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20160810 김성훈 作
영화 <터널>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실공사로 무너진 터널에 갇힌 한 남자의 생존기를 그린 영화 <터널>.
무능한 정부, 탁상공론, 이기적인 사람들, 터널 안에서의 처절한 생존과정, 눈물흘리는 가족.
이 영화는 사실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간 배우 하정우의 저력과 더불어, 그 모든 클리셰가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에 저는 이 영화를 욕할 수가 없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 갇혀 제한된 자원으로 버티며 구조가 되기를 기다린다는 점에서, 영화 <터널>은 가까운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실 저는, 세월호 사건에 대해 '비극적이다, 안됐다' 이상의 마음을 갖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몇명이 구조되었다, 사망자가 몇명 추가 되었다, 정부가 이러이러한 결정을 내렸다더라, 하는 뉴스들을 흘깃 넘겨다보고 다시 저의 삶을 살기에 바빴습니다. 영화를 보며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이런 저의 모습이 비쳐 너무나 부끄러웠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영화는 저의 이런 부끄러운 마음을 자꾸만 시험합니다.
갑작스러운 터널의 붕괴, 언제 구조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인공 정수는 가지고 있는 식량과 물을 최대한 아껴먹으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물에 눈금을 그어가며 정해진 시간에 '생명수'를 한모금씩 마십니다. 그러다가 터널 안에 갇힌 또다른 생존자 미나를 만나게 됩니다.
"안돼! 주지마! 너라도 살아야지! 숨겨놓으라고!"
다친 곳 없는 정수와는 달리 커다란 콘크리트에 눌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미나는 뻔뻔하게도 얼마 남지 않은 정수의 물과 배터리를 나눠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민폐 캐릭터를 보며 저는 저도 모르게 안돼! 를 외치게 됩니다. 그러다가 저는 문득 그런 저 자신의 비열한 모습을 발견하고 또다시 부끄러워졌습니다.
"이제 그만 좀 하자. 죽은 사람 시체 건지자고 산 사람을 잡냐"
한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정부는 책임회피를 하기에 바쁘고, 국민들은 연일 계속되는 구조에 지쳐갑니다. 각종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이들은 한 사람의 생명은 모르겠고 산 사람이라도 잘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구조 중단을 위한 서명운동을 받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정수의 아내는 가슴이 무너지고 하루하루 바짝바짝 말라가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 모든 장면은 또다시 가슴아픈 세월호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영화에는 특이하게도 여자 장관이 등장합니다. 정치인, 또는 어떤 기관의 수장 같은 '권위'를 상징하는 캐릭터는 대부분 남자로 그려지던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여자 장관 역을 맡은 배우 김해숙의 말투의 행동은 누구에게나 '그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 상의해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십시오"
등등의 알맹이 없는 말들, 부하직원들의 귀뜸 없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모습,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에도 보도를 위한 '인증샷'을 찍는 모습까지 말입니다.
김성훈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장관을 여성으로 설정한 것이 '그녀'를 풍자하기 위한 의도였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단지 배우 김해숙이 이 역할을 너무나 귀엽게 소화해내서, 그리고 여성 캐릭터과 '영화의 꽃' 외의 역할로 등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판단은 관객의 몫입니다. :)
저는 사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내심 정수가 구조되지 못하기를 바랐습니다. 불가피한 사고가 아니라 인재(人災)였고, 미흡한 대처와 천박한 물질만능주의, 이기적이고 비정한 사회, 이것들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관객들이 조금이나마 가슴으로 느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제 바람과는 달리 정수는 결국 극적으로 구조됩니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제 마음에 들지 않은 유일한 점입니다. 물론, 정부와 관련당국의 적극적인 노력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신념을 실천한 구조대장 김대경의 개인적인 정의감과 책임감, 그리고 일탈행동 때문이었다는 것 역시 '헬조선'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현실적인 결말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