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TV드라마를 통해 인생의 지혜를 배웁니다.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뛸 듯이 좋았던 일이나 아련한 추억이 있기보다는 항상 조금은 부족하고, 자주 누군가에게 마음이 상하고, 늘 뭔가를 기다렸던 기억이 많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부잣집도 아니었다. 우리 집 살림은 평범에서 약간 부족한 정도였고, 근검절약과 근면성실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나와 동생 두 명으로, 모두 일곱 식구였는데, 가족이 다 같이 나가 외식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차라리 그 돈이면.."이라는 말을 되뇌시며 경동시장이나 가락시장에 가셔서 싼값에 식재료를 사서 몇 개의 장바구니에 꽉꽉 채워, 양손 가득 들고 오셨다. 그리곤 하루 종일 작은 부엌에서 가족을 위한 엄청난 양의 음식을 직접 만드셨다.
교회에서 노래와 합주 발표회가 있던 크리스마스와 세뱃돈을 두둑이 받을 수 있는 설을 제외하고는 별달리 설레거나 기쁜 일 없이 그저 무던하고 무난한 날들을 보냈다. 겨울 동안 주야장천 입고 다니던 그 검은색 점퍼처럼, 나의 어린 시절은 무채색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지난날의 기억은 무난함 혹은 궁색함으로 점철되어 있음에도, 문득 그 시절의 그날들이 그리워진다니 말이다.
글쎄, 그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 때는 어느 드라마를 느닷없이 열심히 '다시 보기'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인지한 이후이다. 나는 유튜브에서 MBC 드라마 전원일기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 MBC 홈페이지를 들어가 한편씩 결제를 하며 찔끔찔끔 다시 보기를 했다. 감질이 났던 나는 전원일기를 원 없이 보기 위해 유료 OTT 서비스에 가입했다. 무려 월 7,900원의 사용요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다.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인 1980년대 방송된 전원일기를 하루에 한편에서 두 편, 때로는 세 편씩 연이어 시청했다. 2000년대 초반에 이미 종영된 드라마이자 40년 전에 방송되었던 그 오래된 드라마를 유료 결제까지 해 가며 챙겨 보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전원일기를 차곡차곡 시청하는 동안 나의 마음에 쉼을 얻었다고나 할까. 그동안 두 아이를 키우고 살림하면서 학위 논문까지 완성하느라 지친 나의 육체와 바삭하게 바스러진 나의 영혼이 드라마를 보는 그 순간만큼은 쉼을 얻는 듯했다. 특히 드라마 속에 수시로 등장하는 꾸밈없는 자연에 매료되곤 했다. 봄철 들꽃과 여름철 푸른 나무, 가을철 주렁주렁 열린 과일과, 겨울철 저녁밥 짓는 굴뚝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와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시절 자연이 그토록 아름다웠던가? 삶에 바빠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값을 지불하지 않고 거저 주어졌던 자연이 새삼스럽게 눈 부셨다.
드라마를 보며 나의 어린 시절과 가족이 떠올라 마음이 울렁이고 먹먹해졌다. 특히 최불암 배우님과 김혜자 배우님의 편안한 생활연기를 보며, 밭일을 즐겨하시던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고 싶어 져서 혼났다. 외아들 영남이의 교육에 열을 올리는 대학 나온 큰며느리 역할의 고두심 배우님을 보면 어려운 형편이지만 어떻게든 우리를 공부시키려 애쓰셨던 친정어머니가 떠오른다. 온 가족이 아침 식사를 하는 모습에서는 우리 집 일곱 식구에 작은 아버지 가족 네 식구까지 열한 명이 함께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던 때가 자연스레 생각났다. 그저 상추나 풋고추, 오이 같은 채소와 몇 가지나물 반찬, 구운 생선, 그리고 국과 밥이 전부였던 소박한 식단을 매일 함께 대하며 나누었던 대화 덕분에 우리 가족끼리는 모르는 이야기가 없었다. 나와 동생들은 할아버지가 가장 먼저 수저를 드실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 입에 음식을 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밥 먹으면서 텔레비전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익혔다.(안 그랬으면 여지없이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으니까....)
전원일기에 등장하는 화려할 것 없는 양촌리 사람들이 성실하게 논 일과 밭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가치를 되새긴다. 허름한 몸빼 바지와 빛바랜 셔츠 차림의 사람들이 새참으로 나오는 막걸리 한 잔과 막 잘라 즙이 흐르는 수박 한쪽에도 커다랗게 웃어 젖히는 모습에서 삶의 희락은 부와 빈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양촌리 사람들에게서 어려웠던 시절 나의 가족과 이웃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곤 했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은 더 이상 '궁상맞아서 이제 그만 잊고 싶은 지난날'이 아니라 '눈물이 날 만큼 그립고 아름다운 시절'이었음이 분명하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나는 대부분 지치고 고단하다. 특별할 것 없이 비슷한 하루의 일과를 매일 반복하여, 그날이 그날 같을 때도 많다. 오늘만 해도 아침 내내 아이들을 깨우고, 먹이고, 입혀서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느라 오전부터 진이 다 빠졌다. 어젯밤에 미루어두었던 집안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의 어려움도 소중한 추억이 되고, 그때의 아팠던 경험은 지금의 어떤 일을 위해 꼭 있어야 할 일이었음을 알게 되겠지. 지나간 시절을 그대로 담고 있는 오래된 드라마, 전원일기를 보며 향수에 젖어 그리움에 눈물까지 흐르는 것을 보면서 '그 시절이 참 행복했구나'를 깨닫게 되겠지 생각하며 빙그레 웃어본다. 먼 훗 날, 지나간 내 젊은 삶의 모든 조각들이 부디 영광스럽고 빛나게 기억되길 바라면서 나는 오늘 주어진 삶을, 10월의 이 멋진 날을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