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20171122 장수연 作
얼마 전, 집 구석에 처박혀있던 옛날 비디오 테이프 몇 개를 발견했습니다.
비디오 속 시간은 90년대 말부터 2천년대 초반.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캠코더가 매우 신문물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영상 속의 저와 두 동생들은 비디오 촬영이 무척이나 신기하고 신나는 일이었나봅니다. 집에서 내복만 입고도, 카메라 앞에서 연신 춤을 추고 어색한 포즈를 취하고 난리부르스였습니다. 그러다가도 이내 카메라가 돌아가는 것을 잊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두고 싸우고 화해하는 세 남매의 일상들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옹기종기 모여서 옛날 영상을 보며 한참을 깔깔댔습니다. 그리고나서 저는 집안에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몽땅 찾아서, 업체에 맡겨 동영상으로 변환했습니다. 원래는 집에서 아무렇게나 찍은 비디오가 정말 많았는데,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버린 테이프가 많다는 게 뒤늦게 아쉬웠습니다.
변환된 동영상을 보기 좋게 편집해서 엄마가 편하게 보시도록 핸드폰에 저장해드렸습니다. 합치면 몇시간이 되는 영상들을, 엄마는 대사를 외울만큼 돌려보고 또 보셨습니다.
영상 속에서 세 살짜리 동생을 무릎에 앉히고 살뜰히 밥을 먹이던 열 살짜리 큰 딸은, 현실에선 닭도리탕을 뚝딱 해놓고 엄마와 마주앉아 술친구를 해드리는 서른살이 되었습니다. 엄마는 술을 마시면서도 영상을 또 보고, 그 영상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 하고, 그리고 나서 영상을 또 보기를 반복했습니다.
세상에, 저렇게 예쁜 아이들이 셋이나 내 뱃속에서 나왔다는게 신기하고 감사하다며. 영상을 보고 있으면 당신의 지난 세월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 든다며.
저는 그런 엄마를 보며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남매는 엄마의 주름살을 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라났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엄마에게 우리는, 엄마의 젊음을 모두 바쳐 조각한 멋진 작품 같은 것인 셈입니다. 엄마 인생 최고의 트로피인 내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이 미안해서, 저는 추억에 퐁당 빠진 엄마 옆에서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집에 가서 어린시절 영상을 보고 엄마와 술잔을 기울이던 그 날. 우연히 그 날, 저는 심심하면 읽을 요량으로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를 가방에 넣어 갔습니다. 엄마와 한참 추억을 방울방울 되새기다가, 엄마에게 이 책을 권했습니다.
사실은 저도 한 장도 읽지 않은 상태로, 엄마에게 어설프게 책을 소개 했습니다.
"그러니까, 워킹맘이 쓴 건데... 요즘 엄마들은 자아실현도 하고 싶고 아이도 잘 키우고 싶잖아. 그러니까 엄마가 꼭 모든걸 희생할 필요는 없다, 가끔은 애기 맡겨놓고 해방되고 싶은게 엄마 심정이다, 뭐 이런거 써놓은 책이래."
써놓고 보니 정말 엉터리 소개였네요. 읽지도 않은 책을 멋대로 소개한 탓일까요? 엄마는 질색을 하며, 요즘 애들은 나약해서 그런 말을 하는거라고, 너희처럼 예쁜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일은 전혀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놓고 한참을 술을 마시다 갑자기 하시는 말. 30년 전, 제가 생후 몇 개월 정도의 아기였을 때 이야기였습니다. 엄마가 스물다섯 꽃띠였을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갓난아기인 저를 겨우 재워놓고 한숨 돌리려는데, 집 밖에 야채를 파는 트럭이 왔답니다. 엄마는 아기를 깨워 업고 나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잠깐인데 괜찮겠지 싶은 마음에, 잠든 아기를 그냥 두고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집 앞에 온 야채 트럭이었으니, 길어봐야 5분,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기를 두고 맨 몸으로 현관문을 열고 나왔는데, 세상에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채소를 사고 들어갔더니 아기가 그새 잠에서 깨서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있는 걸 보고, 엄마는 내가 미쳤지 미쳤지 하며 자책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너도 이제 다 컸으니까 말해줄게"라며, 무슨 대단한 출생의 비밀이라도 되는 듯이 털어놓는 엄마가 귀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아기가 예뻐도, 말 못하는 아기와 단둘이 붙어서 24시간 365일 씨름하는 일이 힘든 것은 당연하지요. 내 또래 아기엄마들 사이에서는 너무 흔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장 인스타 해시태그에도 #줌마렐라 #자유부인 #육아퇴근 같은 이야기가 차고 넘칩니다.
시대가 달라진 지금은 그냥 SNS에서 깔깔 웃으며 하는 그 이야기를, 대단한 잘못처럼 꽁꽁 싸매고 있다가, 이제 딸래미가 다 컸으니 대단하게 고백한다는 듯이 말하는 엄마. 그러니까 엄마는 여전히, 겨우 5분 아이를 놓고 집 밖에 나와서 해방감을 느꼈던 자기 자신이, 그 순간에는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고, "엄마답지 못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다시 한 번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엄마여도 짜증날 수 있고 엄마여도 가끔은 엄마하기 싫을 때도 있는 거라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 엄마는 정말 좋은 엄마였다고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이제는 책을 다 읽은 후이니, 좀 더 매력적으로 책을 소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에서 작가는 본인이 아이를 낳고 나서, 본인과 부모님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이,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향한 위로인 동시에, 엄마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한 상상을 자꾸 한다. 서른 살의 내 딸과 서른다섯 살의 내가 같이 영화를 보고, 여행을 하고, 맥주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는 상상. 지금 당장, 서른 즈음의 내 딸을 만나고 싶다. 내 딸이 서른 살쯤 됐을 때 동년배의 내가 이야기를 나눠주고 싶다. 엄마와 나와 하율이, 하린이를 생각하면, 그런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p.210
그런데 내가 이런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부모님에 대해 느끼기 시작한 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엄마 아빠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면서부터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가 병원에 장기 입원하시면서 나는 대상 잃은 사랑의 감정을 추스르느라 힘들어졌다. 딸들을 보면 자꾸 부모님이 떠오른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란 이렇게 필연적으로 타이밍이 어긋날 수밖에 없는 걸까.
-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는 장수연 작가가 육아 중에 틈틈이 쓴 글을 모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흐름이 참 재미있습니다. '사실은 낳고 싶지 않았다'는 파격적인 고백으로 시작해서, 소위 말하는 모성애니 희생이니 하는 것들과 작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욕구 사이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아주 소중한 경험이다' 라는 아름다운(?) 마무리로 책이 끝나는 듯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작가는 노파심에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혹시나 자신의 책이 결혼이나 출산에 대해 미화하거나, 그것들의 당위를 주장하는 글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쏙 와닿았습니다.
나는 가끔 결혼한 것을 후회한다. 결혼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결혼은 하되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도 가끔은 상상한다. 다른 행복과 다른 고통을 감당하면서 살아갔을 것이다. 그게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행복이나 고통보다 더 나은지 어떤지, 그런 비교는 무의미하다.
(중략)
이 길이 맞는지, 내가 좋은 선택을 했는지, 계속 가면 뭐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건 비혼이나 비출산을 선택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걸 감당할지 저걸 감당할지 이 행복을 누릴지 저 행복을 누릴지, 그저 결정할 뿐이다.
-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p.228
내 남편은 집안일에 절반 이상 참여하는 합리적인 남자이고 육아에도 적극적이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내 인생에 이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존재들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결혼하지 않은 내 인생은 어땠을까 상상하며 울컥한다. 아마 결혼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도 나처럼 가끔 행복하고, 가끔 후회하며, 그래도 각자의 삶을 앞으로 밀고 나가게 될 것이다. 삶이 버거운 어떤 순간을 만날 때, 당신이 '내가 결혼을 안 해서 이런가?', '내가 아이를 안 낳아서 그런가?'라는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 나도 '아이 때문에 이렇게 힘든가?'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 우리 모두 삶이 주는 버거움을 잘 감당해보자. 깻잎이든 돈가스든, 선택한 걸 맛있게 먹으면서.
-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p.229
저에게 해주는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열일곱살 여고생 시절부터 인상을 찌푸리며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겠다"며 비혼주의자를 자처했던 저에게.
시간이 많이 흘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결혼을 약속하고도, 무엇인가가 여전히 두려워서, 무언가에서 도망가려는 사람처럼 '남들같은 결혼생활은 하지 않겠다'며 제가 생각하는 결혼관을 따박따박 늘어놓는 저에게.
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냐"며 아이갖기를 독촉하는 엄마의 말에 또다시 인상을 팍 쓰며 성질을 부리는 저에게.
결혼,출산,육아 이 모든 것이 아직도 두렵고 걱정되는 서른살의 저에게.
일면식도 없는 책 속의 쿨한 언니는 "이러나 저러나 인생엔 부침이 있고 또 행복도 있다"며, 진솔하고 따뜻한 조언을 꾸밈없이 툭 던져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