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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Aug 12. 2023

다시 못 올 기억, 부질없지만 - 2023. 8.

- 결혼과 입사 대략 20주년 퉁치기 가족여행

다시 못 올 기억, 부질없지만 - 2023. 8. 2 ~ 9

: 결혼과 입사 대략 20주년 퉁치기 가족여행




1.


진심 이 새벽에 일어나 80킬로 떨어진 저 일터로 가야한단 말인가.


사반세기 회사생활 동안 내 일찍이 이렇게 길게 쉬어본 적은 십구년 전 신혼여행 때 말고는 없었다.


입사 20주년 기념으로 회사에서 준 여행상픔권 유효기간도 끝나가고 내년이면 결혼도 20주년인데 연년생 첫째와 둘째 아들딸은 내년부터 줄줄이 고3이시라, 이번 여름 오래간만에 싸구려 동남아 휴양지라도 갈까 하고 처에게 말을 꺼냈다.

우리집의 가훈과도 같은 '민주집중제' 전통에 따라 처자식들의 의견을 경청한 후 내 맘대로 결정해서 지르려고 했다. 그랬더니 원래부터 본인만 빼고 가라시던 무적의 십팔세 아드님은 세계 곳곳의 안되는 이유만 골랐다.

아빠의 동남아 휴양지는 느닷없이 '쓰레기'라 했고, 일본을 가고 싶다는 엄마는 '친일파'가 되었으며, 동아시아 문명발상지 중국은 그냥 '똥끼'라 거부되고, 유럽 르네상스 기행은 이탈리아의 후진 치안 문제로 좌초되었다. 차라리 본인이 좋아하는 축구와 비틀즈의 고장 영국 리버풀로 가자는 아들의 뚫린 입이라고 새어나온 막말은 아빠가 무시했다.

열일곱살과 열한살의 두 따님은 아마도 이 아무말 대잔치 아수라장에서 의견 따위 낼 가치를 못 느꼈을 게다.


아빠가 은근히 가보고 싶었던 대표적 휴양지 하와이행은 무자비한 가격에 무산되었고, 동서양의 역사적인 교차로 터키 이스탄불행은 하필 그 때 터진 터키 남부 지진으로 포기했다.


그래서 간신히 타협점이라고 찾은 게,

지금으로부터 대략 20년 전 엄마아빠가 다녀온 신혼여행지,

바로 호주였던 거다.




2.


이 무슨 휴가 때마다 바다를 건너다니는 상습적 해외여행족도 아닌 내 팔자에 호주라는 델 두 번이나 가냐 싶기도 하지만,

약 20여년 전 젊은 둘이 왔다가 어느덧 다섯 명이 되어 다시 찾는다는 컨셉으로 억지로 끼워맞추니, '민주집중제'가 무너져 진흙탕 막말잔치를 바닥도 없이 이어가던 아수라장도 조용해졌다.

이제 여름휴가 후 손가락 빨며 길바닥에 나앉을 아빠의 경제적 고난만 남았다.

물론 이미 결정된 바, 가장인 내가 기꺼이 감당할 몫이다.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면 밥도 두 번 주고 비행기도 엄청 넓다는 19년 전 아빠의 경험을 말해주니 공항 대합실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시던 세 자식 중 둘째따님이 유일하게 '오~'를 한 번 했다.


코로나 시기 항공사 점보기가 죄다 화물기로 쓰이고 가로 아홉칸 짜리 비행기로 10시간 거리를 날아간다는 건, 해외여행을 자주 가지 않는 나는 몰랐다.

가뜩이나 설국열차 꼬리칸 같이 비좁은 이코노미석에다가 휴가철에 다섯 식구 좌석도 각자 떨어져 가는데, 유일하게 아빠의 경험담에 반응이라도 했던 둘째딸은 옆좌석 서양언니의 다리가 너무 길어 그 언니가 다리를 돌려 꼴 때마다 그 긴 다리에 맞을까 무서웠다고 했다.



시드니 공항에서 한국인 가이드를 만나 블루 마운틴즈에 가면서의 첫 느낌은, 19년 전에 비해 한국인 이민자 가이드들이 여유가 있어보였다는 거였다.

사실 신혼여행 갔던 2005,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시절  가이드들은 솔직히 다소 찌들어 보였더랬다. 시드니의 젊은 가이드는 유학온 배우자를 부양했고, 골드코스트의 중년 가이드는 중고등생 정도의 자녀들 양육비에 허덕인 나머지 생면부지인  앞에서 신세한탄을 일삼았다. 서양의 동양인 이주노동자의 회한이 보여  또한 슬펐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러나 2023 호주의 한국인들은 달랐다. 가이드들도 자녀들이 이미 장성한 장년들이었고 호주의 겨울 한낮 태양 아래 여유롭게 걸었다. 케이팝과 넷플릭스 작품들 덕분에 한국의 위상도 대단히 높아져서 타국땅의 우리 이민자들도 나날이 조국의 위대함을 느낀다고도 했다. 이제 영국의 식민지 호주의 허드렛일은 동아시아에서 역시 동남아와 인도 사람들에게로 넘어갔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수년  싱가포르에서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의 착취를 토대로  화려함과 번성함을 보았던 것처럼.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 이주노동의 현실처럼.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인 아시아 '저개발국' 이주노동의 세계적 착취는 낸시 프레이저의 [식인 자본주의] 말대로 보편적 현상이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06



시드니를 떠나 브리즈번에서의 1박은 신혼여행 때는 없었던 일정이다.


하긴, 시드니-브리즈번-골드코스트 일정만 같지 세부 일정은 그 당시와 대부분 다르긴 했지만 어차피 대충 짧은 시간 훑고 지나가는 여행이란, 해외든 국내든 다를 바 없다. 사진만 수백장 찍어대었지 실은 남는 건 별로 없는 그런 거다.


19년 전 신혼여행 때는 휴대폰 카메라가 대중적이지 않았던지 디지털 카메라 내장칩의 200장이 모자라 일회용 카메라를 두 갠가 사서 다 썼더랬다. 근데 결혼 20년차 현재 남은 건 거의 없다. 이번에 다섯 식구가 각자의 휴대폰으로 찍어 올려댄 수백장의 사진 또한 마찬가지리라.


그렇게 남는 건 사진이 아니라 기억일 뿐이다.

중요한 건 그 기억을 얼마나 붙잡고 있는가 일테고.




3.


오랫만에 처자식들과의 분주하고도 여유롭기도 한 즐거운 일정이었지만,

문득문득 나는 그곳에서 다시 못 올 그 시간들을 붙잡을 수 없음에 슬픈 마음이 들기도 했다.


누구에게라도 오는 이 시간이 더할 나위없이 아쉬웠다.

비싼 돈 주고 간 호주 여행이나 흔치않을 8일간의 휴가가 아쉬운 게 아니었다.

이제 다 커서 조만간 부모의 곁을 떠나게 될 아이들과 보낸 그 시간의 기억을 나는 오래도록 붙잡고 싶었다.

사진들은 사라지고 기억 또한 어느덧 사라지고 말 것을 알기에 집에 빨리 돌아오고 싶었던 마음 한편으로 그냥 호주에서 시간이 그대로 멈추었으면 했다.


8일만의 비현실적인 출근길도,

허공을 부유하던 업무도,

부질없지만 아마도,

다시 오지 않을 내 아이들과의 시간을 좀더 오래 붙잡기 위한 최후의 발악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금방 또 잊혀지겠지.

불 같았던 내 청춘의 신혼여행이 그랬듯,

애잔했고 스산했던 내 중년의 가족여행도, 그렇게.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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