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_화요일 오후 세 시의 오븐_250325
오렌지잼에 크림치즈를 섞으면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이, 연하고 부드러운 색깔이다. 행주 색깔로 쓰기엔 화사하네, 하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청소할 때 산뜻하고 좋기만 한 걸. 약간 해진 행주를 한 손에 쥐고, 책장에 앉은 먼지를 닦아낸다.
동그랗고 한 손에 잡기는 조금 버거운 무게의 스노볼의 윗부분을 다른 한 손으로 잡는다. 행주를 쥔 손을 그 아래에 받치려다 그만,
“어?!”
이어 묵직하게 들려올 쿵- 소리가 예상되어 눈을 질끈 감았다. 마룻바닥에 찍힐 자국도 걱정된다. 그러나 들려온 건, 보다 가벼운 팍- 소리. 그리고 양말에 스며든 차가운 축축함이었다.
고무장갑을 양손에 끼고, 작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크고 작은 유리 조각들을 쓸어 담는다.
“아, 이 무거운 걸 왜 저 위쪽에 올려놔서 정말.”
그거야 뭐, 제일 잘 보이고 어울릴만한 곳에 올려놓느라 그랬지. 누구 탓을 하겠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지, 하면서 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눈 내리는 겨울을 유독 좋아하는 나에게, 그 사람은 스노볼을 선물해 주었다. 한 편의 시와 함께. 시인은 스노볼을 흔들면 반짝이며 흩어졌다 가라앉는 눈송이를 보면서 “그 시간을 한 생이라 부르자”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그 시간을 한 생이라 부르지 말자”라고 한다.
순간이 전부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과, 그 순간들이 눈처럼 쌓여서 전부가, 영원이 되길 바라는 마음. 나는 그 마음으로 스노볼을 자주 흔들었다.
“짠! 깜짝선물이야.”
“우와! 고마워, 정말.”
“나 이제 알 것 같아.”
“뭘? 어떤 걸 알게 되었는데?”
“네가 왜 한 송이만 좋아하는지.”
꽃 선물을 하면서도, 내가 왜 한 송이만을 원하는지 몰랐던 사람.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것을 주고 싶어서 꼭 한 송이를 선물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꽃집에 들어가서 튤립이면 튤립, 장미면 장미.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한 송이를 고르게 되더라고. 너는 그 마음이 좋은 거야. 내가 널 생각하며 딱 하나를 고르는 시간과 마음 말이야.”
“맞아.” 셔벗이 사르르 녹듯 번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네가 주고 싶은 걸 선물 해주는 것도 좋아, 나는.”
“네가 원하는 게 내가 주고 싶은 거야.”
“그건 나도 같은 마음인 거, 알지?”
줄기 길이에 알맞은 크기와 높이의 투명한 유리 화병에 얼음과 차가운 물을 반쯤 담았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나조차도 서서히 맑고 깊게 물들 것만 같은 푸르디푸른 장미 한 송이를 꽂았다. 매일 꼬박꼬박 물을 갈아주면 나흘에서 길게는 엿새 동안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나를 잠시 멈춰 세우고, 순간에 집중하게 만든다.
지나가면서 향기를 맡고,
또 지나가면서 보드라운 꽃잎 한 장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사이에 끼워 살포시 누르듯 만져보고,
또 지나가면서 어제와 달리 좀 더 활짝 핀 모습에 감탄하고,
또 지나가면서 좀 더 오래 보고 싶은 마음에 겉 꽃잎은 떼어내 주고 아끼는 책 사이에 한 장 한 장 끼워둔다.
언젠가 그 책을 펼쳤을 때, 잊었던 꽃잎을 발견하면 어찌나 예쁘던지.
보드라움은 여전히 간직한 채로 책을 펼친 내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덕분에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인사하며, 종량제 봉투에 넣는다.
스노볼을 자주 흔들었다. 흔들리고, 풍경이 변하고. 내가 변하듯 너도 변하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거니까. 그게 우리 삶이니까. 모든 반짝이던 건 약속처럼 가라앉겠지만, 우리는 그걸 알고 있으니까.
깨진 유리를 조그만 종이봉투에 담아, 투명한 테이프로 입구를 봉한다. 그 위에 네임펜으로 ‘유리 조심’이라고 적은 후, 마대에 넣는다. 풍경을 만들어주던 피규어 중에 눈 쌓인 나무는 왠지 버리기가 싫다. 흐르는 물에 헹궈서 휴지로 톡톡 물기를 닦아낸 후 한쪽에 놓아둔다.
스노볼이 없다. 그래도 마음껏 흔들면서 추억을 쌓아놓았으니, 후회는 없다.
마침 전화가 울렸다.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또 마음에 드는 스노볼이 있는지 같이 찾아보자.”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우리, 이번에는 같이 만들어보자. 우리가 원하는 풍경을 담은 스노볼. 우리가 같이 흔들어 볼 스노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