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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Aug 19. 2023

[Vox Populi](1999) - 피터 존스

- '지적인 사람을 위한 고전학 가이드'

'지적인 사람을 위한 고전학 가이드'

- [복스 포플리(Vox Populi)], 피터 존스, 1999.





"서기 1421년 학자인 지오반니 아우리스파(Giovanni Aurispa : 1459년 사망)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배회하고 있었다. 1376년 시칠리아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수학한 아우리스파는 1413년 그리스로 건너가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고 그리스문학 필사본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1년 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그 동안 모은 필사본 중 일부를 되팔았다. 명민한 사람이었던 아우리스파는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왔음을 감지했다."

- [복스 포풀리], <2장. 고대 문헌은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질까>, 피터 존스, 1999.



1.


이상한 일이다.

나는 '김치'도 좋아하고 '만두'도 좋아하는데,

'김치만두'는 좋아하지 않는다.


스무살의 나는 '영어'를 좋아했고,

스물두살에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나의 전공인 '영문학'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영어학'을 좋아했다는 말은 아니고 어쩌다가 철학학회에 들어가게 된 후 '영어'보다는 '철학'을 더 좋아하게 되었던 거다.

스무살 당시 나에게 '영어'는 '제국의 언어'가 되었고 고대 로마제국의 사어 라틴어와 달리 현대 전세계 통용어로 서슬퍼런 위용을 자랑하는 영어를 나는 멀리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입학 전 아버지가 공책에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를 써주시며 처음 알려주셨던 영어는 중고등 시절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과목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영어와 국어만큼은 일등을 하고 싶었다. 그랬으니 스무살 이후 영어가 '제국의 언어'로 보였다 해서 갑자기 싫어질 수는 없었다. 겉은 아닌 척 하면서도 여전히 속으로는 좋아했는데 대학입시를 앞두고 유일하게 전공으로 선택했던 '영문학'은 막상 대학에서 배워보니 마치 '김치만두'와도 같이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2.


"서기 410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로마 군단이 영국을 떠나자 섬에는 켈트족 원주민만 남았다. 이때 영국인의 선조, 즉 프리슬란트족(네덜란드 북부), 색슨족(독일 북부), 앵글족과 주트족(덴마크 남부와 북부)이 들어왔고 그들은 모두 게르만어를 사용했다. 영어는 바로 이 게르만어에서 유래되었다."

- [복스 포풀리], <8장. 영어의 어휘>, 피터 존스, 1999.


'영어학개론' 수업에서였던가 고대 영어를 배우면서 영어는 독일어(게르만어)를 바탕으로 하면서 프랑스어(라틴어)의 어휘로 이루어졌다고 배운 것 같다. 실제로 고대 영어는 독일어와 프랑스어처럼 명사에 남성과 여성, 중성이 있었고 특히 프랑스어(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가 상당히 많았다.

당시의 나는 영어가 독일어의 줄기에 프랑스어의 꽃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고전학자 피터 존스(Peter Jones)가 1999년에 [지적인 사람을 위한 고전학 가이드(An Intelligent Person's Guide to Classics)]라는 제목으로 낸 책이 있다. 이후 '고전을 통해 알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던 모든 것(Everything you ever wanted to know about the classical world but were afraid to ask)'라는 장대한 부제를 달고 개정된 이 책의 제목은 [복스 포풀리(Vox Populi)]다. 이 라틴어 문구를 번역하면 '민중의 소리'라는 의미인데, 나는 오로지 제목에 이끌려 책을 펼쳤다.




"'고전'을 뜻하는 영어 '클래식스(classics)'는 라틴어 '클라시스(classis)'에서 유래했다...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는 '최상등급에 속한다'는 뜻이다... '스크립토르 클라시쿠스(scriptor classicus : 최상급 저술가)와 대조되는 말은 '스크립토르 프롤레타리우스(scriptor proletarius : 하급 저술가)였다."

- [복스 포풀리], <머리말>, 피터 존스, 1999.


이 책은 21세기 현재에 널리 유행하고 있는 인문학 요약서의 20세기말 버전이다. '인문학'의 보고인 서양 문화의 뿌리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역사서라기 보다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역사, 문화, 정치와 법, 사회, 문헌과 언어, 철학과 과학 등에 관한 잡학서라 짧고 알뜰하게 고전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다만, 너무 다양한 주제들을 요약하다보니 잠시잠깐 한눈 팔다가는 이야기가 금세 스쳐 지나가 버린다. 특정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의 가이드에 따라 따로 공부해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class)' 투쟁에서 무산자 '프롤레타리아트'는 유산자 '부르주아지'의 적대계급으로서 투쟁하지만, 그 어원으로서 고대 로마의 라틴어 '프롤레타리우스'의 상대계급은 '계급'이라는 용어 자체의 어원인 '클라시쿠스'였다.

유추하자면,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는 '부르주아' 타도만이 아니라 '계급' 자체의 철폐임을 역설한 칼 마르크스의 개념이 '고전적으로' 이해된다.


세기말의 지식 요약서이긴 하나, '민중의 소리(vox populi)'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저자 피터 존스는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에 미치지 못하는 현대의 의회민주주의에 비판적이다. '민중은 투표 때만 주인이다'라는 18세기 장 자크 루소나 현대의 민주주의에 익숙한 우리 민중들이 정치를 보는 시각 그대로다.

피터 존스는 단언한다. 고대의 문화는 유치한 게 아니라 현대의 정치가 고대의 민주주의 정신에도 한참 모자란 것이라고.

민주주의와 정치 뿐만 아니라 피터 존스가 설명하는 고대의 법과 전반적인 문화는 현대의 그것들에 별로 뒤쳐지지 않는다.

이 책은 결국 현대 서양의 과학과 사상사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결론으로 한다.


'문헌'을 통해 고전과 고대를 이해하는 책이기에 이 책은 '언어' 이야기, 특히 '영어'의 역사를 잘 간추리고 있다. 켈트족이 살던 섬(지금의 영국)에 기원전 5세기 갈리아 지방으로 불린 유럽대륙을 제패한 로마제국이 들어가 갈라아인(유럽대륙인)이 다수 살게 되었고,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서기 5세기 이후 게르만인들이 몰려가 앵글로-색슨족의 나라가 되는 영국의 역사에서 서기 6세기 기독교도의 유입과 11세기 노르망디공이었던 정복왕 윌리엄의 통치 하에 프랑스어만 사용하게 된 영국의회 이야기가 삽입되면 그 자체로 영어의 역사가 된다. 즉, 게르만어를 사용하던 앵글로-색슨에게 프랑스어와 라틴어가 지배언어로 점차로 유입되면서 전체 단어의 절반 이상이 프랑스어와 라틴어에서 변형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더 들어가 보면 이 라틴어는 로마문화 자체가 그랬듯 고대 그리스문화의 산물이다.



그렇게 이 책은 서두를 그리스가 아닌 로마 이야기부터 시작하면서 고대 로마문화에 그리스문화가 미친 중요한 영향을 강조한다.

15세기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한 동로마 비잔틴제국에서 탈주한 지식인들은 서로마 멸망 후 단절되었던 동서양을 다시 접속시켰는데, 이게 '르네상스'였다. 서양 중세문화는 거의 천년 동안 고대 그리스어를 모르고 살았다.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로 여겨진 토마스 아퀴나스 조차 아리스토텔레스를 스페인을 점령했던 이슬람 투르크인들이 그리스어를 번역한 아랍어로 처음 접했단다. 그러나 '인문학'을 부흥시키려는 '르네상스(재부흥)'는 고전기 그리스어와 문헌을 갈망했고 기회 포착이 빠른 아우리스파 같은 지식인은 콘스타티노플을 훑으며 고대 그리스 문헌들을 모아 서양에 내다 팔았다. 필사에 재필사를 거치며 변형되기도 했지만 이 그리스 원전문헌들은 르네상스 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된 것이다.


이를 전후한 14~15세기 영어는 프랑스어는 물론 라틴어를 몰아내고 대중의 언어가 되었고, 비슷한 시기 구텐베르그의 인쇄혁명은 지식 '민주화'의 기점이 된다. 피터 존스에게 현대 영어의 출현과 인쇄혁명 및 책(코덱스)의 출현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복스 포풀리(Vox Populi)], 즉 '민중의 목소리'가 된 것이다.



3.


"그리스 사유 중에서 우리에게 특히 더 큰 영향을 끼친 몇 가지 특색으로는 실증적 연구, 수학을 응용한 자연 세계의 이해, 연역적 공리계를 꼽을 수 있다."

- [복스 포풀리], <11장. 고대의 한계를 넘어서다>, 피터 존스, 1999.


비록 한자권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15세기 우리 한글의 발명과 대중화는 지식 '민주주의'의 기초였다. 왕정시대의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현대식 민주주의자들일 수는 없겠지만 비슷한 시기 서양에서 라틴어를 극복한 영어의 대중화 못지 않게 다수 민중들이 좀더 쉽게 문헌과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토대로서 한글을 만들고 가르쳤음에 깊이 감사한다.

언어의 대중화는 민주주의의 기본 토대를 구축했다. 또한 구텐베르그 인쇄혁명은 이 지식 민주주의에 불을 당긴 혁명적 기제였다.


피터 존스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목적론과 원자론 등의 고대 그리스 철학과 사상까지 요약하며 현대 과학 혁명의 방법적 기초를 다진 그리스 사상의 특징을 강조하고 현대의 과학기술과 실험적 혁명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인문학의 발전을 전망한다.



김치도 좋아하고 만두도 좋아하는 내가 만약 김치만두도 좋아했더라면,

영어영문학 전공자인 내가 영어의 역사를 고전학자 피터 존스의 지식 요약서보다는 오래전 대학 전공필수 수업을 통해 더 잘 간추릴 수 있지 않았을까 잠시 아쉬워하며 책을 덮는다.


***


- [복스 포풀리(Vox Populi] - 고전을 통해 알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없었던 모든 ](1999), Peter Jones, 홍정인 옮김, <교유서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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