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믿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史記列傳)>을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3)
: ‘소진열전(蘇秦列傳)’, 뒤집어 자문(自問)해 보는 미생지신(尾生之信)의 의미(意味)
“모든 가치는 뒤집을 수 없는 것일까…”
“그대들이 이상적인 것을 보는 곳에서 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본다”
- F. W. Nietsche,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78.
우리나라 고대설화에는 망부석(望夫石)이라는 것이 있다. 신라의 19대 눌지왕 때 왜국(倭國)에 인질로 잡혀간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죽임을 당한 박제상(朴堤上)이라는 충신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일본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남편에 대한 여인의 지조(志操) 따위를 강조하며 이 땅 여인들의 삶의 태도를 알게 모르게 옥죄어 온 가부장적(家父長的) 이데올로기의 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 신의의 중요함 또한 우리에게 시사해주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 너무도 인간적인 이 덕목들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70편 ‘열전(列傳)’의 주무대가 되는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다시 돌아가 보면 이와 관련한 고사(故事)가 ‘소진열전(蘇秦列傳)’에 잠깐 소개되고 있다. 소진(蘇秦)은 낙양(洛陽) 사람으로 일찍이 제(齊)나라로 건너가 귀곡(鬼谷) 선생으로부터 유세술(遊說術)을 배웠다. 귀곡 선생은 한참 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뛰어난 책사(策士)인 장량(張良)의 젊은시절, 강태공(姜太公)의 병법서를 전달해 준 미스터리의 노인이라는 설도 있는데 어쨌든 그의 문하에서 소진은 이후 자신의 라이벌이 되는 ‘연횡책(聯橫策)’의 대가 장의(張儀)와 동문수학을 한다. 유세가(遊說家)를 크게 신임하지 않던 당시의 분위기 탓에 장의도 한참동안을 그랬지만 소진 또한 초반에는 룸펜의 생활을 했는데, 그러던 중 역시 강태공의 책 <음부경(陰符經)>을 통독하여 독심술(讀心術)-췌마술(揣摩術)이라고도 한다-을 익혀 진(秦)나라 왕을 찾아가지만 천하통일의 계책이 거부당하고, 조(趙)나라에서도 박대를 당한다. 결국 동쪽 변방의 약소국 연(燕)나라를 찾아간 소진은 가까운 약소국들끼리 연합하여 강대국 진나라에 대응하자는 유명한 ‘합종책(合從策)’을 제시하여 전격적으로 기용되었고, 진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을 돌며 ‘닭의 머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가 되지 말라’는 ‘계구우후(鷄口牛後)’의 논리를 통해 6국의 재상으로서 ‘합종’을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간책(奸策)만을 일삼는 합종책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제 잇속 챙기는 데 더 관심이 많은 각 나라들의 외교적 습성상 연횡책을 이길 수 없었다. 마치 유럽의 각국이 경제적으로 통합이 되었음에도 강대국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제 잇속 챙기느라 미국의 패권(覇權)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세태처럼 말이다. 어쨌든 그러던 중 연나라와 합종을 맺은 제나라가 강대국 진나라와 연횡하여 연나라의 10개 성을 빼앗는 일이 발생하였고 6국의 재상 소진은 부랴부랴 간책을 써서 제나라로부터 빼앗긴 성을 반환하도록 하지만 믿음이 가지 않는 간교한 언행을 일삼는다고 하여 각국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신의를 잃은 유세가의 처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연나라 왕과 마주한 소진은 효자로 소문난 춘추시대(春秋時代) 대학자 증삼(曾參) 같은 사람은 단 하루도 부모 곁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없고, 백이(伯夷)와 같이 청렴한 사람은 음흉한 외교에 능숙하지 않으므로 마땅하지 않으며, 신실한 마음을 지닌 미생(尾生) 같은 사람 또한 사나운 제나라 군대에 맞설 수 없으므로 적합치 않다고 주장한다. 그런 연유로 전쟁으로 극도의 혼란을 겪는 당시로서는 자신과 같은 유세가가 가장 적합하다는 이야기인데, 연나라 왕은 이 말에 소진을 다시 기용할 수 밖에 없었다.
연나라 왕에게 당시의 정세를 분석해 주며 다시금 신임을 얻은 소진의 일화를 통해 다음의 고사성어가 유래한다.
尾生之信 (尾生:인명,고유명사 / 之:어조사 지 / 信:믿음 신)
즉, 융통성이 없이 고지식한 사람의 믿음을 일컫는 말인데, 다리밑에서 애인과 만나기로 약속한 미생(尾生)이라는 남자가 여인을 기다리는 동안에 홍수가 났음에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다가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이와 비슷한 고사가 또 있다.
宋襄之仁 (宋:나라이름 송 / 襄:인명,고유명사 / 之:어조사 지 / 仁:어질 인)
‘송나라 양공의 어짊’, 자신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조건 높은 뜻만을 주장하는 모습을 가리키는데 이 고사는 남송(南宋) 말에서 원(元)나라 초의 역사가 증선지(曾先之)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로부터 이후 역사를 다룬 각각의 17개 정사(正史)와 송(宋)대의 ‘자치통감(自治通鑑)’류의 저서들을 첨가한 18가지 사료들을 통해 태고적으로부터 송나라 말기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종합한 <십팔사략(十八史略)>, 또는 원명(原名) <고금역대 십팔사략(古今歷代 十八史略)>에 나오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송나라 양공(襄公)의 이야기다.
기원전 650년 송나라 환공(桓公)이 세상을 떠난 후 양공은 배다른 형인 목이(目夷)를 재상으로 삼아 춘추오패(春秋五覇) 최초의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桓公) 사후 왕자들 사이에 권력다툼으로 어지럽던 제나라를 치고, 초(楚)나라까지 위협하여 세 나라의 맹주(盟主)가 되나, 주변 소국 정(鄭)나라가 허락없이 초나라와 통교하였다 하여 정나라까지 침범하려 하였다. 이에 초나라가 대군을 파병하니 하남성 홍수(泓水)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양공은 초나라의 대군이 강을 다 건넌 후에도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소국(小國)끼리 잦은 패권을 다투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하던 재상 목이가 ‘적은 수의 병력으로는 대군이 전열을 정비하기 전에 공격을 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하자, ‘군자는 결코 남의 약점을 노리지 않는다’고 고집하며 초나라 대군이 전열을 정비한 후 정면대결을 하다가 대패하고 허벅지 부상까지 입어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야기이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이나 송양지인(宋襄之仁) 모두 믿음과 신의(信義), 맹목적인 인의(仁義)를 경계하고 있는 고사로서 자신이 처한 정세(政勢)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면 결국 파멸한다는 교훈을 주고자 하는 듯 하다. 물론 홍수가 난 상황에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밑을 지키는 것은 여인이 약속을 지킬 수 없게끔 했던 객관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처사이며,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전쟁중임에도 적(敵)에게 ‘준비됐나요?’ 물어보고 싸움을 시작하는 것은 병법을 모르는 자의 무지한 행동으로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고사들이 나온 시대적 배경은 온통 선혈만이 낭자하던 전국시대, 간교한 책략만이 살아남는 비정한 시대였다. 믿음에 대한 맹목성을 비난하기 전에 잠깐 뒤집어서 자문해 보자.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지극히 인간적이어야 하는 믿음이란, 신의란 어떠해야 하는가. 정녕 우리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서로를 적(敵)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전쟁의 시대인가.
(2003년 7월)
- 고사성어 발췌 :
1. [史記], '列傳’, 司馬遷 著, 김진연 編譯, <서해문집>, 2002.
2. [史記 列傳], 司馬遷 著, 김원중 譯, <민음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