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머문 생각

허송세월

김훈산문

by 중간착륙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허송세월 p.54

죽음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의술의 목표라면 의술은 백전백패한다. 의술의 목표는 생명이고, 죽음이 아니다.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처럼, 깨어진 육체를 맞추고 꿰매서 살려 내는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 충분히 다 살고 죽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길을 품위 있게 인도해 주는 의사도 있어야 한다. 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다 살았으므로 가야 하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고무호스를 꽂아서 붙잡아 놓고서 못 가게 하는 의술은 무의미하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요즘 들어 죽음마저도 점점 상업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거동이 불편해지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옮겨지고, 대부분은 그곳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한다. 자신이 살았던 익숙한 집이나 동네에서 눈을 감던 과거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하루아침에 낯선 공간으로 이주한 뒤, 그곳에서 삶의 끝을 받아들이는 기분은 과연 어떤 것일까.


죽음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도 아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불가피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최소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찾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품위 있는 죽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 가볍고 평온하게 삶을 마무리하려면, 살아가는 동안 몸도 마음도, 그리고 물질적 욕망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삶을 덜어내고 비우는 습관. 그리고 가족에게 나의 죽음에 관한 생각을 평소에 잘 전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죽음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불길하거나 두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남겨진 이들에게 혼란과 불안을 덜어주고,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준비는 단지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은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기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곧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일이다. 오늘을 사는 방식이 곧 내일의 끝을 결정짓는다면, 우리는 삶과 죽음 모두를 아름답고 균형 있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이야말로 품위 있는 마지막을 맞이하는 가장 중요한 길일 것이다.




나의 소유가 과연 나의 소유인지 생각해 보자


허송세월 p.66

‘우리 새’라는 말에 나는 웃었다. 새는 저 자신일 뿐이고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닐 터인데, 자기 집 마당의 나무에 깃들인 새를 사람은 기어이 ‘우리 새’라고 부른다. 나는 아들에게 이 새는 ‘우리 새’가 아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아이들은 나무 티에 밥알을 뿌려 주었는데, ‘우리 새’는 먹지 않고 먼 데서 먹이를 구해왔다.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는 옆집에서 멋있는 소나무를 심으면 우리도 심자고 졸랐다. 꽃과 나무는 본래 정해진 주인이 없는 것이고 쳐다보는 사람이 주인이므로, 구태여 우리 집 마당에 심을 필요는 없고 옆집 나무라도 보고 즐기면 우리 나무나 마찬가지라고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는데, 아이들은 내 말을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제집 마당에 들어와 박힌 것에 각별한 인연을 느끼는 것은 인생의 옹졸함이겠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5월에 숲 속의 모든 새들이 둥지를 짓고 알을 품어도 내 집 마당에 들어온 새를 보고서야 모든 새들의 둥지와 거기에서 깨어나는 새끼들을 생각할 수 있으니, 나의 아둔함은 내 자식들과 마찬가지다.




'우리 새'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연을 자신과 연결 짓고 소유하려는 본능을 드러낸다. 새는 그 자체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지만, 인간은 자신의 마당에 깃든 새를 통해 자연을 마치 자신의 일부로 소유한 듯 느낀다. 이 문장은 나의 소유가 과연 진정으로 나의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가진 것들을 떠올려 보니, 소유라는 개념이 얼마나 인간 문화와 성장 과정에 깊이 뿌리내렸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종종 소유를 통해 안전함과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정한 만족과 연결로 이어지는지 되묻게 된다. 이 글은 ‘소유하려는 마음’과 ‘존재를 함께 즐기는 마음’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운다.


이 생각은 자연이나 물질적 재화에 국한되지 않으며 인간관계에서도 적용해 볼 수 있다. 누군가를 소유하려 하거나 통제하려는 마음 대신, 그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즐기는 태도를 가질 때, 더 깊고 의미 있는 관계가 가능하다.


‘우리 새’라는 단순한 표현은 결국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거울과도 같다. 자연과 물질, 그리고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는가? 그저 바라보고, 느끼고, 놓아주는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삶은 더 가볍게 흘러갈 수 있음을 이 글은 가르쳐 준다.


결국, 소유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진정한 자유는 소유를 내려놓는 순간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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