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이 중요하지 않은 도시, 영천

깨어난 야수 2025년 창간호 ㅣ 서사 에세이 ㅣ 강아름

by 강아름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급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길은 비어 있었고, 낮은 지붕들 사이로 바람이 천천히 지나갔다.
술집 간판 몇 개가 아직 불을 켜지 않은 채 늘어서 있었고,
이곳은 마치 하루를 미루기로 합의한 동네처럼 조용했다.


“잠깐 인터뷰 괜찮으세요?”


길 한복판에서 발을 멈추게 한 건 그 한마디였다.
취하리라고 적힌 명찰, 손에 든 작은 메모지.
나는 가방끈을 한 번 고쳐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영천의 초여름이었다.

백화점 하나 없는 동네라고 들었지만, 그래서인지 길은 오히려 숨 쉴 틈이 있었다.


“지금 어떤 여정 중이세요?”


질문은 가벼웠지만, 바로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웃었다.


“재부팅된 컴퓨터 같아요. 다시 시작은 눌렀는데, 어디로 갈지는 아직 로딩 중인 상태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적었다.

나는 덧붙였다.


“다만… 필요한 프로그램은 이미 다 깔려 있는 것 같아요. 뭘 하든 실행은 가능하겠죠.”


“그럼, 어떤 짐을 챙겨서 여기까지 오게 되신 거예요?”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별것 없어 보이는 가방 안에는, 말로 설명하기엔 긴 시간이 들어 있었다.


“예전에요. 심리를 공부하고 싶어서 연구소 청소라도 시켜달라고 편지를 쓴 적이 있어요.”
“그 뒤로 교도관이 됐고, 수용자 상담을 했고요.”
“한동안은 정말 많이 쏟아냈는데… 어느 순간부터 흥미가 좀 식더라고요.”


말을 하다 잠시 멈췄다.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웃으며 지나갔다.


“그래서 그냥 안정감에 기대서 쉬고 있었어요. 다시 뛰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그런데 ‘시작’이라는 단어를 봤어요. 취하리 소셜링 프로그램이요.”
“그때는… 주저가 없었어요.”


“무거웠던 짐도 있으셨나요?”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든 가방끈을 한 번 더 말아 쥐었다.


“스무 살 때, 깜깜한 밤에 뒷산 입구에 있었어요.”
“그땐 정말… 살아가는 법을 몰랐던 것 같아요.”


자책, 혐오, 도움, 생존.
그 모든 단어를 꺼내는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들이 짐이기도 했고, 저를 여기까지 데려온 자산이기도 했어요.”
“다만… 새로운 시작 앞에서는 잠시 내려놓고 싶어요.”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인터뷰 중 가장 좋았다.


“앞으로 챙기고 싶은 짐은요?”


이번엔 조금 빨리 대답했다.


“인간을 이해하는 일요.”
“상담을 하다 보니, 현재를 통해 과거를 추론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게… 소설 같더라고요.”

“그래서 깨달았어요. 상담을 좋아한 게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고 싶었던 거구나.”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글도 쓰고, 언젠가는 가르치는 사람도 되고 싶고요.”


“다음 목적지는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목적지는 잘 모르겠어요.”
“대신 방향은 있어요.”

“잘하는 건 할 수 있는 만큼, 좋아하는 건 하고 싶은 만큼, 해야 하는 건 일상적으로.”
“사랑은… 가능하면 낭만적으로요.”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비슷한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한마디만 해주신다면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답했다.


“과거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좋은 것처럼, 지금의 나보다 미래의 내가 더 좋을 거라고 믿어요.”

“아직 철이 없어서 가능한 확신일지도 모르지만요.”

“발은 땅에 두고 걸을 수밖에 없겠지만, 시선만은 하늘에 둘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와 비슷한 순례자들이랑요.”


술집에 불이 하나둘 켜지고, 낯선 사람들의 웃음이 골목을 채웠다.

우리는 짧게 인사를 나눴고, 각자의 가방을 다시 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흩어졌다.


작은 마을에서, 잠시 연결되었다가 흩어지는 사람들. 이런 만남은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사라진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그 조용한 도시에 남아 있었다.


급할 이유가 없고, 도착했다는 사실조차 크게 중요하지 않은 곳.

영천이었다.


목적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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