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글쓰기를 시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두 달 매일 글쓰기를 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직업처럼 글을 매일 쓸 수 있는지 나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 후, 6개월이 지나고 글 하나를 쓰고, 다시 또 6개월이 지나 글쓰기 화면을 열었다. 글을 쓰고 싶을 때까지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다시 글을 쓰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된다는 나의 믿음이 맞다면, 나는 한동안 삶을 글로 옮기고 싶을 만한 울림이 없었는지 모른다.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하겠습니까?"
우연히 마주한 이 글이 머릿속에 떠돌아 다녔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대단한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언젠가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 나 대신 내 글이 아이 곁에 남아주기를 바라서였다. 내 글이 딸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글쓰기 자체가 목적이 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또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아이처럼 의미를 찾지 못하면 하기 싫어진다. 아무런 의미 없이, 별다른 이유 없이 뭐든 그냥 할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지만, 나이 거의 40이 되어도 아직도 잘 안 된다.
무시하고 지나려고 했는데, 마음이 이 질문에 답하라고 괴롭힌다. 내일 죽는다면 나는 남편과 아이에게 글을 남길 것 같았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함없이 사랑하는 내 진심을 전하는 일 이었다. 남편과 아이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일 죽는다면 남편과 아이와 시간을 보낼 것이다. 최대한 그들의 모든 움직임을 내 눈에 담을 것이다. 눈썹 깜빡임 하나도 놓치지 않을 것이고, 웃을 때 생기는 얼굴에 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내 눈에 담을 것이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환하게 웃는 모습을 기억 속 사진에 고이 저장해 둘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이 나를 만나는 일이고,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그리고 글을 통해 내 삶과 성장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라는 사람은 그냥 이런저런 것에 관심이 많고, 어떤 것은 특별히 더 좋아했노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은 설렘이 싹 틔우기 시작했고, 이 씨앗이 찾아올 때까지 나를 기다려 주었다.
지금까지 행복에 집착하며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헤맸던 것은 아닐까? 어느 정도 긴 시간이 지나 마음이 '이제 됐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이제는 내 마음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말한다. '행복과 자유는 밖에서 찾을 수 없고, 모든 괴로움은 다 내 마음이 일으킨다'는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살았지만, 마음과 다르게 현실에서는 잘 되지 않아 오히려 화가 났던 것일까? 하지만 이 말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나를 발견했다.
죽음을 생각하니 삶이 보였다. 남편과 딸이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 나에게 한정적으로 주어진 삶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기적처럼 소중한지, 나와의 약속에 대해 매일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나아가는 나의 실천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나의 선택과 나의 길을 의심하지 않는 단단한 믿음이 얼마나 존엄한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본다.
지난 6개월 동안 나는 많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나와 타인은 그저 다를 뿐이라는 사실이 유일한 사실'이라는 깨달음이다. 옳고 그름이란 애초부터 없는 것이며, 우리 모두는 그저 다를 뿐이고 각자 다른 생각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그런 나와 타인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하루하루를 만들어갈 뿐이다.
'다시 시작'이라는 말을 몇 개월 동안 수도 없이 매일 반복했다. 얼마나 반복했는지, 얼마나 질렸는지, 참지 못해 낭떠러지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내 마음이 내 등을 세게 밀친다. 두려울 틈도 없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날개를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