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봄이었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설렘은, 넓은 고깃집의 홀에 준비된 무대에 올라서는 순간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이제 막 스물이 되었을 3학년 선배들은 연습이라도 한 듯 온몸 가득 ‘강압적인’ 기운을 내뿜으며, 자기소개를 준비하는 동기들 냉면 그릇에 소주를 한 병씩 따라주고 있었다. 남자 동기들도 힘들게 마시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순서가 다가오는 것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까지 술이란 걸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었으니, 술 취한 상황을 대비할 수 있는 어떠한 준비도 있을 리가 없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어쩌다 보니 고등학교에서 진학한 열한 명의 여자 동기 중, 맨 처음의 자리였다. 환영회에 오기 전부터 이런 식의 행사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 ‘사발식’을 두려움이 가득한 동기들 얼굴이 보였다. 준비한 적이 없던 말이 제멋대로 나와버렸다.
“반 병만, 저만 마시겠습니다.”
가뜩이나 짧은 고등학교 역사에 첫 번째 여학생들이었으니, 선배들도 고민이 있었겠지만, 권위에 도전한 새파란 신입생의 당돌한 제안은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냉면 사발에 소주 반 병이 따라지는 순간은 느린 화면으로 흘러갔고, 채워지는 술을 지켜보며 심장은 쿵쿵 소리를 내었다. 냉면 그릇에 채워진 소주는 가본 적 없는 천지의 물만큼이나 커 보였고,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물러서는 것은 자존심이 허용하지 않던 무모한 열여덟이었다.
"6기 이창희입니다. 선배님들, 반갑습니다!"
두려움을 떨치려면 소리를 지르는 게 제일이다. 식당이 떠나가라 큰소리로 자기소개를 하고, 천지를 한숨에 들이켰다. 응원과 놀람이 섞였던 박수가 들렸지만, 화장실로 뛰어가기 바쁜 발걸음에 환호를 즐길 여유는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만취’의 경험은 반갑지만은 않았고, 환영회의 나머지 시간은 아이들의 부축이 없이는 기숙사까지 올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렇게 빨간 뚜껑의 ‘진로 반 병’은 나의 첫 번째 술이었다. 그날부터 내게 술은 ‘즐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소속감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남자들이 월등하게 많았던 세상에서 그들에게 밀려나지 않기 위해, 나는 과하게, 과시하듯,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당연히 알았지만, 오랫동안 폭음을 해 왔다. 이런 ‘소속 증명’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내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던 생존의 방식이었다. 회사를 들어간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나는 그들에게 소속되기 위해, 그들로부터 밀려나지 않기 위해 ‘술’을 마셨다. 이런 식의 ‘음주’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이것이 술을 즐기는 방식이라고 인정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스스로 ‘술을 즐긴다’고 믿었다. 믿음은 배신당하려고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지만 말이다.
술을 제대로 즐기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마저도 다양한 방식으로 소속감에 대한 증명을 강요받게 되는 세상에 질려버린 다음이었다. 일터가 정해놓은 ‘성공’에서 밀려난 후였다. 여전히 사회는 ‘여자라고 술 안 마시는 건 못 본다’라며 계속 수군거리지만, 나는 이제야 술을 즐기며 제대로! 마신다. 소주를 30년이나 마셨다. 라벨의 두꺼비가 예뻐 보인 것은 채 5년이 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편안한 자리에서만 좋아하는 만큼의 술을 마신다. 맛을 음미해 보기도 하고, 그날의 ‘진짜 이슬’은 어떤 맛인지도 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열여덟의 3월, 고깃집 무대에서부터 쌓여온 ‘해묵은 원한’이 풀린 기분이다.
놀랍게도, 요즘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은 ‘폭탄주’이다. 독재자가 즐겼다는 황제의 술은 아니고, 해묵은 원한을 풀어낸 소주에 폭탄주를 만들기 위해 태어난 듯한 국내 브랜드의 맥주를 섞는다. 비율을 맞춰서 소주와 맥주를 섞은 후, 끝이 둥근 숟가락으로 맥주잔을 힘껏 내리치는 것이 나만의 ‘킥’이다. 과학적으로는 비중이 비슷한 액체 두 개를 섞은 것이라, 따로 잘 저어줘야 할 이유는 없지만, 숟가락의 강한 충격은 맥주잔 전체를 순간적으로 울게 하고 곧바로 맥주는 깊이 숨어있던 거품을 가득 끌어올린다. 두 개의 액체가 순식간에 섞이고, 거품으로 샤워를 하고 난 폭탄주는 아이리시 흑맥주의 부드러움이 부럽지 않다. 다만, 잔을 너무 세게 내리쳐서도 안 되고, 아무리 맛이 있어도 두 잔에서 품위 있게 멈춰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술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느낀다. ‘술’에게 억지로 덧씌웠던 남성성에 대한 과시나 위계에 의한 강압을 고스란히 덜어내고 났더니, 홍수가 끝난 세상에서 노아가 만들었다는 와인에서 비롯한 그대로,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유혹했던 매력적인 모습만 남았다. 이제 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취향과 선택의 대상으로만, 나를 대한다. 영화 <소공녀>의 미소처럼 싱글몰트 위스키를 즐기는 여성도 어색하지 않고, 술이 빠진 채 커피와 수다로만 시간을 보내는 남성들의 모습도 이제는 자연스럽다. 스무 살의 내가 놓쳤던 ‘술을 제대로 즐기는 자유’가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세상의 규칙대로 살겠다 우겼다면, 술이란 게 ‘마시고 죽어야’ 하는 이상한 존재가 되어, 나는 여전히 빨간 뚜껑의 두꺼비랑 싸우고 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자연스럽게 사는 것은, 나에게나 술에게나 얼마나 멋진 일인가? 30년 세월을 힘겹게 돌아온 것은 아쉽지만, 열여덟 살의 원한이 갈라놓았던 두꺼비랑 화해한, 지금의 내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