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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2주 전부터 아들이 '싫어.'를 달고 산다. 밥 먹으라고 말해도, 우유 마시라고 해도, 이제 그만 자라고 해도, '싫어!'를 연발한다. 그러더니 지난주부터는 '싫어요!'라고 존댓말로 거절의 의사를 표현한다. 나는 아이의 싫다는 자기표현이 반갑고도 귀엽다. 나는 아이들이 각자의 처한 상황에서 '싫어요.' 안 돼요.' '아닙니다.'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디까지는 할 수 있고, 또 무엇은 안되는지 그 적정 선을 타인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자기 자신에 대해 먼저 잘 알고, 스스로의 상태를 먼저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이도 따뜻하게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길 바란다.
그러나 정작 나는 거절을 잘할 줄 몰라 고생했던 적이 많다. 하기 싫고, 하면 힘든 일들을 굳이 하면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적도 많다. 어느 때부터인가 남이 아닌 나에 대한 관심을 좀 더 가지면서 거절의 용기를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내가 하기 싫은 것도 부단히 인내하며 해내야 하는 일도 많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 번뿐인 내 인생의 40년이 이미 지나간 이 시점에서, 앞으로는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시간이 짧을 것 같은 아쉬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고, 하면 행복해지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
지난주에는 미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올해는 오랜만에 동문 송년모임을 할 것이라면서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물론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반가운 마음도 있었지만 십여 년간 연락을 서로 주고받지 않은 채 살아왔는데 갑자기 모임에 나간다는 것이 어쩐지 어색했다. 나는 '글쎄요..'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겠노라고 에둘러 거절을 했다. 그러나 나의 '글쎄요. 생각해 보겠습니다.'는 거절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나는 어느덧 송년모임 단독방에 초대가 되어 있었다. 은근히 낯을 가리고, 내성적인 편이라 이런 일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단톡방에 공유되어 있는 참여자 명단에는 내 이름도 올라가 있었다. 처음부터 명확하게 나의 불참 의견을 밝히지 않은 탓에 나는 어느덧 갑작스러운 단독방에 초대되고, 송년모임의 참석예정자가 되어있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송년모임 참석이 불가하다는 의사를 정중히 밝히고, 초대되어있는 단톡방도 나왔다. 거절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했다. 더 이상 그날 내가 모임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이리저리 잴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단톡방은 오로지 나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참여하는 곳이다. 그래서 수시로 울리는 메시지 알람에도 귀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정보와 안부를 확인하고 나의 소식을 전하고, 그들의 소식에 응답을 한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그저 나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고 싶다. 혹시 미움을 받을까 염려되어, 혹은 미안한 마음에 거절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은 세 번에서 한 번쯤으로 줄여봐야겠다. 이제는 다섯 살, 열네 살의 나의 아이들이 엄마의 같이 놀자는 권유에도 당당하게 '싫어요!'를 말할 수 있는 용기와 패기를 되새겨 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