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autiPo Sep 06. 2016

[Book] 전쟁의 들꽃같은 민낯

<전쟁은여자의얼굴을하지않았다> 20151008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승리한 전쟁은 찬양의 대상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슬픔과 고통조차도, 이 영광스러운 승리를 위한 작은 희생으로 미화됩니다. 고난-극복-승리 로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성공 스토리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진실의 순간들은 생략되고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20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의 참극과 그럼에도 계속되는 소소한 삶의 순간들을 생생한 목소리로 엮어낸 '다큐소설' 입니다.


이 책은 승리의 과정을 지나치게 미화하지도 않고, 어떤 전술을 써서 어떻게 적을 무찔렀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이 책은, 긴긴 전쟁은 단순히 총질의 연속이 아니라 긴긴 '삶'이라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전쟁에 얽힌 수십만명의 '삶', 기쁨과 슬픔, 그 '감정'의 파도들이 엮어낸 날줄과 씨줄을 가만가만 들여다봅니다.


 여성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봤다고 하지만, 흔히 생각하듯 남편을 전장에 보낸 처량한 과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책은 남성들 못지 않게 전쟁에서 한 몫을 해낸 소녀병들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총으로 사람을 죽이던 순간의 두려움. 최전방에서 싸우던 어린 소녀의 결의. 극한의 순간에서도 때때로 여자이고 싶고 아름답고 싶던 욕망들. 전장에서 꽃핀 사랑과 낭만의 순간. 생리혈을 뚝뚝 흘리면서도 남자에게 지고 싶지 않았던 자존심, 사명감, 애국심. 찢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적군의 아이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느낀 모성애.

 

때로는 책을 읽는 저에게까지 피비린내가 나는 기분이 들만큼 잔인하다가도, 때로는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잘 다듬어진 전쟁영화를 보는 것처럼 귀엽거나 낭만적이거나 웃기거나 아름다운 순간들도 등장합니다. 


2016년을 사는 제가, 감히 침대에 편안히 누워 심심풀이처럼 이 책을 읽는 것이 사치스럽고 미안할 만큼 소녀들의 꾸밈없는 목소리는 절절하고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참전하러 가는 길에 사탕을 한움큼 사고, 적군의 마을을 점령하고선 버려진 주택 옷장에 가득한 원피스를 입어보며 패션쇼를 하고, 수류탄이 터지고 총성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새로 입은 군복이 더럽혀질까봐 진흙탕에 뛰어들지 않는, 붕대로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전쟁터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대책없이 천진한 소녀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어리다고, 여자라고 무시당하기 싫어서 남자들보다 더 기를 쓰고 강하고 용맹하게 최전방 저격수부터 간호병까지 각자의 몫을 해낸 사람들입니다.


 제게 신기하고 낯설게 느껴진 포인트는 두가지였습니다.


하나, 승전국인 러시아 병사들의 목소리라는 것. 사실상 승리한 적이 없었던 우리나라의 전쟁 이야기만 보고 듣다가 처음으로 접한 승전국의 사연에는 묘한 낯설음, 어딘가 어색한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활자를 읽어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내 살이 찢기는 기분이 드는 끔찍한 순간들을 겪었음에도, 그 모든 이야기의 기저에는, 묘한 승리의식이랄까, 내 조국의 승리에 내가 이만큼 기여해서 자랑스럽다는 자긍심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쟁 이야기의 종착지는 보통 아쉬움, 한스러움, 억울함 같은 감정들인데 말입니다.


 둘째, 아주 많은 소녀들이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에는 자발적인 이들도 상당했다는 것.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애국심을 저는 이 소녀병들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조국이 나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국을 위해 나의 청춘과 열정을 바치고 싶어 안달이 난 소녀들. 너처럼 작고 어린 소녀가 무얼 할 수 있겠냐며 돌려보내도, 나이를 속여가며 부대에 숨어들어가며 끝끝내 그 끔찍한 전쟁터로 스스로 뛰어든 소녀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 모습이 아름답고도 슬펐습니다. 적어도 그 아이들에게는 조국이 그만큼의 신뢰를 보였다는 것이겠지요.



전쟁의 참혹함, 그 안에 피어난 아름다움, 그리고 국가, 희생, 승리, 이런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Book] 내 삶 한가운데의 죽음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