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哲學), '개념의 공예'
철학(哲學), '개념의 공예'
- [철학 베스트 50], 히라하라 스구루, 2016.
"다소 거칠게 표현하면 철학은 한마디로 '개념'을 통해 '공통의 이해'를 형성해가는 활동이다. 철학에서는 이를 '공통 이해의 언어게임'이라 부른다... 마음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것을 '개념'으로 완성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개념의 공예'라고 생각할 수 있다."
- [철학 베스트 50], <들어가며>, 히라하라 스구루, 2016.
1.
스무살, 대학 신입생 때 내가 가입했던 영문과 '현대철학반'은 거룩했던 그 이름과는 달리 '현대철학'을 거부했다.
1993년은 30년 이상의 군사독재를 청산하고 문민정권이 출범한 해였다.
광주항쟁의 학살자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쿠데타 대통령을 처벌하자는 민중들의 요구가 있었고, 공권력없는 학생들이 '전두환 체포조'를 자청하며 연희동을 순찰하던 시대였다. 문민정부 또한 이러한 거리의 요구에 부응하듯 군부 잔존세력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통해 부정부패를 정화하기는 하던 시절이었다.
그 해 대학 신입생이었던 우리 '93학번은 이른바 '문민정부 학번'이었다.
한 해 선배인 '92학번까지는 군사독재에 항거했던, 더 좌측에서는 백기완 민중대통령 후보의 득표 1%를 위해 거리에서 노숙을 했다던 험한 시절이었다면 '93학번은 찬란한 세대였다. 그래서 정권과 언론은 우리를 '신세대'라 불렀고, 우리 사회 진정한 '90년대의 시작은 1993년부터였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24
철학도 '신세대'에 맞게 '현대적'이어야 했겠지만, 내가 속한 영문과 학회 '현대철학반'은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현대'와 마르크스주의에서 멈췄다. 우리에게 철학을 가르친 '90~92학번 선배들은 자기들이 아는 게 마르크스주의 뿐이라고 했고 그래도 학회의 주교재가 고대로부터 마르크스주의까지의 철학사를 다룬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1987)였으니 2학년 학회 '교사'가 된 우리에게 시대에 맞게 '현대철학'을 펼쳐보라 권했다.
그러나 막상, 이제 본격적으로 '현대철학'을 할 수 있게 된 우리는,
여전히 '현대철학'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2.
며칠전, 1970년대 일본 노동운동의 대부라는 타카다 모토무의 [유물론 vs. 관념론](1974)을 읽고는 우리 '현대철학반'의 주교재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1987)의 기원을 추측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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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역시 일본인의 책이라 께름직하긴 했어도 일본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의 [철학 베스트 50](2016)를 연이어서 읽어보았다.
고대철학의 출발은 역시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시작했는데 타카다 모토무나 영문과 '현대철학반'(이하 '현철반')과 달리 19세기말 프리드리히 니체와 20세기 에드문트 후설을 넘어 마르틴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를 지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점인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까지 철학의 고전 50권을 요약한 책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윤리 시간에 짧게 배웠던 철학사가 재미있었는데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서 출발했던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만 알다가 대학에 들어와 '현철반' 교재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이하 '철철사')를 통해 나는 고대 그리스 탈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유물론'적 기원을 처음 알게 되었다. 철학사를 유물론과 관념론의 전쟁터로 규정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관점에서 본 철학의 역사다.
타카다 모토무와 '철철사'의 시점이다.
1986년생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는 다시금 우리의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처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 시작한다. 저작을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스승과의 [대화편]을 통해 '보편성'으로서의 철학이라는 학문의 길을 연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근원이 '물'이라 했던 탈레스, '무한'으로 본 아낙시만드로스나 '공기'라 했던 아낙시메네스, '원자론'의 헤라클레이토스 등은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를 그리스 신화에서 개념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철학 베스트 50], <1장>). 그러나 이들은 과학이라는 학문분과가 있을 수 없이 그 자체가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뭉뚱그려져 있던 고대에 그나마 '과학자'들이었던 것이고, "세계의 근거를 '선(善-행복)'이라는 가치에 두었던 (철학자) 플라톤의 통찰은 기존 철학의 수준을 현저히 발전시킨 획기적인 것"(같은책, 같은장)이라고 저자 스구루는 적고 있다. '유물론'의 경향을 갖지 않는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는 철학사에서 과학적 발견의 기원보다는 철학이라는 '보편성'의 학문적 전통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대 신화를 철학적 보편성으로 표현한 플라톤이나 중세 종교의 '시녀'였으나 보편성의 끈을 놓치 않았던 스콜라철학, 내용은 종교와 같으나 형식이 다르다는 근대철학자 헤겔 등의 '관념론'이 진짜 정통 철학으로 부각된다. 고대 그리스 '자생적 유물론'과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유물론'적 요소나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은 이 보편성의 철학사를 보완하는 요소가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사에서 항상 '유물론'의 승리를 보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철학자 스구루는 '보편성'이라는 관념론으로 언제든 회귀한다. 물론, '관념론'에 치우치고 싶지 않은 스구루는 이 철학의 '보편성'을 '공통의 이해'(같은책, <들어가며>)로 치환하여 표현하고 있지만.
수많은 철학자들의 고전 50권을 본인만의 시각으로 쉽게 요약해주고 있는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에게 "철학은 한마디로 개념을 통해 공통의 이해를 형성해가는 활동"(같은책, <들어가며>)이다. 복잡다단한 세계와 이 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개별적 현상들을 통해 보편적으로 적용할 '개념'을 도출하는 철학의 '관념론'적 요소를 저자는 이렇게 규정하면서 '현대철학'적으로 철학은 '언어의 게임'이라 부른다.
'현대철학'은 더 이상 종교와 같은 '관념론'적 요소를 강조하지 않는다. '보편성'을 담지하는 '개념'과 '진리'를 향한 목적지향성은 철학의 불가피한 학문적 본질이겠지만, '현대철학'은 신이나 절대자 또는 '일자(一者)' 따위를 더이상 세계의 근본으로 두지 않는다. 과학의 발전이 항상 앞서고 철학은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황혼녘에 날개를 펴듯 늘 과학의 뒤를 따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언제나 '자생적 유물론자'들이고 철학자들은 과학적 성과의 '개별성'을 '보편성'으로 종합하는 지식의 총결산에 복무한다.
'현대철학'에서 과학과 철학의 학문적 구분은 더욱 명확할지 모르나, '보편성'을 지향하는 학문의 본질상 인문과 자연 각 분야의 과학자들 모두가 철학자가 된다.
"주관은 어떻게 객관을 올바로 인식하는가를 묻는 '주객일치'의 구도는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이란 '욕구에 상관한 가치평가'로서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니체 '인식론'의 기본 원리다."
- [철학 베스트 50], <4장. 현대 1 - 니체부터 하이데거까지>, 히라하라 스구루, 2016.
히라하라 스구루는 프리드리히 니체를 높이 평가한다. 50권 중 3권이나 니체의 저작을 소개하면서 말이다. 스구루에 의하면 니체는 철학의 전통적 '인식론'에 인간 '욕망'이라는 혁명적 요소를 도입하면서 '현대철학'을 시작했다. 스구루가 말한 인간의 '욕구'는 '욕망'이다. 철학은 '보편성'의 학문이라 주체인 인간이 객체로서의 세계를 어느정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에서도 주체의 인식이 객체를 어느정도 반영할 수 있는지가 고전적 주제였다. 주체가 먼저인가 객체가 우선인가를 묻는 '존재론' 다음으로 나오는 철학의 주요 주제가 바로 '인식론'이다.
'유물론'은 '존재론'에서 객체의 일차성을 강조하다보니 '인식론'에서도 인간의 의식 자체도 두뇌라는 물질적 요소를 통한 '물질적 반영'이라고까지 주장하면서 철학의 '관념론'적 요소를 배제하고자 했다. 이에 니체는 '인식론'에서 주객일치의 '보편성'을 향한 경로를 이탈하면서 인간의 '욕망'에 의한 '가치평가'가 인식론을 좌우한다고 한 것이다. 근대의 신을 죽이고 현대를 연 니체가 철학적 '인식론'에서 인간 '욕망'을 개입시키면서 '보편성' 또한 죽이고 말았다. 이제 진리를 아는 건 철학의 '보편성'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는 '초인'으로서 주체다. 철학사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전선을 이탈하고 주체로서의 인간(욕망)을 중심으로 하는 생의 철학과 실존주의 등 현대철학의 문을 연 것이 니체라고 철학자 스구루는 보고 있다.
[철학 베스트 50]에서 히라하라 스구루의 결론은 철학사를 통해 인간 '마음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것을 개념으로 완성'하는 철학은 '개념의 공예'라는 것이다. '현대철학'에서 '보편성'은 거추장스러워졌지만 '공통의 이해'를 지향하는 '개념'을 다듬고 또 다듬는 공예 활동이 바로 '철학'이라는 결론이다.
이를 위해 철학사의 고전 50권은 '읽지 않고는 죽을 수도 없는', 즉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하는 [철학 베스트 50]이 된다.
3.
'현철반'의 선배들이 떠나고 남은 우리 현철반 4인방, 철이엄마와 정박아와 지진아와 벅스터는 결국 '현대철학'과 인간 '욕망'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실존주의는 고민했겠지만 다루지 못했고, 현상학은 무시했으며, '포스트 모더니즘'은 철학으로 보지도 않았다. 당시 1990년대 초반에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20세기 초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리라. 1995년까지 시대는 북유럽 사민주의가 '개량주의'와 비겁한 '기회주의'로 비판받던 시절이었다.
오래전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전학습 지침서](1989)까지는 아니지만, 철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철학 고전들을 읽어주는 히라하라 스구루의 [철학 베스트 50] 같은 책은 여전히 친절하고 고맙다. 살펴보니 비록 나는 50권의 10분의 1인 5권 밖에 읽지 못했지만,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의 말마따나 '철학'은 지식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세계운동의 원리와 이에 대한 사고방식, 공통이해(보편성)를 향한 개념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세상의 '이데아'를 꿈꾸며 '개념'을 지속적으로 다듬어 가는 '공예' 활동으로서 '철학'에 동감한다.
결국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끊임없이 도전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였고, 철학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
1. [읽지 않고 죽을 수 없는 철학 베스트 50](2016), 히라하라 스구루, 이아랑 옮김, <더디퍼런스>, 2024.
2.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전학습 지침서], 모리스 콘퍼스, 이진영 옮김, <새물결>, 1989.
3. [유물론 vs. 관념론 - 철학의 근본문제, 유물론 대 관념론: 역사적 갈등](1974), 타카다 모토무, 최미선 옮김, <책갈피>, 2024.
4.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 이병수/우기동, <돌베개>, 1987.
5. [1990's -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돌베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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