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머리 앤 홍차 인문학 9
만화 주제곡의 첫 소절은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으로 시작한다. 매우 경쾌한 리듬에 붙여진 가사지만, 당사자인 앤은 이 가사가 마음에 들까?
“She’s terrible skinny and homely, Marilla. Lawful heart, did any one ever see such freckles? And hair as red as carrots! Come here, child, I say.”
커스버트 남매가 입양한 소녀가 궁금해서 초록지붕 집을 방문한 레이첼 린드 부인은 앤의 외모를 보고 주제곡 가사처럼 말했다. 앤은 밖에서 놀다 온 터라 머리카락은 바람처럼 자유분방한 모습이었고 하필이면 주근깨도 왠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린드 부인은 앤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지만, 앤의 발걸음은 친절하지 않았다.
“I hate you,” she cried in a choked voice, stamping her foot on the floor.
자신의 외모에 대해 거침없이 말하는 린드 부인에게 앤도 솔직하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지만 태도가 올바르지 못했다. 앤의 행동을 보고 화가 잔뜩 난 린드 부인에게 마릴라는 앤이 분명 잘못했지만 옳고 그름에 대해 배우지 못한 그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But we must make allowances for her. She’s never been taught what is right. And you were too hard on her, Rachel.”
그리고 마릴라는 앤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된 이유가 바로 레이첼 린드 부인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마음속에 남겨두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음식을 먹어야 하고 가능하면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건강하게 살고 싶고, 음식을 통해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고 싶고, 가능하면 보다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고 싶은 마음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다. 차도 음식이니 분명 여러 가지 효능을 가지고 있다. 동양에서는 신농(神農)의 시대부터 차의 효능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서양 사람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실물이 도착하기 전에 글을 통해 차를 소개하면서 ‘중국인들은 어디에서나 마신다’고 했지만, 자신들의 세계에서는 낯선 음식이었으니 효능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차의 해로움을 주장하는 근거 중에는 중국인이 삐쩍 마른 것은 차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유럽의 각국에서 차의 효능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비록 차가 유행하지 않은 곳일지라도 차의 효능은 대체적으로 인정했다. 물론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통, 소화불량, 감기, 간염, 괴혈병, 학질(말라리아) 등에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의사들은 사람들에게 차를 처방했다. 그중 프리드리히 빌헬름(Frederick William, 1620~1688년)의 궁정의였던 코리넬리우스 분테쿠(Cornelius Buntekuh, 1648년~1685년)는 자신의 저서 『Medizinischen Elementarlehre(기초 의학 교본, 1680년)』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적극 권장했다. 처음에는 하루 10잔부터 시작해서 위장과 신장이 최대로 허용하는 양까지 늘려가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환자에게 하루에 50잔의 차를 마시도록 처방하기도 했다.
치료를 위해 차를 마신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프랑스의 태양왕(Le Roi Soleil) 루이 14세(Louis XIV, 1638년~1715년) 일 것이다. 그는 17세기 중엽에 해가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었고, 자신은 병이 끊이지 않는 몸이 되었다. 77세까지 장수하는 동안 피부병, 위염, 설사를 비롯해 편두통, 치통, 통풍, 당뇨 등에 시달렸다. 루이 14세가 차를 마신 이유는 통풍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유럽의 중심이었던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을 만든 주인공도 차를 마셨지만, 아쉽게도 차는 죽은 자를 지옥불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커피, 이 칠흑 같은 어둠을 지닌 아폴론적인 음료의 유행을 이기지 못했다.
마릴라는 방에서 울고 있는 앤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분명 린드 부인도 잘못했지만 그렇다고 너의 잘못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린드 부인에게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Rachel is too outspoken. But that is no excuse for such behaviour on your part.”
그리고 사과할 마음이 들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I can’t say I’m sorry when I’m not, can I? I can’t even imagine I’m sorry.”
분노를 삭이지 못한 앤은 사과할 마음이 없는데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영원히 방에서 살아야겠다고 대답했다. 앤은 린드 부인에게 했던 말을 후회하지 않았다. 뚱뚱하고 상상력도 없어 보인다고 말한 것이 자신의 속을 후련하게 했으므로 오히려 잘했다고 생각했다.
앤이 말한 영원히는 언제쯤 끝날까? 이미 주변의 아름다움을 직접 보았는데 과연 방 안에서 상상만으로 지낼 수 있을까? 후련하긴 했지만 분노를 삭이기엔 모자랐던 탓에 앤의 머리카락은 당분간 바람처럼 자유분방하게 헝클어지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