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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Jul 21. 2021

책을 먹고 자랐다

"무슨 책 찾고 싶어? 내가 타자 쳐줄게. 비켜 봐."


'ㅁ.ㅣ.ㄷ.←.ㄴ.ㅅ.ㅗ.ㄱ'


독수리 타법으로 읽고 싶은 책 이름을 타자와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더듬더듬 찍고 있었다. 책을 찾기 위해 내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남자 아이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아니, 괜찮은데' 말할 틈도 없이 난 남자 아이에게 밀려났다.


"야, 책 제목이 뭔데. 그렇게 타자 쳐서 언제 찾냐?"

성미 급한 남자아이는 빠르게 손가락을 놀리며 타자 실력을 뽐냈고, 난 독수리타법을 뽐냈던 내 검지 손가락을 접어야 했다.

1998년 초등학교 5학년. 우리 동네에 도서관이 생겼다. 도서관 앞 커다란 비석에는 '칠암'이라는 호를 쓴 아저씨가 기부해서 지어졌다고 새겨져 있었다. 도서관 이름은 ‘칠암도서관’이라 불렸다. 토요일이면 동생 손을 잡고 도서관을 갔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삼방시장과 5층 높이의 아파트를 지났다. 베란다가 밤색 새시였던 오랜 아파트를 볼 때마다 닭장이 자꾸 떠올랐다.

그때 난 열 권짜리 세계 민속동화에 빠졌다. 나는 매주 한 권씩 빌려 책을 다 읽는 성취감에 젖어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좋은 책은 책의 인상이 그려지기 마련인데, 지금껏 그때 읽은 책의 인상이 떠오르지 않는 거 보면 나는 그냥 책 뒤표지를 닫는 기쁨만 누렸나 보다.


'집에서 노니 뭐라도 해서 돈 벌어야지.'

엄마는 늘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일곱 살 때는 거리에서 여름에는 팥빙수를, 겨울에는 붕어빵을 팔았다. 마늘 포대, 케이크 초와 은박지. 부업의 재료만 바뀌었을 뿐 집에서 엄마는 늘 벽에 등을 기대, 손으로 무언가 하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나는 고사리손으로 스크류바처럼 생긴 케이크 초 밑을 은박지로 돌돌 말고, 마늘 껍질을 깠다. 나는 마늘을 까던 엄마랑 손을 얼른 잡고 같이 놀고 싶었다.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열 살을 안고 울었다.

"은행에서 강도질을 하지 않는 이상, 당장 돈 2천만 원을 어떻게 구하니."

열 살은 2천만 원이 새우깡과 빼빼로를 몇 봉지나 살 수 있는 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라는 걸 엄마의 눈물을 보고 짐작했다. 이십여 년이 흘렀지만 서럽게 울던 엄마 얼굴과 그날의 명도가 선명하다.

이모가 집주인으로 있던 김해 삼방동 3층 건물 빌라의 2층으로 이사 왔다. 집은 좁은 두 칸짜리 방이 있던 공간에서 침대도 있고, 집 안에 화장실도 욕실도 있는 너른 공간으로 바뀌었다.

김해로 이사 온 뒤 집 안 풍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신발장 옆에는 늘 어디 공장에서 쓰일 검정 부품이 쌓여있었다. 엄마는 검은 부품 조각이 하나에 2 원이라고 했다.

중학생이 되고 얼마 안 되어 엄마는 우리 집 빌라 1층에 있는 책 대여점을 인수했다. 바퀴가 달린 책장 뒤에는 또 책장이 있었다. 소설, 무협지, 만화책이 가득했다.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기 시작하면 나는 방과 후 책방에 먼저 들렸다.


'오늘 신간은 뭐가 들어왔나.'


신간 코너에는 오후 12시 책 납품하는 아저씨가 주고 간 새 책이 빳빳한 비닐로 표지가 쌓인 채 꽂혀있었다. 앞으로 많은 사람 손을 거쳐 갈 책 표지가 찢어지지 않았음 하는 엄마 마음이 책을 감싸고 있었다. 나오길 기다렸던 신간은 그 자리에서 10분 만에 다 읽은 뒤 다시 꽂아뒀다.


"엄마, 나 이 책 들고 가게~"


만화책 10권을 가득 안고 빌라 2층 내 방으로 향했다. '요시츠네 차나왕', '열혈강호', ‘허쉬', '나는 사슴이다', '괴짜 가족', '오디션', '홍차 왕자', '아기와 나' 등등 로맨스, 무협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책장은 술술 넘어갔다. 만화책 10권은 읽는데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매일 만화책을 읽다 지겨우면 주말에는 도서관을 향했다. 중학교 3년 내내 나는 책 속에서 헤엄쳤다. 책 속 주인공이 연애를 하면 심장이 주인공과 같이 뛰었고, 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하면 책을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간직하고 싶은 만화책 속 컷을 복사기로 복사했다. 난 만화책 속 주인공을 보며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그 시간을 잡고 싶었나 보다.

감히 나의 학창 시절을 책 주인공들과 울고 웃으며 컸다고 포장해도 되려나.


"요즘 책 읽는 애들이 어디 있어요. 휴대폰 동영상 보지!"

지역아동센터에 글쓰기 수업 전 선생님과 회의를 했다. 그곳에서 만난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말했다. 내 질문은 "일주일에 책 몇 권 읽니?"였다. 애초 ‘한 권은 읽어요’라는 답변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아이의 말에 입이 썼다.

'함께 책 읽고 글쓰기가 즐거워지면, 책을 읽으려나?'

적어도 지루한 글쓰기 수업은 피해 보자 마음먹고 아이들과 만날 시간을 촘촘히 짜 본다.


 안, 아이들 주방 놀이 가구 위 인터넷서점에서 산 책,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켜켜이 쌓여있다. 아마 저 책 중 절반은 시간이 없어 다 읽지도 못하거나, 재미없어서 닫아 둘 거다.

'책 반납 안내' 문자가 오면 그제야 나는 '아 저거 다 읽지도 못 했는데' 하고 후회하겠지.

그러고 도서관을 가면 가방 가득 책을 담는다. 아가들이랑 읽을 동화책, 내가 읽을 그림책, 재미있어 보이는 에세이, 시집 등등. 절반은 읽힐 거고, 절반은 표지도 펴지 못한 채 책 반납대 위로 올라갈 거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아이들이 티브이를 볼 때, 일하다 쉬면서 10분이고 30분, 짬짬이 틈새 독서를 한다. 자꾸만 눈길 가는 문장은 공책에 연필로 적으며 손으로 한 번 더 마음에 새긴다.

쌓인 책을 바라보던 마음이 이 글을 써 내려가게 했다. 다시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러 간다. 나를 키워줬고, 나를 키워주는 책의 영양분을 야금야금 먹으러 마음을 키우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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