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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Oct 22. 2021

평생 레시피를 모르고 싶은 음식/백지혜

다시 겨울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는지 모르겠다. 세 아이 중에 유독 둘째의 입덧이 심했다.

남들만큼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음식을 맛있게 먹기도 힘들었다. 평생을 먹는 것에 별 흥미 없이 살았다. 모르는 음식과 안 먹어본 음식은 쉽게 도전하기도 어려웠다. 엄마는 이런 나를 키워내는 동안 얼마나 답답하고 애가 탔을까.

잘 먹기만 해줘도 최고의 효도인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둘째는 아들이다. 과일만 주야장천 먹었던 첫째와는 다르다. 고기가 많이 당겼고, 그럴 때마다 남편은 몇 점 안 되는 소고기를 대령했다. 말로는 아들 딸 절대 차별하지 말자고 했지만, 훗날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 줄 든든한 아들이 생긴다는 생각에 약간은 들떠있는 듯했다.

유독 힘들었던 음식은 다름 아닌 ‘쌀밥’이었다. 첫째가 아직 기저귀를 떼지 못한 두 살배기여서 밥심으로 일상을 견뎌야 함에도 밥을 입에 대지 못하니 그저 죽을 맛이었다. 그럴 땐 삶은 옥수수나 고구마, 아니면 빵 조각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나마 들어갈 수 있는 음식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여왕 대접을 받던 첫째 임신 때와 가장 달랐던 건, 육아와 살림에서 벗어날 수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배가 고플 땐 자주 서러웠다.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시어머니와 식은 밥 한 그릇을 놓고 신경전을 벌일 정도였다.

힘없이 주저앉아 쉬고 있던 어느 날, 친정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뭐 좀 먹었어?”


 “아니, 별로 생각이 없네.”


“엄마가 배를 곯으면 안 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그 어떤 누군가도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봐 왔던 적이 없던 최근이었다. 남편은 첫째 딸 재롱과 육아에 몰입하느라 날 챙길 겨를이 없었고, 늘 아들이 우선인 시어머니도 딱히 날 보살피지 않으셨다. 둘째 임신부터는 내가 나를 챙겨야 했다. 구세주 같은 엄마의 연락 한 통에 모든 상념을 접은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여보, 나 친정에 좀 다녀올게.”


“응? 갑자기?”


“엄마가 맛있는 거 해주겠데.”


“얼마나 있다 오려고?”


“살 좀 찌워서 돌아올게. 시운이 단도리 잘하고 있어.”


첫째 때는 몸무게가 15kg 넘게 늘었는데, 둘째 땐 6kg 늘어난 게 고작이었으니….

안 그래도 얼굴이 핼쑥해서 딱해하던 남편이었다. 고민 하나 없이 정한 결정, 통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말하는 내게 남편은 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입을 앙 다물고 있는 날 보면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아, 말릴 수 없겠구나’하는 지점을 다행히도 남편은 잘 알고 있었다.

1시간 3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기분 좋게 달려간 친정은 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말없이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타난 딸을 본 엄마 아빠는 놀랄 새도 없이 짐을 받고 보일러를 켰다.


“얘기하고 오지 그랬어. 집에 뭐가 없는데...”


엄마 아빠가 있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할까. 발을 동동 구르며 냉장고를 뒤적이던 엄마는 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습관처럼 물었다.


“엄마, 그거 있잖아. 그거.”


“응, 뭐? 뭐가 먹고 싶어? 먹고 싶은 게 생겼어?”


“그거 있잖아. 그거. 아... 뭐지? 김치 넣고 떡국 떡 넣고 콩나물 넣고 끓인 거.”


“밥 국?!”


“어! 맞다 그거!”


우리 집, 그러니까 엄마 아빠 집에 살 때 한 번씩 먹던 엄마 표 김치 국밥. 나는 아무리 봐도 국밥 같은데, 엄마 아빠는 자꾸 ‘밥 국’이라고 말해서 이상했던 그거. 국밥치곤 국물이 많지 않아서인가? 김치랑 콩나물이 아삭한 식감을 잃기 직전에 쫄깃한 떡국 떡과 걸쭉한 국물을 함께 먹는 것이 포인트였던 그거. 밥알이 퍼져서 죽 같기도 한데, 죽이라고 하기엔 김치 조각이 적당히 크고, 묵은 김치의 시큼한 맛이 제일 좋았던 그거. 내겐 엄마 품만큼이나 익숙한 그 ‘밥 국’.

잠옷 차림으로 주방에서 뚝딱뚝딱 밥 국을 끓이는 엄마의 뒷모습이 좋아서 편한 소파를 두고 식탁 의자에 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이 세상 모든 딸이 알고 있는 진리, ‘친정은 천국입니다’가 가슴팍에 와서 꽂히는 순간이었다.

연기가 폴폴. 국그릇이 아니라 대접 그릇에 가득 내어오는 울 엄마. 뜨끈하고 얼큰한 게 입덧이 뭐였는지 까먹을 정도로 술술 잘도 넘어갔다.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는 내게 엄마가 물었다.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줘?”


“아니.”


“왜? 맛이 없어?”


“아니. 먹고 싶을 때마다 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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