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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Sep 16. 2023

[모비 딕](1851) - 허먼 멜빌

- [모비 딕]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모비 딕]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 [모비 딕], 허먼 멜빌, 1851.





1.


"내 이름을 이슈메일(Ishmael)이라고 해두자. 몇 년 전-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또 뭍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가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늘 쓰는 방법이다."

- [모비 딕], <1.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 허먼 멜빌, 1851.



"Call me Ishmael."


유명한 첫 문장이라고들 한다.

내가 이 오래된 영문학 '고전'을 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이 첫 문장에 관한 얘기를 듣고 난 후였다.


직역하면,

"내 이름은 이슈메일" 또는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가 되겠지만,

의역을 한다면,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정도가 더 어울린다고 소설가인 역자 김석희 선생은 말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16장'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을 때 '하갈'이라는 그의 하녀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이스마엘(Ishmael)', 영어식 발음으로  '이슈메일'이라는 인물은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에 의해 쫓겨났기에 '방랑자' 혹은 '세상에서 추방당한 자'의 성경식 대명사가 되었다. 소설 [모비 딕]의 화자 '이슈메일'은 본명이라기 보다는 상징적 이름으로 보는 게 좋다고 역자 김석희 선생은 말한다([모비 딕], '옮긴이의 덧붙임', <작가정신>, 2011). 즉,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바다를 헤매는 화자를 상징적으로 은유한다는 것이니 "Call me Ishmael"을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로 의역한 것이다. 실제로 온갖 상징으로 가득한 작가 허먼 멜빌의 이 장대한 작품을 소설가인 역자는 '창작'의 정신으로 의역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 일단,

19세기 미국의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 1819~1891)이 31세인 1851년에 발표한 대작 [모비 딕(Moby Dick)]의 화자는 본명은 알 수 없지만, 일단 '방랑자'의 상징으로서 '이슈메일(Ishmael)'이라 해두고 긴 고래 이야기를 시작한다.




2.


"... 쾰른 대성당이 탑 꼭대기에 아직 기둥을 세워둔 채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듯이, 나의 '고래학' 체계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둘 작정이다. 작은 건물은 처음에 공사를 맡은 건축가들이 완성할 수 있지만, 웅장하고 참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의 손에 맡겨두는 법이다..."

- [모비 딕], <32. 고래학>, 허먼 멜빌, 1851.



[모비 딕]의 주인공은 화자인 '이슈메일'이라기 보다는, 고래잡이배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Ahab)'일 수도 있고, 남태평양의 흰색 늙은 향유고래 '모비 딕(Moby Dick)'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을 '인생'에 관한 이야기로 읽으면 주인공은 사람인 '에이해브'일 수도, '자연'의 그것으로 보면 고래 '모비 딕'일 수도 있다. '죠스'나 '47미터' 같은 식인상어 영화의 주인공이 사람인가 상어인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르듯이 그렇다. 어쩌면 19세기 소설 [모비 딕]이 그 기원이 아닐는지.


소설은 장황하고 방대하다.

특히 '고래'와 '고래잡이(포경업)'에 관한 이야기는 작가가 최선을 다해 조사하고 연구한 19세기 당시의 자료를 토대로 설명해 준다. 학자나 전문가는 아니지만 스무살부터 육지를 벗어나고자 상선과 고래잡이배를 타고 나갔다가 또 다시 탈주하여 식인종 섬에서 지내기도 하다가 해군이 되어 다시 뭍으로 돌아온 작가 멜빌의 경험이 진하게 녹아있다.

물론 당시는 바닷속 관찰이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20미터가 넘는 길이의 고래를 전체적으로 묘사할 수가 없었다. 뭍에 올라와 야자나무를 들이받고 죽은 고래는 금세 썩고 해체되어 본래 바다에 살던 모습을 재현할 수 없었다. 뼈만 조립해 놓고 상상의 살을 붙여대는 지금의 공룡 재현과 같던 시절이다.


( 조토가 그린 예언자 요나를 삼키는 '고래' )


멜빌은 자신의 조사와 연구, 수년 간의 원양어선 체험을 총동원하여 총 135장에 달하는 소설 [모비 딕]의 수많은 장을 빌어 '고래'와 '고래잡이'에 관해 친절하고도 장황하며 세밀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으나 19세기의 시대적 한계로 인해 '고래'라는 '대성당'의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못한 채 이 "웅장하고 참된 건물"의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에 손에 맡겨"두고 있다.



'고래잡이' 어부 페르세우스가 안드로메다를 구하기 위해 메두사 머리로 물리쳤다는 바다괴수 '크라켄' 또한 어차피 상상의 괴물이라 심해 대왕오징어나 대왕문어 또는 이들을 잡아먹는 대왕고래의 합체물 아닐까 한다.

'고래'는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래 하느님의 말을 전도하라는 지시를 안듣고 도망친 예언자 '요나'를 삼켜버리는 바다괴수로서 첫 역할 이후로 과학의 발전으로 그 온전한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그렇게 내내 베일에 싸인 존재였고 세계를 위협하는 상상속 괴물의 무한한 원천이기도 했다.

어쩌면 멜빌이 [모비 딕]을 쓰던 19세기 중반까지도 '고래'는 그런 존재였을는지 모른다.


( 호가스가 새긴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크라켄'(고래) )


"제우스의 아들인 용감한 페르세우스는 최초의 고래잡이였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모험담과 비슷한 이야기에 저 유명한 성 조지와 용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이 이야기가 페르세우스 이야기에서 간접적으로 유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성 조지의 이야기에 나오는 용이 바로 '고래'였다고 주장하고 싶다. 옛날 연대기에서는 고래와 용이 묘하게 혼동되는 경우가 많고,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 [모비 딕], <82. 포경업의 명예와 영광>, 허먼 멜빌, 1851.


( 귀도 레니가 그린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크라켄'(고래) )


고래가 워낙 크다 보니 소설에서 묘사하는 고래잡이 장면도 세밀하게 와닿지는 않으나 죽은 고래를 배에 올릴 수는 없고 바닷속에 둔 채 지방질 껍질을 벗기고 큰 머리를 잘라 올려 배 위에 거는 장면들이 나온다. 당시로서 고래는 고기보다는 연료와 미용 따위로 쓰는 고급 기름을 얻기 위해 사냥당했다. 북방의 해역에서는 주로 수염고래로 불리는 '참고래(그린란드고래)'였고 남양에서는 머리가 몸길이의 절반 가까이 되는 '향유고래'가 그 대상이었다. 아마도 '향기로운 기름'을 가진 '향유(香油)' 고래가 가장 값이 나갔을 터, 에이해브 선장은 오래 전 세상에서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흰색 향유고래 '모비 딕'을 잡다가 한쪽 다리를 잃었고, 모비 딕에 대한 복수를 위해 다시 바다로 나가게 된 것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잠시 도망친 화자 이슈메일은 우연히 에이해브 선장의 고래잡이배 '피쿼드'호에 역시 여관에서 우연히 한 침대를 쓰게 된 식인섬 출신 작살잡이 '퀴퀘그'와 함께 타게 된다.


'피쿼드'호에는 다른 선원들도 많다. 독선적이고 말이  통하는 독재자 '에이해브' 선장이 있고, 별다방의 시조인 1등항해사 '스타벅' 독실하고 진지하며 그나마 폭군선장에게  말은 한다. 2등항해사 '스터브' 내가 가장 마음에  캐릭터로 힘든 고래잡이업과 빡센 직장상사인 선장 앞에서 한시도 개그를 놓지 않는다. '스터브' '에이해브' 처음 만난 장면부터 최후에 '모비 ' 의해 전원 몰살당하기까지 내뱉은 말과 행동 모두 개그에 대한 그의 진심을 보여준다. 3등항해사인 땅딸이 '플래스크' '스터브' 개그 말벗으로서 듀엣을 이루며 양념을 쳐준다. 이들  명의 항해사는 고래를 잡을  띄우는 개별 보트들의 대장들이다. 본선의 선장이 중대장이면  항해사들은 소대장이다. 이들 보트는 작살잡이 분대장들을 두는데  선원들이야말로 듬직하기 이를데 없다. '피쿼드'호의 작살잡이  명은 모두 '야만인'이다. 1 '스타벅' 밑에는 '이슈메일' 절친 식인종 '퀘그', '개그맨 '스터브' 밑에는 북미 인디언 '타슈테고', 땅딸이 '플래스크' 밑에는 아프리카 흑인 '다구' 있다. 이들 작살잡이들은 기골이 장대하여 배의 온갖 힘든 일을 해결하고 고래잡이 보트에서는 작살로 고래를 공격한다. 사실 듬직한  작살잡이들이 하는 일이 너무 많기에 화자는 이들이 노까지 젓지 않고 빈둥거리다가 작살만 던지면 고래란 고래는  잡힐 거라고 깨알같이 논평을 한다.


( 미켈란젤로와 틴토레토가 그린 예언자 요나를 삼키는 '고래' )


아무튼, 선장이 폭군이든 항해사들이 독실하거나 개그맨이거나 땅딸보거나 작살잡이들이 하는 일이 너무 많더라도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일단 돛대 위의 망꾼이 고래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일사분란하고 치열하게 고래를 사냥한다는 것. 큰 돈을 벌고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한다는 경제적 동기가 일차적이지만, 일단 고래와 싸울 때는 말할 수 없는 진지함과 엄숙함과 사명감이 있다. 위험하고 더럽고 힘든 '3D' 업종의 대명사지만 일할 때는 누구보다 멋지고 자부심 넘친다.

사실, 독자로서 내가 [모비 딕]을 읽으며 가장 공감했던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중년이 된 우리 세대가 본인 일이 아무리 지겹고 싫게 느껴져도 막상 내 일을 하고 내 역할을 맡을 때 임하는 삶의 자세. 진지한 사람(스타벅)도, 개그맨(스터브)도, 키가 모자람(플래스크)이 있어도 자기 역할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다는 삶에 대한 엄숙함. 바로 그것이었다.

다만, 나는 내 일과 역할이 끝날 때까지 개그맨 '스터브'처럼 유쾌하고 싶을 뿐이다. 나의 소망은 유언으로 후세에 길이 남을 개그 한 문장을 쓰는 거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읽은 [모비 딕]의 주인공 역시,

바다괴수 '모비 딕'이 아니라 고래잡이 선원들이었다.

힘들고 험하고 천하지만 자기 일의 기원을 신의 아들 '페르세우스'나 구세자 '성 조지'에서 찾을만한 그 개성적인 인물들 말이다. 다시 말해도 그 중 단연 나의 롤모델은 개그맨 '스터브'다.




3.


"그가 서 있는 기묘한 자세도 나를 놀라게 했다. '피쿼드'호의 뒷갑판 양쪽, 뒷돛 밧줄 가까이에 있는 널빤지에 지름이 1.5센티미터쯤 되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는 고래뼈로 만든 다리를 그 구멍에 끼우고, 한 손을 들어서 밧줄을 움켜잡고 꼿꼿이 서서는, 끊임없이 곤두박질하고 있는 뱃머리 너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두려움 모르는 눈길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정신, 단호하고 양보할 수 없는 무한한 고집이 담겨 있었다."

- [모비 딕], <28. 에이해브 선장>, 허먼 멜빌, 1851.



소설을 읽는 내내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1883)이 떠올랐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03


사실상 주인공인 외다리 존 실버가 소설이 한참 진행된 이후 등장하듯, 역시 고래한테 다리를 잃은 외다리 에이해브 선장도 변죽만 울리다가 <28장>에서야 등장하되 모습은 한참 더 뜸을 들인 후에야 나타난다.



"에이해브는 바다에서 아무런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깊은 바다 속을 들여다 보자, 기껏해야 흰 족제비만 한 하얀 점 하나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살아 있는 그 점은 올라오면서 점점 커지더니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밑바닥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얗게 반짝이는 이빨이었다. 그 이빨들은 구부러진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았었다. 그것은 '모비 딕'의 벌린 아가리와 두루마리처럼 말린 턱이었다. 그의 거대한 몸통은 아직도 푸른 바닷물과 어우러져 어렴풋이 보였다. 번쩍이는 입은 마치 문이 활짝 열린 대리석 무덤처럼 보트 밑에 딱 벌어져 있었다. 에이해브는 이 무서운 유령을 피하기 위해 조타용 노를 옆으로 비스듬히 휘둘러 보트의 방향을 바꾸었다."

- [모비 딕], <133. 추적-첫째 날>, 허먼 멜빌, 1851.



'모비 ' 아예 전설과도 같이 말로만 대양을 떠돌기만 하다가  135  <133> 이르러서야 비로소 집중적으로 사흘간 짧게 등장한다. 그것도 물줄기를 뿜는 다른 고래떼와 달리 백상아리처럼 바다괴수답게 깊은 물속에서  아가리를 벌린  수직을 그리며 위로 솟구친다. 3일간의 추적과정에서 모두 그렇게 등장하는 '' 과연 안드로메다를 제물로 잡아가려는 고대의 바다괴수 '크라켄'이나  조지에게 퇴치된 중세의 전설괴수 '드래곤' 필적한다. 화자 '이슈메일' 고대 사람들이 상상하던 용과 그리핀 등을 포함한 대부분 거대괴수들의 모티브가 바로 고래였다고 단언하고 있다.


( '피쿼드'호의 항해 경로 )


그렇다지만,

소설의 제목도 고래 이름인 [모비 딕(Moby Dick)]이기는 하지만,

혹자는 비극적 최후를 알면서도 불굴의 정신으로 끝까지 도전하는 '에이해브' 선장이 주인공이라고 논평하지만,

내게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개성 넘치는 고래잡이 선원들이다.

세상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보다 그 세상에 치열하게 뛰어든 그 사람들이다.

두 세기가 지났지만 변함없이 열심히 내 일을 해내며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것이다.



"연극은 끝났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가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난파에서 한 사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 [모비 딕], <에필로그>, 허먼 멜빌, 1851.



그렇게 '90년대 한 시절 '신세대'였던 우리세대 모두는 그 당당했던 선원들처럼 언젠가 한 순간에 무대에서 사라지겠지만,

또 어느 누군가는 화자 '이슈메일'이 그랬듯 살아남아서 우리를 주인공처럼 기억해 주리라.


https://brunch.co.kr/@beatrice1007/324


***


1. [모비 딕(Moby Dick)](1851), Herman Melville,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11.

2. [Treasure Island](1883), Robert Louis Stevenson, <Collins classics>, 2010.

3. [1990's -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돌베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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