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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Jul 06. 2019

고인물이 됐다.

“복직하세요.”


회사 경영국 팀장님이 말을 건넨다.

‘2020년 9월까지 육아휴직’ 볼펜으로 휴직계를 써 내려가며 내 이름 옆에 서명한다.

 첫째가 젖도 떼기 전에 둘째가 생겼다.

 ‘두 살 터울로 동생을 만들어주자’했던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으로 끝났다.

"그래, 뭐 언제 인생이 계획대로 살아지긴 했었나."


휴직계를 쓰며 복직하라는 팀장님의 말에, “네, 해야죠.”라고 대답했지만 자신은 없다.


이번 달 세상 밖으로 나오는 둘째의 출산에 맞춰 한 걸음 내딛지도 못하는 돌쟁이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엄마 품을 떠나 낯선 이의 품으로 옮겨가는 아이의 얼굴이 울상인 날이면 애써 웃으며 뒤돌아서서 ‘괜찮아, 어린이집 가서는 잘 놀 거야’라고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향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어도 엄마 역할은 끝나지 않는다.

아이 식탁 밑 흩어진 밥풀과 반찬 잔해들을 엎드려 줍고, 싱크대에 쌓인 아침 식사의 흔적을 지운다. 물이 뚝뚝 흐르는 그릇들을 정리하고 나면, 베란다 세탁바구니의 옷들이 축 늘어져 켜켜이 쌓여있다.

한숨 돌리려고 소파에 털썩 누웠지만 바닥에 흐트러져있는 머리카락과 먼지들이 눈에 거슬린다.

설거지, 청소, 저녁식사 준비 등등이 끝나고 나면 시곗바늘은 어느새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다.

아이가 집으로 돌아온 시간부터 남편이 퇴근시간까지 분침만 바라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웃고, 옷장 속에 쏙 숨어서 숨바꼭질하고 내 등 뒤로 다가가 까꿍 하며 웃는 아이를 보며 즐거워하다가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하고 시선은 시계로 향한다.

 ‘아직 30분 남았네.’

돌덩이를 하나 얹은 듯 무거워진 배 덕분에(?) 아이와 놀아주다가도 ‘엄마 휴식’이라 외치며 바닥에 눕는 게 일상이 됐다.

남편의 퇴근 시간만 오매불망 기다린다는 육아 선배 엄마들의 말들이 무슨 뜻인지 절절이 실감한다.


이렇게 하루를 보낸 뒤 아이가 잠이 들면 티브이 보는 일도, 그 좋아하던 책 읽는 일도 뒷전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멍’ 하게 취침 시간까지 시간이 흘러버린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 세숫대야에 고인 물처럼 멈춰 있는 내가 보인다.

누구의 엄마가 아닌 ‘김예린’으로 사회에 다시 나가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빛이라고는 하나 없는 깜깜한 동굴을 홀로 걷는 듯 아득하기만 하다.


엄마가 되기 전 흘겨봤던 ‘경력단절’이라는 단어가 내 것이 될 수밖에 없구나는 생각에 마른 입술만 물어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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