 싶은데 재성이는 그 귀한 '백과사전'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고질라를 알게된 나는 역시 친구의 다락방에서 안그래도 일본 작품을 무단으로 베꼈을 것으로 추정되는 '괴수백과사전'을 내 공책에 열심히 베꼈다.



나의 그림 모사능력은 그렇게 발전되면서 급기야 고등학교 시절에는 책받침의 귀한 소피 마르소 누님 사진까지 똑같이 소묘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2.


"키메라(Chimera)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동물로, 불을 내뿜는 머리가 세 개 달린 괴물입니다. 머리는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용 또는 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옥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의 형제입니다. 벨레로폰은 사냥을 하다가 실수로 형제를 죽인 죄를 속죄하기 위해 키메라를 죽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페가수스를 타고 날아가 납덩어리를 단 긴 창을 키메라의 목구멍에 쑤셔 넣었습니다. 키메라가 벨레로폰에게 불꽃을 내뿜자 납덩어리가 배에서 녹아 키메라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 [신화동물접기백과], <2. 신화 속 동물 - 키메라>, 존 몬트롤, 2010.



재성이의 다락방 컬렉션에서 뺄 수 없는 것이 또 있었는데, 바로 [종이접기대백과]였다. 누나들로부터 배운 '종이학'을 통해 '주머니접기'와 '펼쳐접기', '꺾어접기' 등의 기본기는 갖추고 있던 나는 온갖 동물과 식물, 나아가 괴수 '라돈'까지 나온 그 책을 따라 종이를 접기 시작했고, 너무 많은 동식물들을 전부 접을 수는 없기에 대부분의 중간 단계를 제끼고는 맨 마지막 최고 난이도로 기억하는 '라돈'을 며칠낮을 바쳐 마스터했다. 나에게는 그 책을 구할 여유가 없었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라돈' 종이접기를 외웠다. 그 결과 반백이 되는 지금까지 대략 38년간 나의 종이접기 최종 필살기는 대괴수 '라돈'이었다.



우리 둘째딸 송은규양은 나를 닮아서 그림과 공작활동, 종이접기 등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재성이의 다락방이 생각난 나는 종이접기 책을 검색하여 몇 권 사주었는데, 종이접기(origami) 세계에서는 미국의 수학자 로버트 랭과 존 몬트롤, 일본의 후지모토 무네지 등이 유명하다. 이들의 종이접기 창작능력을 보노라면 가히 '오리가미' 천재들이라 아니 말할 수가 없이 감탄스럽기 그지없다. 이 중 존 몬트롤(John Montroll)은 어린이들이나 성인남성들도 좋아할 공룡이나 신화속 동물(Mythological Creatures), 12지신(Chinese Zodiac) 등을 많이 접는데, 그의 책 [신화동물접기백과]의 최고난이도는 <키메라>(140pg)와 <머리 셋 달린 용>(148pg)이다.



이 모든 것들을 접을 여유도 시간도 마음도 열정도 없던 중년의 나는 사실, 최근에 닥친 주말가족 생활이 아니었다면 초등때부터의 최종 필살기 '라돈' 하나만으로 버텼을 거다. 그런데 평일 혼자 방에서 책 읽고 글쓰기 끄적대는 것이 지루해졌을 무렵 지금은 '종이접기책'으로 볼 수 없어 거의 '무형문화재' 수준에다가 현재 미국식으로 '로단'이라 불리는 불의 화신 대괴수 '라돈'을 몇 마리 접던 중 문득 다른 필살기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주말에 집에 갔을 때 둘째딸의 [신화동물접기대백과]의 최고난이도를 펼쳐 보았더랬다. 그랬더니 맨 마지막 최고 난이도의 <머리 셋 달린 용>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래전 고질라 시리즈에 등장하던 고질라의 숙적, 초강력 우주 대괴수 '킹기도라'였다. 오래전 재성이 다락방에서처럼 나는 다 건너뛰고 '기도라'에 도전했고 자취방에서 일주일간 접은 결과 '머리 셋 달린 용', '기도라'를 마스터했다. 이제 나에게는 '라돈(로단)'에 이어 '(킹)기도라'의 두 가지 종이접기 필살기가 생긴 것인데, 동양에서 모든 것은 '삼세판', 즉 3의 배수가 장땡이기에 하나 더 도전해 보았다.

존 몬트롤의 책에서 <머리 셋 달린 용> '기도라' 못지않게 별 네 개의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키메라(키마이라)>를 다음 목표로 잡았는데, 역시 최고 난이도인 기도라를 마스터하니 기도라를 접는데 쓰인 온갖 기술과 패턴들의 반복이라 실패없이 금방 키메라를 접을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제우스신의 아들이자 미케네 문명을 건설한 그리스 최초의 반신반인 영웅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치자 그 피에서 날개달린 천마 <페가수스>(116pg)가 태어났고, 이후 코린토스의 용사 벨레로폰은 이 페가수스를 타고 뤼키아의 괴수 <키메라>(140pg)를 처치한다.


Illustrated by Steele Savage

( 기도라 / 키메라 )


이제, 21세기인 2022년의 경기도 오산 독방에서 외로운 시간과 싸우게 된 방랑전사인 나는 '키마이라'까지 종이로 접어서 처치하고 말았다.



3.


오래전 [괴수대백과사전]에서 '킹기도라'의 최후가 어땠는지 기억은 나질 않는다.


아마도 그로부터 1년 남짓의 시간 동안 나는 불의 괴수 '라돈(로단)'을 종이로 완전히 접어버렸고, 용돈을 모아 [괴수대백과사전]과 [로봇대백과사전]을 구입했으며, 가끔씩 내 등을 물어 이빨자국을 내던 재성이의 다락방에 더는 오르지 않았다. 그 즈음 내게는 매우 똑똑하고 호기심 많던 민수라는 새 친구가 생겼고 민수는 종이접기는 못했지만 고질라 스토리텔링에 능했다. 아마도 그 나이에 일찌감치 각종 '대백과사전'을 읽고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 구성을 잘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민수는 이후 중학교 시절까지 내내 나의 단짝이 된다.


당시 우리는 11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1984년의 이야기다.


( 나의 필살기 : 기도라 / 라돈 / 키메라 )


***


1. [신화동물접기백과(Mythological Creatures and Chinese Zodiac Origami)](2010), John Montroll, 신승미 옮김, <봄봄스쿨>, 2015.

2.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기원후 1세기), 오비디우스,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05.

3. [해밀턴의 그리스로마신화](1942), 이디스 해밀턴, 서미석 옮김, <현대지성>, 2022.

4. [Mythology](1940), Edith Hamilton, <New American Library>, 1969. - Illustrated by Steele Savage


https://m.blog.naver.com/beatrice1007/222806934961?afterWebWrite=true


매거진의 이전글 [난처한 미술이야기](2016~2022) - 양정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