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면, 뜨거운 질문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내 모습_화요일 오후 세 시의 오븐_250819

by beautiful wisdom

그러니까… 몇 살 때더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거든. 어떤 한 장면이 이토록 오래,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이제 이유를 물어야 할 시간이야. 그럴 때가 되었지. 어쩌면 ‘그런 때’는 이미 지났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지만 말이야, 지금 마주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믿어. 지금까지의 내 삶에 그 장면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거실에 텔레비전이 켜져 있고, 엄마는 부엌에 계셔. 도마와 칼날이 만나는 소리가 통통통- 들리는 걸 보니 두부를 조각조각 썰고 계신 것 같아. 오늘 저녁은 된장찌개일까. 오뎅이랑 감자도 들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를 잠깐 스치고 지나가.


저녁 준비를 하시는 동안, 나는 만화를 볼 수 있거든. 만화가 전체적으로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고, 제목도 몰라. 그런데 딱 그 한 장면. 그것만 나에게 남았어.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캘시퍼, 알아? 눈과 입을 가진 불꽃 악마야. 악마지만 하울의 목숨 같은 친구랄까. 아무튼 그런 생김새의 '불' 캐릭터가 등장해. 활활 타오르는 채로 언덕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녀. 곧 그 장면이 나와. 잘 봐.


누군가가 찾아와. 주인공이지. 불을 만나러 왔어.

자극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불'에게 다가가.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잖아. 화가 잔뜩 난 것인지 뭔지… 어떤 감정으로 이미 가득해서는, 스스로를 태우고 있어. 무섭지도 않은지, 주인공은 조심스러워도 전혀 망설임 없이 불에게 다가가. 그러고는 이렇게 말해.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그런데 불은 사람을 믿지 않아. 얄밉게 눈을 떠. 시험하려 해. 내가 이렇게 행동해도? 어디 한번 보자는 식으로. 그러곤 자신에게 내민 주인공의 양손을 콱 물어버려. 불이 좋아하는 열매 같은 걸 양 손바닥에 수북이 올린 채로 내민 손인데 말이야.


주인공이 아프고 뜨거워해. 그런데 손을 빼지도 않고 꾹 참아. 괴로워해. 그러면서도 찡그렸던 표정을 조금씩 펴면서 말을 이어가. 자기는 괜찮다고. 이해한대. 이렇게 네 화가 풀리면 좋겠대. 그렇게 다시 믿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불을 마주해.


손을 물린 채로 있던 그 찰나의 장면이 내겐 왜 그리 길게 느껴지던지. 내가 물린 것같이 뜨거웠어. 나라면 손을 안 뺄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이 대롱대롱 매달려 ‘지금’까지 따라왔어.

실제로 누군가 내게 상처를 줬을 때, 나는 어땠지? 화내고, 서운해하고, 멀어지고 싶어 했어. 그런데 그 만화 속 주인공처럼,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며 참아낸 적이 있었나? 아니면 나도 저 불처럼, 누군가를 시험하고 밀어내면서도 동시에 이해받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눈이 휘둥그레져. 손을 물고 있는 채로. 그러곤 곧,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빛으로 변해. 자기 자신마저도 삼킬 것 같던 불꽃이 조금씩 사그라들어. 본래의 크기를 되찾아. 주인공의 손을 놓아주고는 자신 때문에 생긴 상처를 보며 미안해해.


주인공이 멋있어 보였을까? 잔뜩 경계하는 불의 모습에서 나를 본 걸까?

이해해 주는 마음으로 살고 싶었던 걸까, 이해받는 마음을 얻고 싶었던 걸까.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데 여전히 나는 어느 쪽에 서 있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상처까지 받아들이며 이해해 주려는 마음은 얼마나 넓고 튼튼해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게 되는 지금의 나를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어. 그렇지 못한 인간이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싶어서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는 건 아닐까. 바보라고, 주변에서 답답해해도 아무런 반응조차 없이 흔들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고 싶어서.


혹은, 온통 ‘나’로만 똘똘 뭉쳐서 자신을 감싸고 싶어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할 말은 하고 싶고, 그럼에도 혼자 남겨지는 건 싫고. 이러는 것도, 저러는 것도 싫어서. 나도 나를 잘 모르지만, 누군가는 나를 이해 해주면 좋겠단 마음에, 심통에 몸부림치는 불이 가여워서. 몸집은 점점 커져도, 속을 들여다보면, 떼쓰는 어린아이가 흘리지 못한 눈물로 가득한, 터지지 않는 물방울에 갇혀 있는 것 같아서. 가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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