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혁명'은 '안단테'로.
다시, '혁명'은 '안단테'로.
- [혁명노트], 김규항, <알마>, 2020.
"연민은 자선을 낳고 분노는 싸움을 낳으며 다시 그 둘은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자선도 싸움도 별 소용이 없다는 깨우침을 통해 '과학적 사회주의'가 된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는 '정서가 생략된 과학'의 문제이기도 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인간의 존엄과 지성에 대한 모욕이며, 오늘 인류가 미래를 희망하는 일이란 바로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다... 대체 우리가 새로운 사회주의를 처음 시작할 자격을 갖지 않아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가. 과거의 실패가 짐스럽다면 사회주의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임을 잊지 말고 느리게 '안단테'로 가면 된다. '안단테'라면. 우리가 혁명을 회피할 이유는 정말 적어진다. 안 그런가."
- 김규항, [B급 좌파], <혁명은 안단테로>, 1999.
사회문화비평가이자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씨네21]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아 [B급 좌파]로 엮은 바 있다.
'386' 세대로 불렸던 지식인 엘리트들이 80년대에 군부독재에 저항하면서 '체제 변혁'을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열성적으로 수입하고 소개하다가 동구권 공산주의 진영의 몰락을 맞아 '사회주의' 자체의 문제로 규정하고 일제히 청산한 행태는 그의 주된 비판의 대상이다. 아마도 그 엘리트들은 스스로를 'A급 좌파'라 생각했겠지만, 김규항이 보기에는 "앙상한 사회주의자들"에 불과했다.
이론으로만 향유했을 뿐, 다수 노동인민대중의 '정서'를 재료로 하지 못했던 'A급'보다는 다수대중의 'B급'이 훨씬 혁명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역사는 무수히 많다.
"정서가 생략된 과학"으로서 "연민과 분노가 사라진 이론과 사상"은 결국 다수 인민에게 "무섭고 살벌한 얼굴로 다가가곤" 했는데, 이러한 'A급'들과 '스탈린주의'는 쌍둥이였다.
"변화는 '질문의 재개'로 시작한다. 예컨대 다들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를 맞아...'라 말할 때,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인간이 그것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질문이다. 다들 '인간의 노동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를 맞아...'라고 말할 때 '모든 인간은 노동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줄어야 할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시간이 아닌가?' 질문이다... 또한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의 재개'다. '물신세계'에서 인간은 모든 '첫 질문'을 잊는다... '첫 질문의 재개'를 통해 개인은 시스템 속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 김규항, [혁명노트], <113>, 2020.
거의 이십 년 정도 지나 'B급 좌파' 김규항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시 연구한 후 돌아왔다. 그 동안은 아마도 '사회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로 전향하여 대중들에게 훈계질하던 '386'에서 어느덧 '486', '586'으로 이론적으로는 '진화'를 표방하나, 인간적으로 '퇴화'한 지식인 엘리트들과 지속적으로 투쟁해 왔을 것이다. 이제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자본주의 최종적 형태"([혁명노트], <28>)의 공고함이 질곡에 빠진 2000년대 후반부터 아마도 1914년의 위기 상황에서 레닌이 '헤겔 철학'을 그 근본부터 연구하고 '철학노트'를 작성했듯이, 김규항은 마르크스 [자본론]을 더 철저히 파고들어 2020년에 [혁명노트]를 작성한 듯 하다.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에 의한 '안단테적 혁명'은 이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이행되는 과정이다.
"'혁명'은 현재 사회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로만 이해되어왔다. 그렇게 건설된 건 고작 새로운 정부이거나 새로운 지배 시스템이다. 혁명은 건설이자 '이행'이다. 투쟁하는 자유인은 미래에 속한 사람이며 또한 새로운 사회의 담지자다. 투쟁하는 자유인의 삶과 생활양식에 선취된 새로운 사회의 조각들이 현재 사회에 균열을 만들며 새로운 사회로 이행해간다. 누군가 새로운 사회가 정말 가능한가 물을 때, 투쟁하는 자유인은 먼저 묻는다. '내 안에 새로운 사회가 있는가?'"
- 김규항, [혁명노트], <119>, 2020.
비인간적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세상'은 단 번에 오지 않는다. '투쟁하는 자유인'은 더 이상의 '노예'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스파르타쿠스처럼 주체적인 '자기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며, 현재 시스템에서 볼 수 없는 '미래의 것'을 조금씩 선취하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 일상을 만들어간다.
'내 안의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혁명'이 없다면, 지배계급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며, 그 어떤 '개혁'도 없다.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계급타협' 또한 '혁명'의 이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혁명노트]는 '혁명' 외에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라는 기본모순은 물론, '인간들간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이라는 물적 관계로 표현'되는 '물신성'을 강조한다. 김규항에게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서 가장 주목할 개념이 바로 '물신성(Fetishism)'이다.
"'물신성'은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을 막론하고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본주의적 환상'이다. '물신성'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원자인 상품에 실재한다. '상품 생산 사회'로서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한 '물신성'은 지속하며, '물산성'이 지속하는 한 자본주의도 지속한다."
- 김규항, [혁명노트], <61>, 2020.
마르크스 [자본론]은 '상품'이라는 '개별성'의 '자기운동'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라는 '보편성'을 보여주는 헤겔식의 변증법적 서술방식에 따라 '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 인간의 '노동(력)' 조차도 '상품'이다. 그리하여 실제 '노동의 (사용)가치'는 은폐되고 '노동력의 교환가치'만이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이로 인해 사회적 '인적 관계' 일체가 '물적 관계'로 대체되는데,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물신성'의 단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계급'을 이미 '인격화된 자본'이라고 정의한 바 있으나, 현대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시대에는 볼 수 없는 현상, 즉 지배계급이 '자본가'가 아니라 '자본' 자체이며, 계급을 망라하여 시스템 내 모든 사람이 '물신성'에 사로잡혀 있다.
'A급 좌파' 조국의 '물신성'을 우리는 최근에 본 바 있다.
결국, '혁명'은 시스템의 전복이나 새로운 정부로의 대체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첫 질문을 재개'하는 '철학'의 복원과 함께 '물신성'을 극복하고 '노예'를 벗어나고자 하는 '투쟁하는 개인'들의 끊임없는 '자기해방'을 통해 선취되는 것이다.
신체제가 인간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이행 과정'에서 각성한 인간들에 의해 구체제가 극복되는 것이다.
'혁명'은 '안단테'로, 투쟁하고 각성하는 개인들의 '연대'다.
"선학(先學)들이 '해답'을 본 곳에서 그(마르크스)는 '문제'만을 보았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본론], <2권 서문>, 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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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혁명노트], 김규항, <알마>, 2020.
2. [B급 좌파], 김규항, <야간비행>, 2001.
3. [자본론](1867), 칼 마르크스,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