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재스민> 20130925 우디 앨런 作
본 리뷰는 영화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가 정식 개봉하기 전 우연히 시사회에서 만난 영화였습니다. 우디 앨런 감독과 케이트 윈슬렛만 믿고 사전정보는 전혀 없었던 탓에, 영화를 보기 전에는 화려한 상류층의 삶을 소재로 눈을 즐겁게 해주는 가벼운 영화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슬픈 영화입니다.
"She has better genes."
영화에는 재스민과 진저 자매가 등장합니다.
언니 재스민은 부유한 사업가와 결혼해서 뉴욕 상류층의 삶을 살았고, 반면 진저는 조금은 부족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진저는 늘 화려하고 반짝반짝한 언니에 대해 말버릇처럼 "She has better genes." 라고 이야기합니다. 진저는 언니 재스민을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둘은 부모의 재혼으로 자매가 되었으니 다른 유전자를 가진 것은 맞지만요 :)
영화는 재스민이 남편의 사업실패로 이혼하면서 뉴욕 상류층의 삶을 잃고, 동생 진저의 집에 얹혀 살게 되며 벌어지는 상황과 심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재스민의 불안하고 위태위태한 심리 묘사가 정말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우디 앨런 감독과 케이트 윈슬렛에게 다시 한번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의 이름을 따서 지어주신 이름,
재스민"
저는 재스민이 불쌍했습니다. 한순간에 빈털터리 신세가 되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한 순간도 솔직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말이죠. 인간으로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불완전하고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그녀는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연극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녀 자신조차 거기에 속고 있는 모습이, 스스로를 속이려고/스스로 속으려고 애쓰는 그 모습이 너무 가여웠습니다.
일례로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재스민"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놓고서는, 이름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남자에게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의 이름을 따서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합니다. 마치 태생부터 우아하고 고귀했던 것처럼.
천진하고 아름답기만 한 꽃같은 아내
영화 초반에 재스민은 불쌍한 이혼녀로 등장합니다. 남편이 사업에서 불법을 저지르고 잡혀가며 하구 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가련한 사람입니다.
사실 재스민은 전 남편 할의 사업에 대해서도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까지도. 그녀는 알면서도 묵인하고 외면했습니다. 천진하고 아름답기만 한 '꽃'같은 아내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You always try to look the other way!"
영화에는 작은 반전이 있습니다. 불쌍한 이혼녀로 비춰지던 재스민이 사실은 전남편 할을 직접 FBI에 신고한 장본인인 것입니다. 재스민은 할의 외도를 알게 되고서 분노에 휩싸여 그를 망가뜨리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반전은 여동생 진저의 외침으로 시작됩니다. 언니는 늘 못본 척 모르는 척(look the other way) 한다고.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전남편을 신고해 놓고도 '아무것도 모르고 사기꾼 남편에게 당한 순진하고 불쌍한 여자'의 연기에 몰입합니다. 거짓말이 들통나 새로운 남자에겨 파혼을 당하고 돌아와서도 유일한 피붙이인 진저에게조차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또다른 거짓말을 만들어 냅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녀가 믿고 싶어하는 자신의 모습과 실제 자신의 모습이 충돌을 일으킵니다. 영화의 끝자락에서는 그녀의 내면이 붕괴되고 자아가 분열되면서 혼자 헛소리를 횡설수설 중얼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재스민의 화려한 삶은, 구질구질해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그것을 소박하게 만족시키며 사는 진저의 모습과 대비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디에 가까울까요?
영화 속 재스민을 보며 누구나 혀를 끌끌 차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있게 진저의 삶을 택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남자를 통해, 결혼을 통해, 또는 그 무언가를 통해 훔쳐서라도 가지고 싶은 마음은, 발전(?)이랄까, 적어도 환경의 개선에 기여하는 원동력일까요? 아니면 간사하고 비겁하고 나약한 욕심일까요?
나의 밑바닥까지 사랑하자!
저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완벽하지 못할 것은 자꾸만 포기하고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서, 자기자신을 소외시키고 껍데기만 남은 불쌍한 재스민을 보면서 마음이 이팠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저는, 아무도 좋아해주지 않는 나 자신의 밑바닥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에 크고작은 풍파가 찾아왔을 때 나 자신을 다독이고 위로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튼튼한 뿌리를 지금부터 잘 가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