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4-펫로스,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의사와 환자의 관계도 통상적인 인간관계와 다르지 않다. 외래 진료와 정규 수술을 근간으로 하는 대부분의 의료 분야에서 환자와 의사의 관계 형성은 중요하다. 관계가 초기에 제대로 형성되어야만 치료를 진행해 나갈 수 있다
_이국종, <골든아워>- p78
갑자기 밥을 먹지 못하던 이쁜이는 처음에 단순 장염을 의심했지만, 곧이어 단백질 소실성 장병증(PLE)으로, 그리고는 자가면역질환이 의심되는 염증성 장질환(IBD) 진단을 받았다. 어떤 강아지들은 식욕저하와 구토, 설사를 반복하면서도 6개월 이상씩 내복약을 먹으면서 명확한 진단을 받기 전까지 버티는 경우도 있다는데 이쁜이의 경우는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증상이 나타나자마자 병원을 찾았지만, 조금 좋아지는가 싶다가 다시 급격하게 나빠지는 증상으로 인해 써야 하는 약과 처치가 늘어나면서 순간순간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도 잦아졌다.
나는 온통 외래어와 약어로 쓰여 있는 각종 소염진통제며 항생제, 염증과 설사, 구토에 대응하는 처방약 이름, 혈액검사 내용을 익숙해질 때까지 수시로 외웠다. 세레니아, 메트로니다졸, 프레드니솔론, 부네소나이드, 온단세트론, 염증수치 CRP, 알부민 수치, T-프로틴 수치, 콜레스테롤 수치... 점점 길어지는 진료비 청구서에 적힌 처방약의 이름들 속에 나의 밤도 점점 길어져만 갔다.
너: 고단하지 않았어? 퇴근길에 병원에 들러서 면회하고 집에 와서 약 공부하고.
나: 피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해해야 했어.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아야 했고. 그리고 매 순간 짧은 시간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이 많아졌으니까. 24시 병원답게 응급환자와 미리 예약한 환자들도 많고, 주치의 선생님과의 면회시간은 30분 남짓인데 다루어야 할 이쁜이의 증상과 주의사항은 매번 많았지. 그래서 더 공부했던 것 같아. 보다 신속하게 보다 정확하게 소통하기 위해서.
너: 그래서 주변에서는 우려도 했다면서. 괜히 의사의 말을 하려는 게 아니냐면서.
나: 그런 면도 없지 않았지. 이쁜이는 원래 다니던 병원에서 다른 곳으로 전원을 가야 했잖아. 새로운 수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그리고 입원이 잦아지다 보니 주치의 외에 당직 수의사 선생님들도 만나야 하고. 그러다 보니 충분히 라포-관계성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히려 의학용어를 쓰는 것이 "잘난 척하는 보호자"로 여겨져서 밉보이지 않겠느냐, 치료에 지장을 주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었지.
너: 참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그런 우려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보호자는 연약(vulnerable)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네.
나: 처음에는 주변의 그런 우려 자체가 황당하게 들렸지만...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어. 그분들이 생각하는 수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그 우려 속에서 내가 본 것은 '소중한 것을 행여라도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으니까.
어쨌거나 나는, 주치의 선생님에 대해 믿기로 결정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는 상황을 이해하고 대응하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을, 어떻게든 강아지를 포기하지 않고 지키고 살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 누가 담당이 되었든지. 나의 공부는 어떻게 보면 내 기도였던 거야. 나와 함께 대화하는 수의사 선생님들의 마음에 가 닿기를 원하는 기도.
너; 그런 노력이 어느 순간 오히려 잘못된 것 같다고 느꼈다면서.
나: 소통을 하려는 노력 자체는 나무랄 수 없지만 내 입장을 좀 더 고수했어야 되었나, 나의 우려를 더 잘 전달했어야 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많이 되었지. 왜냐하면 보호자가 24시간 그동안 함께 하면서 곁에서 관찰한 것도 병의 치료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잖아. 그래서 맞춤형 처방이란 것도 필요한 것이고. 매번 이번에는 어떤 치료를 해야할까, 무엇을 선택하든 위험 요소를 간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수의사 선생님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순간들이 많아졌지.
예를 들면, 이쁜이가 처음 단백질 소실성 장병증 (PLE) 진단을 받고 저지방 사료로 바꿔야 했는데, 이 부분이 물론 매뉴얼을 따르는 것이기는 했지만 나는 계속 걱정이 되었어. 왜냐하면 그때 시도해 본 저지방 사료는 닭이 주성분이었는데, 이쁜이는 예전의 사료 기록을 검토해 볼 때도 닭이 썩 잘 맞는 것 같지 않았어. 그리고 무엇보다 밀가루-통밀이 들어 있는 것이 마음에 계속 걸렸지. 수년간 글루텐프리 제품을 먹었을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통밀이 들어있는 노견용 다이어트 사료를 먹고 나서부터 컨디션이 안 좋아진 것 같았기 때문에. 혹시 밀가루를 소화시키지 못하는 강아지 셀리악 병 같은 건가?라는 의심도 했었지.
그래서 이런 우려를 충분히 전달하고 차라리 매뉴얼 단계를 좀 더 뛰어넘어서 쌀죽이나 황태를 베이스로 하는 자연식으로 넘어갔어야 했나 싶기도 했는데. 물론 영양불균형을 고려해야 하고 또 그 방법이 꼭 성공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내가 먼저 이해하려고, 받아들이려고 했던 대화의 시도가 혹시 듣는 이가 나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방해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고통스러운 생각도 들었지.
너: 어렵다 어려워... 강아지는 말을 못 하니까 보호자가 대신 선택을 내려 주어야 한다는 것도 큰 부담이겠어. 그리고 안타깝게도 고소고발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무리 보호자와 합의를 한다고 해도 매뉴얼의 단계를 변경하는 시도를 한다는 것도 수의사 입장에서는 쉽지 않을 건데
나: 그래서 신뢰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지. 이쁜이의 경우는 응급실, 동네 병원에서 2차 병원, 그리고 대학병원까지 5곳이나 점점 증상이 심해짐에 따라 치료를 받으러 다녀야 했고 주치의, 인턴, 당직 선생님들까지 10명은 넘는 수의사 선생님들을 만나야 했거든. 그래서 나는 그분들이 나를 신뢰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쁜이가 굳게 가지고 있는 생의 의지를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던 것 같아. 30분이라는 짧은 면담 시간 안에 말이야.
고군분투하던 4개월 동안, 녀석이 매달 챙겨 먹던 심장사상충 약이나 종합백신 기록만 간간히 있었던 강아지 달력은 빼곡하게 매일의 체중과 먹은 음식, 구토 증상이나 약 복용 내용으로 가득 찼다. 나는 그러한 팩트 체크들이 널뛰는 듯한 증상과 상황을 조금이나마 통제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을 이어갔다. 관찰 기록의 어떤 것들은 전달되었고, 어떤 것들은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다.
"이런 수치가 나오는 경우에는 예후가 좋지 않아요."라는 표현에서 말하는 '예후'가 사망을 뜻할 수 있다는 것을, 병원에서 처치를 받고 나서는 이내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곤 하던 꼬순내 나는 이쁜이를 품에 안고 있는 나는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물어볼 걸. 그 말이, 그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하지만 겁나서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수의사와 보호자의 말을 중간에서 서로 이해하기 쉽게 통역해 주는 무언가가-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쉽게 쓰는 용어가 상대에게는 생소할 수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며 서로가 생각하는 바를 온전히 전달해 낸다는 건 쉽지 않은 과정이다.
마음을 다잡으려 애쓸 때 읽곤 하는 이국종 교수님의 <골든아워>에서 중증외상센터의 기록들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 '생을 이곳에 붙들어 놓기 위한' 간절한 노력의 순간들을 보며, 보호자나 수의사나 누구에게든...소중한 존재를 살리고 싶어하는 마음은 매한가지일텐데 어떻게 그 마음이 같은 방향을 계속 바라보게 할 수 있을까 질문했다.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