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속의 그대_화요일 오후 세 시의 오븐_250930
왜, 그런 날 있잖아. 별생각도 기대도 없는 평소와 같은 날이었는데, 시간이 좀 흐르고 돌아보니 깨닫게 되는 거야. 내게 무언가를 남긴 소중한 하루였다는 걸. 처음 가보는 책방 이름이 '책방 죄책감'이래. 마음에 드는 거야. 내 안에 어떤 죄책감을 들고 방문하면, 거기에 살포시 내려놓고 가볍게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상상을 하게 되었지.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어떤 것을 내려놓고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대신 나를 멈춰 세운 어떤 것을 품고 나왔어. 무겁지만 무겁지 않은 초록빛 어떤 것. 그 시집은 여전히, 내가 손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두고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온 어젯밤이었어.
제목에 홀려서는, 그 어떤 페이지를 읽어보지 않고 집어 들었단 말이야.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라는 제목이 단단한 어떤 마음을 상상하게 만들었단 말이야. 집에 돌아와 읽어보니, 그 속에 담긴 말들은 명백한 마음을 보여주었어.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
박연준 시인의 「소금과 후추」라는 시를 읽었어. 나를 부수고, 흩어져버린 나를 부르며 찾는 내용이었지. 그러다 깨달았어. 나는 나뿐만 아니라, 당신을 부수고 부르며 찾는다는 걸.
나는 나를 수없이 부수며 살아왔다.
뼈와 살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믿어온 이미지들을, 내가 내게 덧씌운 환상들을 깨뜨리며. 부서진 파편을 쓸어 담아 다시 맞추고, 또다시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물으며 걸어왔다. 그런데, 나를 부수는 과정은 언제나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사랑을 할 때마다, 타인을 향해 나의 환상을 덧씌웠다. "당신은 이럴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완성해 줄 것이다"라는 말 없는 기대를 건네며. 그리고 그 기대가 어긋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실망했고, 그런 내게 실망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환상을 깨는 일이라는 걸,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몸부림치는 일. 하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나’를 보며 살고, 상대의 그림자를 짐작하며 걸어갈 뿐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환상을 부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 조각들 속에서 나타나는 진짜 당신을 찾고 싶기 때문이다. 완전한 진실에는 닿을 수 없더라도, 부수고 부수며 가까워지는 그 과정이 곧 사랑의 길이라는 걸 조금씩 알 것만 같다.
나는 오늘도 나를 부수며, 동시에 당신을 향한 환상을 깨뜨리며. 그렇게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 아니, 환상을 부수는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더욱 선명해지는 건, 결국 당신이라는 사실이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려 애쓰고 있어요. 하지만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언제나 나의 착각과 오해가 섞여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나는 당신을 향해 기대고, 당신을 내 삶의 빈칸에 꼭 맞는 조각처럼 상상하고, 때론 그렇게 상상한 모습이 진짜 당신이라고 착각하죠.
그러다 그 착각이 깨질 때, 내 안에서 부서질 때, 나는 두려워져요. "나는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만든 환상을 사랑하는 걸까?" 스스로 묻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알 수 있어요. 드러나는 당신의 낯선 얼굴, 내가 몰랐던 결, 내가 감히 다 알 수 없는 깊은 세계. 그것들이 내 안에 또 다른 사랑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말이에요.
나는 아마 영원히 당신을 알 수 없을 거예요. 당신도 나를 온전히 알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서로에게 다가가는 걸음이, 우리를 더 깊어지게 해줄 거라 믿어요.
미안해요. 당신에게 품었던 환상.
고마워요. 깨지고 무너져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나에게 그저 당신으로 있어 주어서.
그 부서진 파편 위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여전히 웃고 있는 우리를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