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_화요일 오후 세 시의 오븐_250401

by beautiful wisdom

여전히 바람은 찹찹해. 그늘이 아닌 햇빛이 만들어둔 길을 따라 걸어 다녔어. 따뜻했어. 가볍고 포근한 어떤 기운에 감싸져 있는 것 같았지. 아, 봄인가보다, 했어. 입춘이 봄의 시작이고, 경칩에 개구리가 깨어난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이 내겐 봄인 거니까. 이렇게, 그 어떤 한순간을 붙잡으며 살아가는 거구나, 문득 깨달았어.


오늘은 바보 같은 짓을 해보고 싶었어. 왜, 있잖아. 건축에서 창문을 내는 일이 벽에 틈을 만들어 빛과 공기를 들이는 중요한 과정이라잖아. 볕을 따라 걷다 보니 도서관 앞에 도착했어. 나의 봄이 시작되게 만든 이 빛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계속 따라 걸었어. 실내로 들어오니, 빛은 얇아지고 얇아지다, 길게 이어지거나 뚝- 끊어지기도 했어. 그래도 금세 찾을 수 있었어. 바닥이 아닌 벽으로 이어졌고, 층마다 있는 조그마한 창문이 계속 이어주었거든. 손으로 따라 그리며 계단을 올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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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에 도착했어. 벽에 난 창으로 들어온 빛이 ‘종합자료실 2관’이라고 적힌 자동문까지 길게 뻗어 있었고, 거침없이 걸어가 버튼을 눌렀지. 문을 열었어.


여기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둘러보기 시작했어. 이 책장에서 저 책장으로 건너갈 때마다 벽 쪽에 난 창문이 보여. 대부분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어. 여기가 끝인 걸까, 생각하며 중간쯤 건너갔을 때,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발견했지.


빛은 책장의 중간쯤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어. 그 한 칸을 마주 보기 위해 바닥에 털썩 앉았어. 빛을 받은 책들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순 없으니까, 생각하며 그냥 무심코 바라봤지. 그러다 그냥 손을 뻗었어.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 권을 집어 들었어. 그저 손에 잡혔을 뿐인데, 이유 없이 펼쳐 보았어. 단어가 조용히 흘러가고, 문장이 소복이 쌓였어.


그때는 몰랐어. 그 책이 내게 그렇게 소중한 것이 될 줄은. 처음엔 그저 단순한 이야기였어. 어느 순간, 책 속 한 문장이 자꾸만 나를 멈춰 세운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말이야. 낯선 문장이었지만 이상하게 익숙했지. 마치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던 것처럼.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어. 그러다 문득, 그 문장이 하나의 틈처럼 느껴졌어. 어딘가, 작은 틈이 열리는 느낌. 그 틈 사이로 무언가 스며들기 시작했어. 잊고 있던 기억, 지나간 시간, 스쳐 간 사람. 어떤 것들은 흐릿했고, 어떤 것들은 선명했어. 모든 것이 문장을 따라 흘러나왔지.


살면서 놓쳐버린 것들이 다시 내게 스며들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았어. 사소하게 스쳐 가는 순간들이, 지나쳐버린 것들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려주려고 말이야. 혹은 그걸 알려주기 위해 언제고 다시 돌아오는 때가 있을지도 모르지.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이 나를 변화시키는 순간.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변하고 있었고, 그 책이 그 변화를 알아볼 수 있는 틈을 열어 준 것일지도 몰라. 책 속의 이야기가 나를 채우고,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그 속으로 스며들었어. 어떤 날은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일처럼 느껴졌고, 어떤 날은 한 문장에 멈춰 서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어.


나를 채워주는 것들에게 의도적으로 틈을 내어주는 일이 일상에서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올랐어. 그 틈은 작든 크든 내게 어떤 의미로든 다가올 텐데. 의도적으로 틈을 내어주며 바보처럼 살아볼래.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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