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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utiPo Sep 11. 2016

[Book] 불안, 우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라는 안정제>  20151125 김동영 김병수


출장가는 길 집을 나서기 직전, 비행기를 타면 뭐라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대충 집어들고 나온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책 안에서 과거의 저를 발견했고, 또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책 <당신이라는 안정제> 는 불안, 우울, 공황으로 힘들어하는 작가 김동영과 그의 주치의인 정신과 전문의 김병수의 글입니다. 김동영은 본인의 아픔을 조용하게 털어놓고, 김병수는 이에 담담하고 나직한 위로의 말을 덧붙입니다.


힘내라는 부담스러운 격려도, 다 잘될거라는 무책임한 긍정의 말도 이 책에는 없습니다. 그냥 마음이 많이 아픈 한 사람과 그 사람을 곁에서 지켜주는 다른 한 사람의 담담한 독백, 대화, 그 중간의 어딘가에 있는 문장들이 이어질 뿐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읽는 이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사실은 책을 읽으며 스물한살의 저를 떠올렸습니다. 흔들흔들 불안한 걸음을 한발 한발 내딛던 그 때. 왜 나만 저 햇살 가득한 세상에 속하지 못하는지 슬픔과 원망으로 가득했던, 가엾고 어리석었던 어린 나. 그 어두운 감정을 누구에게로 향해야 할지 몰라 스스로를 갉아먹던 시간들.


저의 첫 해외 여행은 스물한살의 여름이었습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 저는 출장으로 유럽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암스텔담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빽빽하게 앉아 잠든 사람들 사이에서 가느다란 불빛 아래 이 책을 읽자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죽을 만큼 우울하고 불안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모든 행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것이라고 믿어요. 불안하고 우울하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울해서 죽을 것 같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울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을 만큼 우울하고 불안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당신이라는 안정제> p.14 (김병수)


7년새 피부는 조금 더 푸석해지고 몸 군데군데 군살이 늘었고 마음은 현실에 좀 더 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덜 두렵고 덜 불안하고 더 행복해졌습니다. 당시에 저를 불안해하게 했던 많은 것들을 지금은 부족하게나마 어느 정도 이루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럴듯한 직장, 안락한 보금자리, 나를 지지해주는 크고 작은 인연들.  평범한 이십대 초반 누구나 가질 법한 소망들이죠. 물론, 부드러운 담요로 몸을 칭칭 감고, 의자에 몸을 아무렇게나 기댄 채로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는건 그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너무 열심히 살 필요 없고 이기적으로 한번 살아보라고
당신 너무 나이브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좀 나이브합니다. 그리고 좀더 나이브해지고 돌처럼 조금만 더 둔해지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영민하고 예민해도 좋겠지만, 조금 단순하게 생각하고 둔감해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당신이라는 안정제> p. 73 (김병수)
너무 열심히 살 필요 없고 이기적으로 한번 살아보라고, 그동안 너무 위만 보고 살아온 나의 마음이 스스로를 구덩이에 빠지게 만들었으니 이제는 조금 천천히 즐기면서 살아가라고 했다.

- <당신이라는 안정제> p.200 (김동영)


어쩌면 무언가를 성취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이 변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물한살 이후로 7년간의 시간은, 저의 빼죽한 모서리들이 둥글어지고, 조금은 포기하고 조금은 내려놓고 조금은 만족하고, 나사를 한 두어개 풀어놓게 된 시간들이었습니다.


또는 그저 그 시간 동안 감내하고 기다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통, 불안, 우울 같은 것들은 폭풍우처럼 몰려오지만 또 폭풍우처럼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시간이 흐르면 힘들었던 것이 조금씩 잦아들고, 불행은 서서히 흐려지고, 고통을 피하지는 못해도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아픔과 고통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죠. 우리는 이런 사실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 <당신이라는 안정제> p.137 (김병수)




김동영은 한편으로, 자신을 괴롭게 하는 그 불안과 우울이 사실은 자신이 직업인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원천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고요하지만 위협적인 폭풍우, 시작과 끝을 알수 없게 떠올랐다 사라지는 상념들을 어쩌면 이렇게 현실의 언어로, 마치 그것이 눈에 보이는 사물인양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풀어 놓았는지 그 표현력이 감탄스러울 정도 입니다.


방문 밖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삼십 분에서 길게는 두 시간이 필요했다. 침대 밖은 맹수가 우글거리는 정글이었고, 천장에 달린 전등과 벽시계 그리고 창문으로 간간이 들어오는 햇살과 심지어는 뜨거운 공기까지도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날 겨누고 있었다. 도저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 <당신이라는 안정제> p.21 (김동영)




심지어, 세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이런 고통을 받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고, 나만 그들과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는 영원히 그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이미 금이 가버려서 그것이 아문다고 해도 흉터가 남아 영원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중략) 영원히 그들과 같아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누구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굵은 펜으로 꾹꾹 눌러쓰듯, 마음에 새겨진다.

- <당신이라는 안정제> p.26 (김병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 자신과 세상과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라는 안정제>는 그 모든 이들에게 말 그대로 안정제가 되는 책입니다. 더불어 진짜로 의학적인 의미의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또는 그런 이들을 도와주고 싶어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과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사실은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것을 극복하는 데에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이게도, 사실은 내가 뭔가를 잘못하지 않았고, 사실은 누구나 숨기고 살 뿐이지 제각기의 아픔과 삶의 무게가 있다는 걸 확인하면 마음이 왠지 조금 편안해지는 기분입니다. 그러니까 난 저주받았거나 또는 뭔가 잘못에 대해 벌받고 있는게 아니니까, 그냥 내 삶의 무게만큼만 이겨내면 되고 그건 누구나 해내고 있는 거고 나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환자와 의사로 만나 그 이상의 인연을 만들어간 두 작가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기운을 전달하기 위해.


살아 있다는 것은
마치 이 세상 구석구석 바람이 스며들듯이
또다른 누군가를 향해
기운을 전달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죠. 움직임을 느낄 수는 없어도, 한순간도 멈춰 있지 않은 지구의 판처럼 말이죠. 누군가 바닥을 헤매며 지독히 괴롭더라도, 살아 있다는 것은 마치 이 세상 구석구석 바람이 스며들듯이 또다른 누군가를 향해 기운을 전달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 <당신이라는 안정제> p.87 (김병수)


혼자만 아픈 건 아니라는 것을요
너무 아픈 사람은 정작 아프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건 어쩌면 덜 아파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만 혼자만 아픈 건 아니라는 것을요. 모두가 같은 감정과 고통을 느끼며 이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힘들다'를 입에 달고 살지만 사실 그 말에는 좀더 밝고 건강한 삶에 대한 애착이 묻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 <당신이라는 안정제> p.259 (김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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