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당신에게 외로운 내가

수줍게 건네는 친절, 그리고 기도

by 김하예라

예닐곱 살 정도 되었을 때, 우리 동네에는 내 또래의 친구들이 많아 늘 무리를 지어 놀러 다니곤 했다. 술래잡기, 숨바꼭질, 고무줄놀이, 사방치기, 그리고 자전거 타기 등 우르르 몰려다니며 친구들과 할 수 있는 놀이는 참 많았다. 그토록 밝던 해가 지고, 붉은빛의 노을이 하늘에 물들기 시작하면, 함께 놀던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재잘거리며 함께 놀던 여럿의 친구들과 차례로 작별 인사를 하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불현듯 내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떼던 난 마치 세상천지에 홀로 사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묘한 감정의 이름이 '외로움'이었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 내가 어른이 된 후에야 알았다.


학교에 가고, 고학년이 되며 공부를 하면서 '인생은 역시 홀로 사는 것이구나'를 확인했다. 특히, 방정식과 함수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에도, 읽기도 어려운 영어 단어의 철자가 좀처럼 외워지지 않을 때에도, 날 대신해 공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오로지 당사자인 나만이 문제를 해결하고 감당해야 했다. 특히 대학 진학이라는 일생일대의 과제를 앞둔 고3 때 나의 불안과 외로움은 극에 달했던 것 같다. 꼭 죽을 때까지 영영 그 어려운 시험 문제들을 못 풀 것 만 같았다. 하루 종일 시험지, 시간과 씨름해야 하는 긴 수능시험을 과연 끝까지 치러낼 수 있을지 좀처럼 확신이 들지 않았다. 진학을 앞둔 십 대이던 내가 불안한 감정과 외로이 싸우느라 나의 미간은 늘 찌푸린 채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마치 이 세상의 고민은 나 혼자 다 지고 가는 표정을 하며 지냈다.


학업이 그러했듯, 건강에 생긴 문제에도 나 대신 아파줄 사람은 없다는 당연한 사실에 외롭고, 쓸쓸했다. 나는 목숨을 담보로 한 수술 두 번과 비교적 가벼운 수술 두 번, 총 네 번의 수술을 받았다. 나는 목숨을 건 수술이었으나, 그토록 나를 사랑하는 가족은 그들의 목숨을 걸기는커녕 수술실에 한 발자국도 함께 들어갈 수도 없었다. 수술실 문 앞까지만 함께 할 수 있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수술실 앞에서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난 후, 나는 그들과 철저히 분리되어 수술실로 실려 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누워 간호사들의 알 수 없는 의학용어, 그들이 점심으로 먹을 메뉴, 이제 준비되었으니 의사 선생님을 호출하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그들만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수술실의 극도로 환한 조명이 나를 비추고, 의사와 간호사가 내려다보는 가운데 홀로 누워있던 나는, 마치 어느 행성에 우연히 발을 디딘 외계인이 된 것 같은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꼈다. 마취 주사를 놓는 바로 그 순간에는 외로움이 지나치다 못해 당장에라도 꼭 죽을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때 내가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을 나누어 가져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나 홀로 애타는 심정으로 어디에나 계시는 신을 부르다가 깊은 잠 속에 빠져들곤 했다.


나에게 '삶'은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누구도 아닌 자신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로 점철된 순도 백 퍼센트 외로운 여정이다. 아기이건, 어른이건, 노인이건 예외 없이 각자 건너야 하는 그들만의 사막과 강과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외로움'이라는 공통적인 짐을 진 인간에 대해 깊은 동정심과 애정을 느낀다. 당장 엄마와 떨어져 어린이집이라는 곳에 가서 난생처음 본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처음 본 친구들과 놀아야 하고, 먹기 싫은 밥을 먹어야 하고, 자기 싫은 낮잠을 스스로 자야 하는 아기를 바라볼 때도 마음이 아프다. 학교에 가서 심장이 콩닥콩닥 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손을 들고 발표를 하고, 40분 수업 시간과 10분 쉬는 시간이라는 규칙에 맞추어 공부를 해야 하는 소년을 바라볼 때는 짠하다. 회사에서 상사의 꾸지람과 고객의 불평을 꾸역꾸역 참아가며 쉴 틈 없이 일을 해야 하는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바라보면 안타깝다.


가슴 아프고, 짠하고, 안타깝기만 할 뿐 그들의 짐 중 그 무엇도 내가 대신 져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내가 고민 끝에 낸 묘책은 '친절과 기도'이다. 각자 어깨에 지워진 짐을 지고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왕이면 환하게 웃으며 따뜻한 말 한마디로 위로해 주고, 수고를 격려해 주고, 그들의 안녕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의 친절한 한마디로 용기를 냈던 경험이 있다. 그때 그 수술대 위에서 철저히 혼자이던 내가 간절히 기도를 하던 순간, '잘될 거예요. 걱정 마세요.'라고 말하는 어느 간호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내 옆에 누군가 있다'라는 사실에서 느낀 깊은 안정감 때문이었는지 눈물 한 방울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맑은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있던 그녀의 한마디 친절 덕분에 나는 혼자서 잠이 들 용기를 얻었다.


생각해 보면, 난 아들의 어린이집 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어린이집 문 앞까지 데려다주며 손을 잡아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과 함께 서로의 손바닥을 찰싹 마주치며 '하이 파이브!'를 외칠 수는 있다. 딸아이의 시험문제는 단 한 문제라도 대신 풀어줄 수 없지만 따뜻한 국과 밥과 반찬을 올린 아침상으로 그녀의 허기짐을 채워줄 수는 있다. 남편의 회사에 가서 상사의 막말을 대신 들어주고, 고객의 불평을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을 사서 책상 위에 살짝 올려놓을 수는 있다. 이처럼 외롭던 나는 외로운 누군가에게 가능하면 친절하고 따스한 쪽으로 다가서고 싶다. 나의 작은 친절이 그의 외로운 마음에 한 스푼의 위안과 한 방울의 눈물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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