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는 순간, 잃는 순간

놀이공원_화요일 오후 세 시의 오븐_250923

by beautiful wisdom

그런 날이었어. 그늘에 있으면 시원하고, 사부작거리며 움직이면 조금 더운 여름날 초저녁. 매미 소리보다 귀뚜라미 소리가 잘 들리는 시간.

거실 쪽 베란다 창문과 부엌 쪽 창문이 이어져 맞바람이 불었어. 찹찹하고 동시에 먹먹해지는 불그스름한 냄새가 났지. 해가 지고 있었어. 그 바람의 끄트머리엔 산에서부터 내려와 주변 논밭과 어우러진 짙은 초록 내음이 섞여 있었어.

우리 집은 불이 꺼져있었고, 나는 가볍게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큰방으로 들어갔어. 엄마 화장대 서랍 첫 번째 칸에서 샛노란 카드 목걸이를 두 개 꺼냈지. 하나는 동생한테 건네주었어. 카드 앞면에는 사진과 이름이 있고 '연간 회원권'이라는 글씨가 적혀있었어. 놀러 가기 좋은 저녁이었어.

드넓은 논밭과 그림처럼 펼쳐진 산과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살던 곳엔 놀이터는 없고 놀이공원이 있었어. 나는 엄마랑 동생이랑 뒷마을로 이어진 인도를 따라 걸어 올라갔어. 이웃에 사는 친한 동생 가족도 함께말이야.

특유의 끼잉끼잉 하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한 대밖에 없는 마을버스가 뒷마을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어. 그 옆으로 하얀색 승용차 한 대, 검은색 승용차도 한 대가 띄엄띄엄 내려갔지. 차가 막히지 않을 때 집으로 가려면 다들 부지런히 움직여야 겠다, 가볍게 폴짝폴짝 앞으로 가면서 나는 웃었어. 놀이공원이 문 닫을 때까지 놀 수 있었으니까.


길을 건너면 적색과 상아색의 벽돌로 촘촘히 만들어진 길이 시작되었어. 한 칸 한 칸 밟으며 재미있게, 그리 높지 않은 경사를 오르면, 짙은 단풍색 지붕의 성문이 웅장하게 서 있었어.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듯 매일 놀러 와도 그때마다 두근두근 설레었지.

입구로 가까이 걸어가다 보면 고개를 홱 돌릴 수밖에 없는 달짝지근한 향이 났어.

"어?! 도넛 가게 열려있다! 엄마!"

간질간질한 코와 궁금한 입으로 엄마를 부르고, 하늘색과 하얀색 체크무늬의 지붕으로 달려갔어. 아주 작은 도넛 가게. 뒷마을 할아버지가 리어카를 끌고 다니시는 것처럼, 도넛 파는 사장님도 이 조그만 가게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실까 궁금했어. 나는 까치발을 들고 계산하는 엄마 곁에 서서 기웃기웃했지. 그래도 잘 보이진 않았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지붕과 똑같은 색깔과 패턴의 종이봉투가 내 눈앞에 놓였어. 동생 하나 나 하나. 꼬깔콘처럼 꼭 손가락에 끼워서 먹어야 했어. 그러면 더 맛있었거든. 엄마 입에도 하나 쏙- 넣어줬지. 입안에서 달콤한 가루가 마구마구 굴러다니다, 마주 보며 웃는 얼굴에 행복으로 사르르 녹아내렸던 거야.


입구로 가면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멋있는 언니가 있었어. 내 목걸이를 보여주면 언니가 문을 열어주었지. 그럼, 동화 속에만 있을 것 같은, 짙은 초록색 지붕의 새하얀 성이 한눈에 펼쳐졌어. 볼 때마다 우와- 속으로 감탄했지만, 그 성은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성의 왼쪽으로 달려갔어. 미니 도넛 봉지 입구를 꼭 움켜쥐고.

일곱 살 내가 탈 수 있는 놀이기구는 많지 않았지만, 정해놓은 순서가 있었거든. 미니 자동차가 첫 번째였어. 동생과 내가 마음대로 붙인 이름이었어. 그날도 늘 그랬듯, 미니 자동차를 향해 뛰어갔어. 사람이 거의 없어서 타고 싶은 자동차를 골라서 탈 수 있다고 엄마가 뒤에서 소리쳤지만 말이야. 오늘은 오토바이를 탈까, 소방차를 탈까,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미니 자동차 기구 앞에 서 있는 언니한테 목걸이를 보여줬어. 그러곤 입장하려는데, 언니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말했어.

"잠시만. 잠시만 이쪽으로 와볼래?"

언니가 손짓하는 곳에는 키를 재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 한 번도 키를 잰 적이 없는데, 왜일까, 나도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 그림 앞에 섰지.

언니가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어. 그리고 키 재는 선과 비교해봤지. 잠시 침묵이 흘렀어.

"어…. 키가 커서 우리 친구는 이제 이 기구 못 타겠다..."

"어…. 네?"

해가 하늘 높이 떠서 내 얼굴을 비추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뜨거웠어. 그걸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였어. 키가 작아서 못 타는 기구가 많았는데, 키가 커서 못 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거든.

"어…. 저 아직 여덟 살 아닌데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뿐이었어. 초등학생이 되면 어린이 기구는 못 타는 거라고 알고 있었거든.

"아, 아직 유치원생이구나. 어, 그런데 어쩌지." 언니가 키 재는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어. "이 선을 넘은 아이가 타면 머리를 부딪힐 수도 있어서 못 타…."

그 순간 눈앞이 뿌옇게 번져났어. 언니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어. 왜, 그런 느낌 있잖아. 어딘가에 걸려 넘어져서 얼굴을 그대로 바닥에 박았을 때 말이야. 코에서 찡- 하고 얼얼하게 울려 퍼지는 그 통증.

나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어. 뛰어왔던 쪽으로 조금 걸어가니까 엄마가 있었어. 내 표정을 본 엄마는 내게 빠르게 달려왔지. 나는 엄마한테 안겨서야 토해내듯 울 수 있었어. 선선한 바람이 목뒤에서 불어도 머리 밑이 땀으로 젖을 만큼 한참을 안겨서.


어젯밤에 말이야, 벤치에 앉아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를 들으면서 그날이 떠올랐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하는 그 어떤 것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만 같았던 느낌. 키 재는 그림 앞에 서 있었을 때처럼. 나는 이제 변화해야 한다는 걸 세상이 알려주는 것만 같았던, 그런 순간말이야.


선 앞에 서 있었던 일곱 살의 나
그리고, 자라는 것은 분명 얻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잃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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