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조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예린 Aug 14. 2021

미리 쓰는 이별 일기

'그냥 계약할까?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집도 아니고, 선택권도 없고, 계약 안 하기에는 매매 가격이 자꾸 오르고.'


지난해  아파트 전세, 매매 가격 그래프 끝은 자꾸만 위로 향했다. 그래프를 보던 내 마음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전세 계약 만료를 앞두고 공인중개사와 두세 군데 집을 보러 다녔지만, 집들이 영 마뜩잖았다.


"당분간 매물은 없을 거예요. 잘 생각하시고 연락 주세요."


공인중개사의 말은 내 눈앞에 놓인 초콜릿을 먹고 싶지 않지만, 당장 누군가에 빼앗기기 싫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석 달 전부터 매매로 내놓은 집을 보러 오겠다는 사람은 없었고, 달력이 넘어갈수록 아파트 가격은 올라갔다.


"여보, 내년까지 기다려보자. 이사가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깐 지켜보다가 기회가 오겠지."


신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안한 마음은 내 안에 머물렀다. 신랑과 새롭게 지은 아파트 단지를 돌아보다, 고개를 빳빳이 세워 아파트 맨 꼭대기를 한참 쳐다봤다.


'이 많은 아파트 중에 내 집 하나 없다고?'


불안감, 부러움. 시간이 지나자 마음은 두 갈래로 나눴다.


"너희 주공 아파트 살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만 좋으면 되지?!"

나도 모르게 '주공' 이란 단어는 누군가에게는 멸시와 무시의 단어가 됐다. 그들의 시선과 상관없이 나는 이곳이 좋았다.

20대의 끝자락과 30대 초입 두 사람이 통장에 있는 돈으로 능력만큼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이었다.


단출했던 신혼살림에 아이가 태어나면서 살림도 늘어갔다.

소파와 티브이 밖에 없던 거실은 절반 이상 장난감이 자치했다.

침대에 걸쳐 앉아 떠지지 않는 눈으로 모유 수유했고, 새벽마다 앉았던 침대 가장자리는 푹 내려앉았다. 반질반질했던 소라색 소파는 아이들 손때로 누렇게 변했다.

거실과 아이 방 천장 등에는 폴리와 공룡 스티커가 밤마다 야광 불빛을 내뿜으며 아이를 지켜줬다.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보며 해의 기운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집 앞 공원 우거진 나무들은 계절마다 옷을 바꾸며 저마다의 모습으로 늘 공원을 지켰다. 박새, 직박구리, 붉은 머리 오목눈이의 지저귐으로 아침이 깨어났다.

봄에는 벚나무, 매화나무, 영산홍과 철쭉, 여름에는 라일락,장미, 접시꽃과 자귀나무, 배롱나무, 비비추와 맥문동, 가을에는 단풍나무와 메콰세콰이어, 겨울에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소나무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를 스쳐 갔다. 아파트 정문 입구 양쪽 길로 눈처럼 벚꽃 잎이 날릴 때면 어김없이 신랑 손을 잡고 그 아래 서 있었다. 한 해 차이로 태어난 두 아이는 신랑과 내가 손을 잡고 벚꽃을 감상했던 그 자리에서 생애 첫 봄을 마주했다.


"엄마 이 꽃 이름은 뭐야?"


여름, 비비추 정원을 지나던 아이는 유모차에서, 더 커서는 내 손을 잡고 보랏빛 비비추를 이리저리 살폈다. 비비추 정원 옆 벚나무를 오가던 직박구리를 향해 설익은 말투로 아이가 외쳤다.


"안녕 짹짹아, 나 오니야", "나눈 유니야."


번호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적립 번호를 눌러주는 마트 계산원 이모, 아이들 손에 초코파이 하나씩 쥐여주던 반찬 가게 사장님, 아이들 장난감과 옷을 챙겨주던 동네 언니들, 오니에게 이별을 처음으로 알려줬던 어린이집 선생님. 그런 사람 속에 있었고 그들의 정감 어린 말과 마음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줬다.


5년 동안 나의 직함을 여러 번 바뀌었다. 기자, 경력중단여성, 프리랜서 작가, 1인 사업자. 그 시간 동안 싱크대 앞 식탁 위 노트북을 놓고 수많은 기사와 계획서, 에세이, 동화를 써내며 활자 속에 묻혀있었다.


아이들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생각해, 한 달 전 다시 이 집을 공인중개소에 내놨다. 지난해 석 달이 넘도록 소식 없던 공인중개사로부터 이번에는 내놓은 지 이틀 만에 연락이 왔다. 매매 계약이 됐다.

집을 내놓고 계약까지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여보, 참 그렇다. 다 때가 있나 봐.

작년에는 집 보고 싶다는 연락조차 없었는데 그렇지?"

"그러게 말이야."


꼬인 실타래가 풀리듯 훌훌 풀린 일 덕에 마음도 이내 가벼워졌다.

달도 별도 잠드는 밤, 거실 조명 대신 밝은 달빛이 어둠을 밝혔다.


"엄마 보름달이 떴어, 우와!"

"아빠, 저기 달 엄청 커 봤어?"

"하오니 유니랑 같이 달 보니깐 엄마가 정말 행복하네."


보름달에 환호하는 아이들 미소에 같이 웃었다.

이제 말문이 트기 시작한 25개월 둘째가 앉아 조잘댄다.


"엄마 내가 재밌눈 이야기 해주께.옛날 옛날 숲 속에 토끼 한 마리가 살고 있었쪄요~."


그렇게 두 사람으로 시작된 이 공간은 두 생명이 태어나 네 식구의 일상이 채워졌다.


10월 5일. 새로운 사람을 만난 이 공간은 새 옷을 입고 우리 가족과 이별한다. 두 사람이 엄마, 아빠 된 공간, 지구별에 닿은 두 아이가 생을 시작한 공간. 찬찬히 이 집과 이 집으로부터 이어진 인연을 살펴보다 화장지를 얼른 뽑아 눈을 지그시 눌렀다.


'정이 들었구나, 나도 모르게. 떠나는 날까지 편히, 즐겁게 아이들과 뒹굴다 떠나야지!'


마음먹으며 이별을 고한다.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보며  아이들과 달과 별을 찾으며 웃음 짓던 순간도 안녕.


안녕, 안녕. 고마웠어. 안녕.


매거진의 이전글 식은 밥은 왜 엄마 몫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