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種)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種)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4)
: ‘진섭세가(陳涉世家)’,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의 현대적 의미(意味)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체제(體制)의 질적변화(質的變化)는 항상 혼란의 시기에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양에서는 로마 공화정 말기 나폴리 북부 카푸아에서 스파르타쿠스라는 검투사 노예가 동료 검투사 70여명을 이끌고 노예의 해방을 위해 로마의 강군(强軍)을 연거푸 거꾸러뜨리며 최대 12만명의 반란군으로써 로마의 멸망을 더욱 가속화한 예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高麗) 무신정권(武臣政權) 시기 만적의 난(亂)이 있었는데 1198년, 당시의 집권자인 최충헌(崔忠獻)의 사노(私奴)로서 6명의 노예와 함께 당시의 수도인 개경(開京)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하던 만적이 노예들과 논의하여 일으킨 난이 대표적이다. 물론 스파르타쿠스의 난은 3년만에 진압되었으며, 만적의 난 또한 동료 노비 순정(順定)이 거사 계획을 주인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사전에 발각되었고 만적을 비롯한 수백 명의 노예들이 체포되어 모두 강물에 던져져 죽음을 당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만적은,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는 노예계급에서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文籍)을 불질러, 우리나라를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식의 연설을 하며 반란을 도모하였다고 하는데,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의 고사 역시 사마천의 <사기>에서 유래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끝장냈던 진(秦)나라의 말기, 하남 출신의 천민으로서 진승(陣勝) 혹은 진섭(陣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포부가 큰 사람으로서 집안이 가난하여 남의집 머슴살이를 하던 중에도 원대한 꿈을 꾸는 자신을 비웃던 사람에게 ‘대붕의 뜻을 참새가 어찌 알겠는가(연작안지 홍곡지지,燕雀安知 鴻鵠之志)’라는 말을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진시황(秦始皇) 사후 진나라 2세 황제 호해(胡亥) 원년인 기원전 210년, 대규모 강제노역에 동원되어 국경지대로 징발되었다. 그런데 큰 비가 와서 길이 막히는 바람에 약속한 시일 내에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소대장격의 인솔책임자였던 진승 또한 당시 진나라의 엄격한 국법에 의해 처형을 면치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한가지라 판단한 진승은 자신의 동료 오광(吳廣)과 모의하여 반역(反逆)을 꾀하게 되는데, 진승 자신은 당시 황제 호해가 제위를 가로채고 쫓아냈던 태자 부소를, 오광은 진나라에게 원한이 가장 컸던 초(楚)나라 장군 항연를 각각 참칭(僭稱)하며 민의(民意)를 모으고자 점쟁이를 찾아간다. 반란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점괘를 들은 진승과 오광은 헝겊에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이라고 써서 그물로 잡은 물고기 뱃속에 넣고 이 물고기로 요리를 하던 병사가 이 헝겊을 발견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신비에 싸인 반란 지도자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깐 이러한 계책과 관련한 성어(成語)를 소개하고 넘어가자.
無中生有(無:없을 무 / 中:가운데 중 / 生:날 생 / 有:있을 유)
즉,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기묘한 계책으로 자신이 얻는 바를 취한다는 뜻인데, 이는 삼십육계(三十六計) 중 제 7계(第 七計)로서 서른여섯 가지 계략(計略) 중 두번째 전략(戰略)인 ‘적전계(敵戰計)’에 속하는 하나의 전술(戰術)이다. 삼십육계는 정통 병법서(正統 兵法書)는 아니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 중국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책략서(策略書)라고 하는데 고대의 손자병법(孫子兵法)은 물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및 삼국시대(三國時代)의 각종 책략(策略)들을 망라한다. 이 서른여섯 가지의 계책들은 여섯 개의 전술(戰術)들이 각각 묶여 다시 여섯 가지 전략(戰略)으로 나뉜다. 첫째가 승전계(勝戰計)로서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우세할 경우의 승리전략, 둘째가 적전계(敵戰計)로서 아군과 적군의 세력이 비슷할 경우 적군을 기묘하게 미혹하는 전략, 셋째가 공전계(攻戰計)로서 자신을 알고 적을 안 다음 계책을 모의하여 적을 공격하는 전략, 넷째가 혼전계(混戰計)로서 적이 혼란한 와중을 틈타서 구사하는 전략, 다섯째가 병전계(幷戰計)로서 상황의 추이에 따라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는 우군을 배반하고 이용하는 전략, 마지막 여섯째가 패전계(敗戰計)로서 상황이 가장 불리할 경우 열세를 우세로 바꾸기 위한 전략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삼십육계 줄행랑’은 삼십육계의 마지막 서른여섯 번째 계책으로서 ‘주위상계(走爲上計)’를 이르는데 여섯번째 전략인 ‘패전계’의 최후 전술로서 불리할 경우에는 앞뒤 안보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上策)이라는 것이다. 다른 병법도 그렇지만 전쟁에 있어서 뛰어난 전략전술론(戰略戰術論)인 이 삼십육계를 현실적으로 가장 잘 활용했던 인물은 20세기 초중반 중국혁명(中國革命)을 이끌었던 모택동(毛澤東)이라고 한다.
어쨌든, 대규모 징용을 위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상황의 진승, 오광은 어느날 자신들의 인솔을 총괄적으로 맡고 있던 장교 두 명이 술에 취한 사이에 목을 베고 거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900명의 병사들 앞에서 한 진승의 선동연설을 들어보자.
“우리는 비 때문에 길이 막혀 이미 기한 내에 도착하기는 틀렸다. 가 봤자 모두 죽을 뿐이다.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 개죽음을 당하다니 말이 되는가! 어차피 죽을 바에는 세상을 한 번 깜짝 놀라게 해 주자.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 모두 다 같은 인간일 뿐이다. 우리라고 왕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王侯將相 (王:임금 왕 / 侯:영주 후 / 將:장수 장 / 相:정승 상)
寧有種乎 (寧:어찌 영 / 有:있을 유 / 種:씨앗 종 / 乎:의문격어조사 호)
진승은 이미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던 진나라로부터 등을 돌린 여러 영주들을 쉽게 규합하여 국호를 장초(張楚)라고 하며 왕(王)이 되었지만, 반란군은 끊임없는 분열을 거듭하면서 결국 왕위에 오른지 6개월만에 자신의 마부(馬夫)였던 장가라는 사람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이렇게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반란 지도자 진승 또한 로마의 스파르타쿠스와 고려의 만적이 몇 백년 후에 그랬듯이 무참하게 실패하고 말았지만 진나라 말 혼란의 시기에 그가 지핀 한 점의 작은 불꽃은 이후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천하쟁패(天下爭覇)의 도화선(導火線)이 되었고, 후에 천하를 재통일하여 한(漢)나라를 건국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그의 묘를 크게 짓고 제사까지 모셨다고 하며, 사마천은 <진섭세가(陣涉世家)>라 하여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 지도자를 개인의 업적을 주로 논하는 ‘열전(列傳)’이 아닌 ‘세가(世家)’에 수록함으로써 진승을 제후(諸侯)의 반열(班列)에 올려놓는 독특한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로마의 스파르타쿠스가 봉기(蜂起)한 목적은 로마정권의 전복(顚覆)이 아니었다. 그 시대 가장 억압받던 계급인 노예, 특히나 목숨을 담보로 지배자들의 노리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검투사 노예들의 해방이 그 반란의 목적이었다. 고려 중기 만적의 난 또한 하극상(下剋上)의 풍토가 만연했던 무신정권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관변(官邊) 역사가들의 매도(罵倒)에도 불구하고,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사회체제(社會體制)로 인하여 무고하게 핍박(逼迫)을 받아야 했던 피지배층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중세 고려사회에 지폈던 것이다. 가혹한 지배와 억압을 받아야 했던 이들이 바라던 새로운 세상은 바로 ‘평등(平等)’의 세상에 다름 아니었다. 스파르타쿠스와 만적보다도 몇백년 전에 반란을 꾀하던 진승(陳勝)이 외친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는 지금 모든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접받는 ‘평등한 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示唆占)을 던져준다.
(2003년 7월)
- 고사성어 발췌 :
1. [史記], <世家>, 司馬遷 著, 김진연 編譯, <서해문집>, 2002.
2. [史記 世家], 司馬遷 著, 김원중 編譯, <민음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