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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utiPo Apr 09. 2017

[Book] 사랑과 결혼의 진실, 침묵, 그리고 거짓.

<운명과 분노> 20170405 로런 그로프 作


<운명과 분노>는 '운명' 과 '분노'의 두 파트로 나뉘어 있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서사를 가지고, 특이하게도 '운명'은 남자의 관점에서, '분노'는 여자의 관점에서 쓰여져 있습니다.


사실 <운명과 분노>는 출판사의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아보게 된 책이었습니다. 몰래 온 손님처럼 도착한 책 사이에 출판사의 귀여운 편지가 끼어있었습니다. "특히 분노 편이 꿀잼" 이니 꼭 완독하랍니다.


'운명'편을 읽기 시작했는데, 머릿속에 물음표가 동동 떠다녔습니다. 전개되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했지만 만연체 문장에 화려한 비유와 수사적 표현이 많아 단번에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도입부를 읽다가 "혹시 출판사에서는 완독하지 못할 것을 걱정해서, 독자들을 낚으려고(?) 뒷편인 '분노'가 꿀잼이라고 미리 코멘트를 한 걸까?" 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


그런데 3분의1 지점을 지나며 저는 이야기의 흡입력에 흠뻑 빠져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운명과 분노>는 시동이 걸리는 데에는 조금 오래 걸리지만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브레이크가 없는 슈퍼카 같은 책입니다. 저는 숨도 쉬지 않고 책장을 넘겼습니다. 특히 운명 편을 끝내고 분노 편으로 넘어가고서는 뒷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이 밀려왔습니다. 과연 출판사의 코멘트대로, 분노 편이 '꿀잼' 이었습니다. 저는 방에 혼자 앉아 책을 읽으면서 연신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헐?!' "헐?!!!!" "대박!!!!"




<운명과 분노>는 한 남자와 여자의 결혼 생활을 중심으로, 그들 각각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를 비추고 있습니다. 남편 로토는 꿈을 먹고 사는 남자입니다. 그는 평생 무언가에 매혹되어 있었습니다. 여자, 마약, 술, 연극, 그리고 아내 마틸드에. 반면 아내 마틸드는 로토가 꿈을 먹고 살 수 있도록, 일상의 중요하고 자잘한 문제들을 모두 떠안은 여자였습니다. 저는 이 구도에서, 얼마 전 읽은 은희경 작가의 소설 <태연한 인생>을 떠올리기도 했다.


제가 느낀 <운명과 분노>의 매력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인물을 촘촘히 연결헤 짜올린 놀라운 스토리와 구성력. 다른 하나는 문체 자체의 화려한 매력입니다. <운명과 분노>의 문장은 마치 옛날 음유시인들의 것 같습니다. 운문과 산문의 경계에 있는 느낌. 그냥 그 자체로 한 편의 거대한 시처럼 느껴집니다. 서양식의 미묘한 말장난과 비유가 영어와 불어와 스페인어를 넘나들며 가득하고, 고전 문학에서 인용된 유머와 비꼬기가 수없이 등장합니다. 영문 원서로 읽으면 매력이 배가 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운명과 분노> 인지 고민해봤습니다. 평생 순수하게, 현실에 구질구질함에 대한 고민 없이, 본인의 결핍을 메우고자 본인을 매혹시키는 것을 좇아 살았던 남편 로토의 관점에서, 모든 일은 '운명적'으로 그에게 다가왔고 다시 그를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연이은 운명의 끝은 결국 '분노'였습니다. 아내 마틸드의 인생은 그녀 스스로의 '분노'에 의해 차곡차곡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운명에 의해 뒷통수를 맞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마틸드는 로토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고자 했고, 로토는 마치 성스럽고 순수한 예술품을 감상하듯 마틸드의 아름다움을 숭배하고 감탄하고 사랑했습니다. 마틸드는 침묵의 거짓말로 결혼생활의 행복을 지켰고, 로토는 삶의 진실을 외면하고 그 짐을 마틸드에게 모두 떠넘겼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이 거짓이었다고 해서 그 사랑조차 거짓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유하고자 한 것은 잘못이겠으나, 그녀가 그를 소유하고자 한 이유는 사랑이었으니까요.


자세한 이야기는 책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여기에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만, 정말로 "분노" 편이 꿀잼이오니 꼭 완독하셔서 <운명과 분노>의 진가를 맛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운명과 분노>에서 주인공 로토는 유난히 버번을 자주 마십니다. '버번을 한 모금 마시고는' 이라던가, '그는 버번 반 병을 모두 마셨다' 라던가 하는 식으로, 버번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위스키를 마셔본 적이 없는 저는 그 버번이 너무나 궁금해서 책을 다 읽자마자 동네 마트에 가서 버번 위스키를 한 병 사왔습니다.


사실은 버번을 멋지게 한 잔 따라놓고 혼자서 로토의 고독과 결핍에 대해 상상하며 책의 서평을 좀 써보려고 했지만, 버번이 40도의 독주임을 간과한 맹랑한 결심이었습니다. 저는 얼음과 콜라에 섞은 한 잔을 마시고서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했고,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잠들어 다음날 오전 11시가 넘어 일어났습니다.


세상에, 이런 술을 혼자 반병을 마시고, 병나발을 불었다니. 주인공 로토의 상실감은 제가 텍스트로 읽으며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었고, 그의 일탈은 저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음을 알콜을 직접 체험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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