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송곳(錐)’들은 어느 ‘주머니(囊)’에 있는가
우리의 ‘송곳(錐)’들은 어느 ‘주머니(囊)’에 있는가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史記列傳)>을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1)
: ‘평원군전’(平原君傳), 낭중지추(囊中之錐)와 모수자천(毛遂自薦)의 논리(論理)
“현명한 사람은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송곳 끝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듯 금방 세상에 알려지는 법이오…”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십사 청하는 것입니다…”
무릇 현명한 사람은 애써 드러내놓지 않아도 세상이 알아준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저 옛날 중국의 후한(後漢) 말기(末期)에 제갈량 공명(諸葛亮 孔明)은 양양(襄陽)의 시골에 숨어 지냈지만, 당대의 영웅이 될 유비 현덕(劉備 玄德) 같은 인사가 스스로 세 번이나 찾아온 유명한 사례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이는 오랜 시간 동안 유가사상(儒家思想)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영향을 미쳐온 동양에서 지배자들이 피억압자들의 미덕으로 강조해 왔던 왜곡된 겸손의 표현에 불과하다. 학습을 하던 소싯적에 자잘한 공부 따위에 연연하지 않던 제갈량은, 물론 이후 삼국시대의 쟁패를 통해 중국 역사에 길이 남겨지게 되는 뛰어난 책사(策士)이긴 하다, 하지만 중원 땅 어디에도 자리를 잡지 못하던 유비가 선비 사마휘(司馬徽)로부터 천거(薦擧)를 받고 제갈량의 초가집으로 세 번이나 찾아갔다고 하는 그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어려서부터 잘난 체 하기 좋아하던 제갈량이 유비가 죽은 후 제위를 이어받은 유선(劉禪)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에서 유래하므로 그 스스로 발설한 이야기에 불과할 뿐, 객관적인 정사(正史)로서의 신빙성은 별로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보다 훨씬 앞선 기원전의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대륙은 서쪽 변방의 강대국 진(秦)나라와 동쪽의 조(趙), 위(魏), 한(韓), 초(楚), 연(燕), 제(齊)의 6국의 대치 상황이었다. 진나라의 재상 장의(張儀)에 의해 유세되었던 연횡책(聯橫策)에 대항하여 약소 6국은 같은 시기 연합국 재상 소진(蘇秦)에 의해 주장되던 합종책(合從策)으로 수십 년을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로 진나라의 국력이 강대해지며 6국의 존망을 위협하던 시기, 조나라에는 전국시대 4공자(四公子) 중 하나인 평원군(平原君)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본명은 조승(趙勝)으로 조나라 왕족이며 인재를 중시하여 3,000여명의 식객을 거느리던 재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주(周)나라 시절부터 문화의 중심지였던 조나라 수도 한단(한鄲)이 강대국 진나라에 의해 포위되자 평원군은 남방의 초나라와의 합종을 통한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그 곳으로 떠나기 전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20명의 수행단을 꾸리게 된다. 하지만 열아홉 명의 수행인은 쉽게 모였으나 한 명이 모자라던 차에 식객 중 한 사람이 어느 날 평원군을 찾아온다. 그가 바로 모수(毛遂)라는 사람으로서 평원군의 집에 식객으로 들어온 지 3년 정도 되었으나 평원군에게는 처음보는 듯 한 사람이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일이라 평원군은 이 낯선 식객에게 정색을 한다.
“현명한 사람은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송곳 끝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듯 금방 세상에 알려지는 법이오. 당신은 내 집에 3년이나 계셨지만 나는 다른 선비들이 당신을 칭찬하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소. 그것은 곧 당신에게 별다른 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되오. 그러니 이번에는 같이 갈 수가 없소. 집에 머물면서 다음 기회를 봅시다.”
이에 대한 모수의 답변.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십사 청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부터 주머니 속에 있었더라면 송곳 자루까지 주머니를 뚫고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까짓 송곳 끝이 문제이겠습니까?”
위와 같은 평원군과 모수의 대화에서 다음의 두 고사성어가 유래한다.
囊中之錐 (囊:주머니 낭 / 中:가운데 중 / 之:어조사 지 / 錐:송곳 추)
毛遂自薦 (毛遂:인명,고유명사 / 自:스스로 자 / 薦:천거할 천)
즉 ‘현명한 사람’의 존재방식에 대한 평원군의 생각으로서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과 스스로 나라의 위기 앞에서 납작 엎드린 채 끝내 ‘와룡(臥龍)’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었던 유세객의 ‘毛遂自薦’의 탄생이다. 평원군으로부터 마지못해 발탁되어 초나라로 함께 수행했던 모수는 처음에는 다른 수행원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해야 했지만 수행길 내내 이어지던 토론과정에서 그 뛰어남과 지혜로움이 점차로 드러나게 되었으며, 결국 평원군이 제시한 합종에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주저하고 있던 초나라 왕을 세치 혀로 설득하여 혈맹(血盟)을 맺는데 큰 활약을 하게 된다.
진정 현명한 사람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이라 불리던 제갈량은 젊은 나이에 학문에 정진하던 동료 문하생들을 비웃으며 온갖 잘난 척을 하고, 자신을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비유하면서 초가집에 ‘짱박혔’지만 서서(徐庶)와 같은 몇 명의 친구들 외에 그를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사마휘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이 천재는 당시의 탁월한 외교책(外交策)인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세상에 펼칠 수 없었을 것이며, 더군다나 천하통일(天下統一)이라는 과업에 실천적으로 도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에 모수는 우리에게 좀더 현실적인 해답을 보여준다.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은 당연히 그 주머니를 뚫고 제 뽀족한 끝을 드러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송곳이 주머니 속에 들어있어야 한다는 ‘변증법적 논리(辨證法的 論理)’의 설파를 통해.
마찬가지로 아무리 뛰어난 지혜라도 생각에만 머물러서는 그 빛을 발할 수 없다. 비로소 세상 속에서 그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를 띄어야만 더욱 빛나게 되는 것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듯, 송곳이 주머니를 뚫기 전에 주머니 속에 있어야 하듯.
과연 우리 개개인의 평범하지만 빛나는 ‘송곳’들은 지금 어느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가.
(2003년 7월)
- 고사성어 발췌 :
1. [史記], ‘列傳’, 司馬遷 著, 김진연 編譯, <서해문집>, 2002.
2. [史記 列傳], 司馬遷 著, 김원중 編譯, <민음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