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인사

문득_화요일 오후 세 시의 오븐_250422

by beautiful wisdom

“여기가 어디지?”


서영은 급하게 하차 버튼을 누르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익숙한 풍경은 한참 전에 지나가 버린 것 같다. 다시 돌아가려면 어디서 어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지 알아보려다, 휴대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차도, 일정한 간격을 맞춰 심어진 가로수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어차피 길은, 이리 가나 저리 가나 직진인데, 좀 걷지, 뭐. 비도 그쳤겠다…. 아, 내 우산!” 소리치며 버스가 떠난 방향을 바라본들, 조그마한 점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사라진 후다.


“한바탕 쏟아졌으니, 금방 또 내리진 않겠지.”


‘우산 없어도 별거 아니야. 그냥 맞으면 돼. 맞고 뛰면 금방이야.’ 금방이라도 들릴법한 현재의 대답이 문득 서영을 스쳤다.


“뭐라는 거야.” 잠깐 멈췄지만, 다시 걸었다.


얼마만큼이 충분한지 모르지만, 온 세상이, 아니 적어도 이 거리는 봄비로 충분히 적셔진 것처럼 느껴졌다. 공기 중에 느껴지는 흙 내음, 풀 냄새, 그리고 이맘때엔 꼭 느껴지는 수수꽃다리 냄새까지.


‘그럼, 우리 이 향을 따라다녀 보자.’


“뭐라는 거야.” 중얼거리면서도 이미 서영의 발은 향긋함을 따라 걸었다. 이미 맡았던 향과 멀어지다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으려나 싶으면 꼭 어디선가 훅 느껴지는 향기에, 멈추다 걷기를 반복했다. 문득 떠오른 기억과 함께.


“왜일까? 다른 꽃이랑은 다르게, 서영이 너는 왜 꼭 수수꽃다리 앞에서 멈춰 서는 걸까?”

“그러게? 음…, 나 여기 있다고 향기로 알려주기 때문이 아닐까?”

“다른 꽃들도 향기가 있잖아.”

“그건 맞아. 그런데 이 꽃을 꼭 향기로 먼저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 나처럼.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벚꽃의 화사함에 빠져 있는 동안, 조용히 피어나. 향기에 이끌려 고개를 내리면, 내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꽃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래서 이 꽃향기 따라 이사를 하는 거고?”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하게도 꼭 그렇게 되더라. 마음에 드는 괜찮은 집 근처에 꼭 이 향이 나.”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꽃향기와 함께 추억 속 대화도 멈췄고, 웬 낡은 책방 앞에 멈춰 선 자신을 발견했다. 시골 슈퍼마켓처럼 생긴 책방이었다.


“이런 곳에 생뚱맞게 책방이 있네.” 하면서 문을 드르륵 밀면서 들어가는 서영이었다. 영업 중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진열된 책은 몇 권 없었다.


'이제 개점하시는 건가? 혹시… 폐점인 건가?' 하며 진열된 몇 권의 시집을 보다가, 낯익은 표지의 시집 앞에서 멈췄다. 문 열리는 소리에 안쪽에서 후다닥 뛰쳐나오는 책방 사장님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멋쩍게 인사를 했다.


“매장 정리 중이에요, 손님.”

“아…, 그런 거였군요.”

‘낯선 곳에서 익숙한 향기를 따라간 곳에서 마주한 게 이 책이라니.’ 생각하던 서영은 시집을 집어 들었다.

“이거 제가 구매할 수 있을까요?”


책방 사장님은 심플한 크라프트 봉투에 책을 포장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손님이시네요. 이것도 참 특이하게 스치는 인연인데…, 잠시만요.” 하면서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나왔다.


“아까 비가 너무 내려서 그런지, 이 꽃 가지가 꺾어졌더라고요. 꽃이 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요. 혹시 꽃 좋아하시면….” 서영의 손에 수수꽃다리 가지와 책이 들렸다.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서영은 잠시 길을 잃었던 오늘 하루가 참 꿈같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그리고 문득 떠오른….”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서영은,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 걸 보곤 짧은 한숨을 쉬며 하차 버튼을 눌렀다. 정거장에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려고 의자에 앉은 서영은 문득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싱긋 웃더니 가방에서 펜을 꺼내어 책을 펼쳤다. 그러고는 시집과 수수꽃다리 가지를 버스 정류장 의자 한쪽에 놓아두었다. 결심한 듯 입술을 꼭 다물고는 집으로 달려갔다.


버스 한 대가 멈췄고, 승객들이 우산을 펼치며 우르르 내렸다. 무표정의 한 승객이 우산을 손에 쥔 채로 정류장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주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여자는 화면을 보지 않고도 인상을 찡그렸다. 휴대폰 화면을 엎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영이 남겨둔 책과 꽃이 있었다.


여자는 손끝으로 책 위에 떨어진 빗방울을 닦아내다, 무심코 펼쳐진 페이지의 짧은 문장을 읽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울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 한 문장이 왠지 모르게 자신의 마음을 향해 곧게 날아든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던 여자는 조심스럽게 꽃을 손에 들었다. 수수꽃다리의 연한 향이, 막 꺼낸 마음처럼 은은하게 퍼졌다. 따뜻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은 위로였다. 모르는 누군가가 문득 건넨 조용한 인사. 그저 그걸 느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잠깐 가벼워졌다.


‘문득’이라는 건, 그렇게 아주 작고 조용하게 시작되어, 멀리까지 전해질 수 있는 말 없는 인사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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