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체위문(獨體爲文), 합체위자(合體爲字)"
"독체위문(獨體爲文), 합체위자(合體爲字)"
- [허신과 설문해자], 요효수, 1980년대.
"중국문자는 몇몇 기본형체가 조합되어 만들어진다. 상대적으로 말해, "'독체(獨體)'를 '문(文)'이라 하고, '합체(合體)'를 '자(字)'라 한다(獨體爲文, 合體爲字)"라는 말이 있지만,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문자(文字)'라는 말이 전체적인 개념이다."
- [허신과 설문해자], <8장. [설문해자]의 부수>, 요효수.
1.
내가 다닌 남자고등학교에는 여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그녀는 전혀 예쁜 얼굴이 아니었지만, 이과 3반과 문과 4반의 총 일곱반이었던 우리 남학생 약 5백명은 그 홍일점 여선생님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이 대단하게도 뻗쳤다. 가죽 미니스커트를 입고 오면 수업시간에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고, 신혼여행 다녀온 그녀에게 첫날밤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주지 않으면 수업을 거부하겠다며 야유를 보내고 버티다가 선생님이 기어이 소리를 지르고 탁자에 회초리질을 수차례 해댄 후에야 수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원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한자(漢字)를 좋아했던 거였지, 학교 유일한 여선생님의 과목이 한문 시간이어서가 아니었다. 혈기왕성 사춘기였던 나 또한 혼자 몰래 그녀의 성숙하고 탱탱한 육체를 흘끔거리고 온갖 상상을 하며 수업시간에 주머니에 손을 넣기도 했겠지만, 그래서 한문 시간이 좋았던 건 결코 아니었다고 '청렴결백한 모범생'을 감히 자칭하던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지금 쯤은 어느덧 환갑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경희남고의 홍일점 김금희 선생님은 다시 말하지만 전혀 예쁘지 않았음에도 1990~91년 당시에는 이십대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을 테고,
나는, 재차 강조하지만, 그녀의 한때 싱싱했고 탱글탱글했던 육체와는 상관없이, 본래부터 그림 그리듯 한자를 쓰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나의 마지막 한문 선생님으로 남았고, 나는 연습장에다가 열심히 한자들을 그려대면서 가끔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좋아하고 기대했으며, 학력고사를 포함하여 모든 한문 시험문제는 거의 틀리지 않았다.
2.
"'육서(六書)'에 대한 허신의 명칭과 순서는, '지사(指事)', '상형(象形)', '형성(形聲)', '회의(會意)', '전주(轉注)', '가차(假借)'이다.
- [허신과 설문해자], <7장. 문자학의 기본이론-六書>, 요효수.
한자를 좋아하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축의금이나 조의금 봉투에다가 쓸데없이 이름까지 한문으로 써대던 나였지만 오래전 배운 한자의 이론은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몇해 전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을 쳤다가 진짜 아쉬운 점수로 떨어지기 전까지는 한자의 문자이론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지내다가 몇주 전 우연히 [갑골문자]라는 피터 헤슬러의 책을 읽던 중,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책을 알게 되면서 오래전부터 잠재되어 있었을 한자 이론에 관한 흥미가 다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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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0년 동한(東漢/後漢) 시대의 학자 허신(許愼)은 현존하는 최초이자 최고(古)의 한자자전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었고, 그의 아들 허충이 아버지 허신이 이미 늙어 병상에 있었을 서기 121년에 후한 조정에 이 책을 바쳤을 때, [설문해자]가 담은 총 한자의 수는 허신이 지었을 당시의 9,353자에 1,163자가 추가된 1만자가 이미 넘었다고 전한다. 이후 5대10국 말 남당과 송나라 초의 서현과 서개 형제가 허신의 [설문해자]를 기본으로 하여 편찬한 [대서본]과 [소서본]도 약 1만자 이상, 진(晉)나라 학자 여침이 역시 [설문해자]를 기초로 지었다는 [자림(字林)]은 12,825자에다가, 이후 양(梁)나라 고야왕의 [옥편(玉篇)]은 16,917자의 한자를 담고 있단다.
아마도 한자에 관한 이 고전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 '자전(字典)'이나 '옥편(玉篇)'의 유래일 것이며, 그 기원은 바로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일 것이다.
[설문해자]는 그 제목의 뜻 그대로 '문을 설명(說文)'하고 '자를 분해(解字)'하여 한자라는 '문자(文字)'를 해설(解說)하는 책이 되겠다.
한자에 대해 새삼스레 흥미가 재발된 내가 차마 허신의 고전 [설문해자]를 읽을 엄두는 못내고 그 책에 관한 해설서를 찾던 중 발견한 중국학자 요효수의 [허신과 설문해자(許愼與說文解字)]는 1980년대의 [설문해자] 연구서다. 이 책은 [설문해자]의 구조와 분석 및 한계 등을 정리한 책이다.
저자 요효수에 의하면 허신은 후한의 광무제의 후대 명제 때인 서기 58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허신과 설문해자], <1장. 저자 허신>). [설문해자]가 완성된 해가 서기 100년이면 허신은 42세 즈음 한자에 관한 이론을 총망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서기 100년 경에는 아직 한자의 원시 형태인 '갑골문'이나 청동기 '금문' 등의 유물이 발굴되기 전이라 허신은 전국시대의 '대전(大篆)'체 또는 '주문(籀文)', 진시황 시기 전국통일체인 '소전(小篆)'체에 주로 근거했다. 서기전 14세기경 은나라에서 거북의 배딱지와 짐승 어깨뼈 등을 태워 점을 치고 결과를 기록하던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처음 발굴된 것이 19세기 말이라서 그렇다고는 하나 서기 1~2세기 허신의 시대에 상형문자의 원조 갑골문과 금문이 과연 전해지지 않았을지는 의문이기도 하다. 다만, 갑골문에 관한 '문자학'은 분명 없었을 것이므로, 아마도 허신은 갑골문보다는 아직 상형문자의 형태가 많이 남아있던 춘추전국시대와 진한(秦漢) 시대의 '전서(篆書)'체에 주로 근거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문자학의 기본이론'으로서 '육서(六書)'를 정리한다.
이 '육서'가 바로, 내가 고등학교 때 학교 유일한 여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그 이론으로, '지사(指事)', '상형(象形)', '형성(形聲)', '회의(會意)', '전주(轉注)', '가차(假借)'를 이른다([허신과 설문해자], <7장> 참고 및 재인용).
1) 지사(指事)
"'지사'라는 것은 보면 알 수 있고 살피면 뜻이 드러나는 것으로 '상'과 '하'가 그 예이다.
- 허신, [설문해자]
'지사(指事)'는 사물의 형상 그대로가 아닌 추상적 의미를 뜻하며, '윗 상(上)'이나 '아래 하(下)'처럼 '땅(一)'의 '위(•)'나 '아래(•)'를 의미하는 한자들이 일례들이다.
2) 상형(象形)
"'상형'이라는 것은 해당 사물을 그림으로 그리고, 형체를 따라 그려낸 것으로, '일'과 '월'이 그 예이다."
- 허신, [설문해자].
'상형(象形)'은 말 그대로 사물의 형태 자체를 그림처럼 표현한 '표의문자'의 본질적 형태로, '일(日)'과 '월(月)' 또는 '용(龍)', '호(虎)', '마(馬)', '어(魚)' 등의 동물이나 '사람 인(人)' 등의 기본 형태가 그 예다.
3) 형성(形聲)
"'형성'이라는 것은 사물이 성질을 이름으로 삼고 비유되는 바를 취해 서로 조합하여 만든 것으로, '강'과 '하'가 그 예이다."
- 허신, [설문해자].
'형성(形聲)'은 뜻과 소리가 합체한 문자로서 허신의 [설문해자]의 문자 분석의 대부분을 이룬다는 한자 발전의 주요 형태다. 즉, 기본부수와 다른 기본 형태의 결합으로서 하나 또는 여러 문자는 뜻을, 그 중 하나는 소리부를 형성한다. 기본 예는 '강(江)'이나 '하(河)'라고 [설문해자]는 말한다.
4) 회의(會意)
"'회의'라는 것은 부류를 나열하고 의미를 합쳐서,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나타내는 것으로, '무'와 '신'이 그 예에 해당한다."
- 허신, [설문해자].
'회의(會意)'는 여러 의미부가 결합하여 아예 새로운 의미의 한자로 파생된 사례로서 '형성'과 구분되며, '무기를 그치는 전쟁무기 무(武)'는 '창 과(戈)'와 ''그칠 지(止)'의 결합, '사람(人)의 말(言)을 믿는 신(信)' 등의 조합이 그 예가 아닐까 하는데, 허신의 후학들의 이에 관한 다른 이론도 있단다.
5) 전주(轉注)
"'전주'라는 것은 부류를 세우고 하나를 우두머리로 삼아, 같은 뜻을 주고 받는 것을 말하며, '고(考)'와 '노(老)'가 그 예이다."
- 허신, [설문해자].
'전주(轉注)'는 '마음 심(心)'이나 '말씀 언(言)'을 부수로 하는 수많은 한자들처럼, '서로서로 전환하며(轉) 비슷한 뜻으로 주석(注)을 다는' 한층 더 파생된 형태의 글자들이다.
6) 가차(假借)
"'가차'라는 것은 본래 그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어 소리에 의탁하여 개념을 빌린 것으로, '영(令)'과 '장(長)'이 그것이다."
- 허신, [설문해자].
'가차(假借)'는 갑골상형문자를 보지 못했던 한계로 일부 억지 조합으로 분류했던 허신의 해석과는 달리,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을 가리키는 문자와 '부정사'인 '아닐 부(不)', '하여금 령(令)' 같은 글자들이 그 일례들이라고 한다.
"중국의 고대문자는 그 형체구조로 말하자면, '상형문자(象形文字)'의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문자의 형체는 대단히 복잡하고, 게다가 부호의 수도 매우 많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문자는 이미 부호화한 문자이며, 그 발전단계로 말하자면, 이미 어음(語音)과 매우 긴밀하게 결합한 일종의 '표음문자(表音文字)'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음의 기록을 통해 개념을 전달하지, 문자의 형상 그 자체로써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장기간의 발전과정 속에서 문자의 형체(形), 독음(音), 의미(義)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한자 자체의 특징과 그것의 형체, 독음, 의미 간의 관계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해를 위해서는 이해방법과 이론에 관한 체계가 필요한데, 이러한 이론과 방법의 하나가 바로 '육서(六書)'이다."
- [허신과 설문해자], <7장>, 요효수.
고대 은(상)나라 시기 동물뼈에 새긴 갑골문자와 청동기에 새긴 금문 등의 원시 상형문자는 주나라를 거쳐 춘추전국시대의 다양한 전서(篆書)와 대전(大篆) 또는 주문(籀文), 진시황의 전국통일 승상 이사의 소전(小篆)과 고문(古文)을 거쳐 진한의 전국통일 왕조의 표준문자로서 예서(隷書)체가 되면서 둥근 모양의 상형그림에서 정사각형의 추상문자가 된다. 아마도 후한 시대 서기 1~2세기의 허신은 갑골문자학은 몰랐겠지만 그 당시까지 아직 둥근 형태의 그림과 같은 '전서체'에서 각진 문자로서 '예서체'로 전환되던 국가문명의 시기에 한자라는 중국문자학을 총망라하고 체계화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현존하는 유일한 '표의문자'로서 한자는 우리 한글이나 서양 알파벳의 '표음문자'와는 구별되나, 그 한자의 파생과 확장 과정은 요효수에 의하면 '어음(語音)'과 긴밀히 결합되어 '표의문자'로서의 발전과정을 겪게 된다. '문자'는 글과 그림으로 쓰고 새기는 '문'과 여기에 말과 소리로 파생된 '자'로 구성된 것이라 허신이 [설문해자]를 통해 한자의 기본체계와 발전단계를 통해 규정한 것처럼, 모든 문자와 언어는 '표의'와 '표음'의 조화로써 발전한다.
아무튼, 이후 현대 한자의 본격적인 형태가 된 '해서(楷書)체'는 삼국시대 위나라 시기나 되어야 비로소 시작되었다니, 서기 100년 '갑골문자'를 몰랐을 허신의 [설문해자]는 '전서체'와 '예서체'를 기본으로 한다.
"창힐이 처음 문자를 만들 때, 대체로 부류에 근거해형체를 본떴는데, 이 때문에 '문(文)'이라 했다. 이후형체와 소리가 서로 더해졌는데, 이를 '자(字)'라 한다. '자(字)'라는 것은 파생하여 점점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허신, [설문해자], <서(敍)>, 서기 100년.
3.
"허신은 자신이 처했던 시대적 한계 탓에, 그는 단지 주(周)나라 후기 이후부터 진한(秦漢) 때에 이르는 문자자료로만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문자는 원시 상태로부터 이미 상당히 떨어진 이후의 문자자료였다. 그래서 그가 지은 [설문해자]는 단지 이러한 자료에 근거해 문자의 본래 형체, 본래 독음, 본래 의미를 파헤쳐야 했는데,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는 심지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 [허신과 설문해자], <10장. [설문해자]의 평가>, 요효수.
갑골문자학을 알 수 없었던 허신은 와변(訛變)'된 형체에 근거한 해석의 오류를 다수 범했다고 [설문해자] 연구자 요효수는 말한다. 그러나 이는 허신의 [설문해자]의 역사적 한계를 이해하면서 접근해야 할 문제로서, 후학인 청나라 고문학자들처럼 위대한 [설문해자]를 '경전화'시켜서는 안될 일이라고 [허신과 설문해자]의 저자 요효수는 여러 번 강조하면서 논문을 맺는다.
그래서 나는 한자학의 고전 [설문해자]는 존중하되,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한자학을 보기 위해 중국 한자학자 랴오원하오의 [한자나무(漢字樹)] 1~2권으로 한자공부를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2천년 전 허신의 [설문해자]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오래전 전혀 예쁘진 않았던 우리 경희남고의 유일했던 '여신'이자 '만인의 연인'이기도 했던 김금희 선생님을 추억하며,
다시금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에 재도전해 보리라.
"독체위문(獨體爲文), 합체위자(合體爲字)"로서의 한자의 본질을 중심으로 삼아서 말이다.
***
1. [허신과 설문해자(許愼與說文解字)](1980년대), 요효수, 하영삼 옮김, <도서출판3>, 2014.
2. [한자나무(漢字樹) 1~2](2012), 랴오원하오, 김락준 옮김, <교유서가>, 2021.
3. [갑골문자(甲骨文字) - 중국의 시간을 찾아서(Oracle Bones : A Journey Through Time in China)](2006), Peter Hessler, 조성환/조재희 옮김, <글항아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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