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autiPo Jan 19. 2018

[Book] 반드시 두 번 읽어야 하는 소설.

《나를 보내지 마》 20050101 가즈오 이시구로 作

얼마 전,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읽고 나서, 그의 작품을 좀 더 보고싶어서 선택한 책이 《나를 보내지 마》였습니다. 이 작품이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사실보다, 책 홍보 문구에 쓰여있는 '복제인간'이라는 단어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작품의 전반부는, 복제인간들을 위한 학교 '헤일셤'을 배경으로, 복제인간들의 어린시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헤일셤 출신의 복제인간들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삶을 보여줍니다.


소설《나를 보내지 마》는 굉장히 독특합니다. 책 뒷표지에는 '복제인간'이라는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지만, 그에 비해 소설의 내용은 지루하리만큼 평범합니다.


특히 헤일셤 학교를 배경으로 한 전반부는 아주 평범한 성장소설같은 느낌입니다. 어린시절 소녀들의 미묘한 위계질서와 감정싸움, 남녀간에 오가는 이성적 호기심과 사랑. 저는 예전에 읽은 소설《사립학교 아이들》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자질구레하고 평범한 이야기들을 한참이나 늘어놓은 이유를, 저는 책을 다 읽고나서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복제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복제인간들의 삶도 우리와 똑같이 아주 평범하다는 것 자체가 소설《나를 보내지 마》의 아주 특별한 외침인 것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흠뻑 몰입하면서도, 다 읽고 나면 다시 손이 가지 않는 책이 있습니다. 반면 아직 읽지 않은 부분이 너무 궁금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빨리 책을 마치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후자에 속하는 책들의 특징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렇습니다. 정교하게 짜여진 이야기. 한번 보고 다시 돌아가서 두번째 보면 그 의미가 다르게 느껴지는 문장들. 개구쟁이 작가가 '누군가 발견하기를, 그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며 곳곳에 숨겨둔 장치들을 찾아내는 재미.


제게는 작년에 읽은 로런 그로프의 소설 《운명과 분노》가 후자에 속했고, 이번에 읽은《나를 보내지 마》가 또 그러합니다.


주인공 캐시.H.의 입장에서 아주 평범한 것으로 묘사되는 헤일셤 학교에서의 유년시절. 그러나 독자들에게는 중간중간 묘하게 거슬리는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독자들은 '들었으되 듣지 못한' 상태로, 자신의 불편함이 정확히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 불편함은, 주인공이 헤일셤을 졸업한 이후의 이야기에서 낱낱이 까발려집니다. 저는 마지막 부분을 향해 달려가면서, 하나하나 드러나는 헤일셤의 충격적인 진실을 접하며, 숨도 쉬지 않고 책을 끝까지 읽어내려 갔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읽고,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다시 책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말을 알고 나서, 전반부를 두번째 읽고 나서야, 1회독에서 저를 불편하게 하던 그 희뿌연 불쾌감의 정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설의 처음부분에 배치된 문장들조차, 결말까지를 아우르도록 정교하게 쓰여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작품을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복제한 '근원자' (원본 인간)을 찾으려고 애쓰는 아이들. 그들은 늘 이렇게 평범한 삶을 유리창 너머로 구경하고 동경하며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소설과 같은 제목의 영화의 스틸컷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는 《나를 보내지 마》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내 쪽을 바라보고는 "헤일셤이라. 분명 멋진 곳이었겠군요." 하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한 나는 그가 어디에서 성장했느냐고 물었다. 도시에 있는 어떤 장소를 언급하는 순간, 검버섯 핀 그의 얼굴이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찌푸려졌다. 그때 나는 그가 그 시절을 떠올리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대신 그는 헤일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중략) 우리, 그러니까 토미와 루스와 나 같은 이들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내가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를 보내지 마》p.17


제가 같은 작품을 두 번이나 읽는 이유는, 바로 이런 구절을 찾아내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 구절을 읽을 때엔 그저 '음.. 헤일셤은 좀더 좋은 학교인가보네' 하고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헤일셤이 아닌 다른 학교에서 자란 '그'가 사실 자랐다기보다는 '사육'되었다는 점. 그리고 '토미와 루스와 나 같은 이들'이 나고 자란 헤일셤 학교는 이러한 흐름에 대항하기 위한 곳이었다는 점. 그들이 그곳에서 당연하게 받았던 '인간대우'가 사실은 아주 특별하고 실험적인 것이었다는 점. 책을 끝까지 읽고 이 모든 것을 알고 나서 다시 보면, 이 평범한 구절은 새롭게 다가옵니다.

 

"내가 담배를 피운 건 잘한 일이 아니다. 흡연은 건강에 나빠서 나는 담배를 끊었단다. 하지만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은, 너희 경우에 흡연은 과거의 내 경우보다 훨씬 더 나쁘다는 사실이다."

그런 다음 그녀는 말을 끊고는 침묵에 잠겼다. (중략)

"그런 것에 관해서는 너희도 들었을 것이다. 너희는 '학생'들이다. 너희는...... 좀 특별한 존재들이다. 따라서 각자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내 경우보다 훨씬 중요하단다."

-《나를 보내지 마》p.102
다만 아주 깊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교사들 그리고 바깥세상의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때 이미 종국에 가서는 기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까지는 정말이지 알지 못했다.

-《나를 보내지 마》p.103


이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성년자들이 모여 생활하는 기숙학교에서 담배를 금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작품 속 주인공이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해당 작품을 도서관에 비치하지 않을 만큼, 유난히 흡연이나 건강에 엄격한 학교의 풍경은 어딘가 낯선 느낌이 듭니다.


위 구절에서 아이들에게 '각자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내 경우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하는 선생님의 이야기가 얼마나 잔인하고 소름돋는 말인지. 기증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진짜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알지 못하는 이 아이들의 순수함이 얼마나 가슴아픈 것인지. 이 역시 책을 두번째 읽을 때에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를 보내지 마》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Never let me go"라는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 캐시의 모습.


가사의 의미를 새기는 대신 나는 "베이비, 베이비, 네버 렛 미고......"라는 후렴구가 흘러나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평생에 걸쳐 간절하게 아기를 바랐으나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어떤 여자를 떠올렸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그 여자는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를 품에 안고 어르면서 "베이비, 네버 렛 미 고......"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그녀는 한편으로 몹시 행복한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아기가 병에 걸리거나 누군가 아기를 빼앗아 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있다. 당시에도 나는 그 노래의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런 해석은 그 노래의 나머지 부분과 맞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게 있어서 그 노래는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래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그 노래를 거듭해서 듣곤 했다.
-《나를 보내지 마》p.105


소설 속 복제인간들은 임신과 출산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사실은 그냥 사랑노래일 뿐인 "Never let me go"를 들으며 캐시는 아기를 가질 수 없던 여자를 떠올리고, 또 그 여자에게 기적적으로 아이가 생기는 상상을 합니다. 그 순진무구한 모습이 처연하기 그지 없습니다.


캐시는 베개를 끌어안고 "Never let me go"를 부릅니다. 노래 속 간절하게 부르는 'baby'는 평생 만날 수 없는 그녀의 아기이면서, 동시에 평생 가져볼 수 없는 평범한 삶일 것입니다.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가끔 담배도 마시고 술도 마시면서 사는 삶. 기증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체로 존재론적인 의미가 있는 삶. 노래 속 'baby'는 캐시가 가지지 못할 이 모든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참고로 유투브에 Never let me go를 검색하면 Judy Bridgewater의 노래를 실제로 들을 수 있습니다. 캐시를 매혹시킨, 담배피는 앨범 자켓사진과 함께 말이죠. 노래 자체로도 아주 훌륭하지만, 애절한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베개를 안고 춤추는 캐시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릅니다. (https://youtu.be/4UX6tzE7P44)


그런데 이것은 소설과 영화를 출시하면서, 작품 속 설정에 따라 새로 만든 음원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Never let me go"라는 노래는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https://youtu.be/AKVFSZbWziM) 여가수 Judy Bridgewater가 부른 버전은 작품의 설정에 따라 새로 만든 음원이라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한창 음악을 듣다가, 이 댓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Wait, so she doesn't ever sing the word "baby"?

정말입니다. 노래 가사에 baby라는 부분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포인트죠. :)



《나를 보내지 마》는 저에게 많은 물음을 안겨주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나. 헤일셤 학생들의 노력처럼, '영혼이 있다'는 것의 증명으로 나는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가.


과연 복제인간이 우리의 수명을 연장시켜 준다면, 나는 복제인간의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 병들어 죽는 것을 택할 수 있을까. 정작 지금의 나는, 동물복지가 지켜지는 환경에서 사육된 닭의 달걀이 고작 몇백원 비싸다는 이유로 쳐다보지도 않는데. 사실은 죽이기 위해 키우는 동물에게 동물복지라는 말을 붙이는 것부터가 위선이지 않나.


만약 인공지능이 더 발달되어서 감정을 가지게 되고,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면 그것을 인정해주어야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Book] 모든 엄마들과, 엄마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