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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utiPo Dec 27. 2016

[Movie] 쓸쓸하고 가만하고 시린 서울의 뒷골목

<죽여주는 여자> 20161006 이재용 作

출처 : 네이버영화


배우 윤여정씨가 맡은 극중인물 소영은 두 가지 의미에서 "죽여주는 여자"입니다. 하나는 이른바 "박카스 할머니"라 불리는 노인 매춘부로서 그 솜씨가 죽여준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글자 그대로 노인들의 부탁을 받고 노인들을 죽여주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화려한 서울, 그 뒷골목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 영화에는 2016년 서울의 "뒷골목"에 사는 이들이 모두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노인매춘, 노인빈곤, 존엄사,  트렌스젠더, 장애인, 외국인노동자, 코시안까지, 결코 가벼울 수만은 없는 많은 이슈들이 영화의 큰 줄기를 따라 크고작은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묻어나 있습니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이재용 감독의 전작 <두근두근 내인생> 역시, 열일곱에 아이를 낳아 키우고 그 아이가 선천성 조로증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사회의 "뒷골목"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분인 것 같습니다.



어둡고 쓸쓸한, 그러나 보통의 인생들

영화는 박카스 할머니 소영의 시선을 따라가며 뒷골목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놓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여유있지만 건강을 잃고 혼자서는 먹지도 싸지도 못하는 상태로 요양원에 갇혀있는 세비로 송, 치매에 걸려도 돌봐줄 사람 하나 없이 판자촌에서 근근히 삶을 연명하는 종수, 트렌스젠더 클럽에서 일하는 티나, 의족을 찬 남자와 누가 섹스를 해주겠냐며 자조적인 너털웃음을 짓는 청년 도훈, 한국 유부남과 아이까지 낳았지만 매몰차게 버려진 필리핀 여자 까밀라와 그녀의 아들.


조금은 어둡고 쓸쓸한 인생들이지만 또 그 안에서 나름의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꾸려가는, 아주 보통의 인생들에 영화는 가만히 초점을 맞춥니다.


리얼리티는 원래 아름답지 않은 법입니다. 이 영화가 그렇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입 안에 모래를 씹은 듯이 깔깔하고 불편하고, 장맛날 오후 세시처럼 꿉꿉하고 답답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뒷골목 사람들의 이야기를 엄청난 비극으로 묘사하지 않은 점이 참 좋았습니다.


수명연장이 곧 젊음의 연장은 아니었습니다

박카스할머니 소영이 고객으로 만나는 노인들의 인생은 고령사회의 어두운 면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수명이 연장되었지만 그것이 곧 젊음의 연장은 아니었습니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청년실업과 정리해고가 넘쳐나는 시대에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은 되려 줄어들었습니다. 젊음을 잃고 건강을 잃고 돈을 잃고 가족을 잃은 노인들은 남은 생이 저주이기라도 한 것처럼, 소영에게 자신의 생을 그만 끝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영화에는 많은 뒷골목 인생들이 등장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공감이 갔던 것이 바로 이 노인문제였습니다. 모두 다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이슈들이겠지만, 저 개인으로서는 제가 트렌스젠더나 코시안이 될 일은 없지만 노인은 반드시 제 문제로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대다수가 겪어야할 문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마트에서도 진열대의 물건을 카트에 담기만 하면 자동으로 계산이 되는 시대라고 합니다. 마트 계산원이 필요 없어지겠죠. 많은 일자리가 자동화, 넓게 보아서 AI에 대체되는데 의학의 발달로 살아남은 인구는 점점 많아집니다. 저는 이 노인빈곤의 비극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희노애락, 그들에게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고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전혀 가까운 관계로 와닿지 않았던, 장애인이라던가 코시안이라던가 노인매춘부라던가 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조금 엿본 기분입니다. 남들보다 조금 덜 가졌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사소한 행복과 슬픔과 욕구와 좌절이 교차하는 일상을 들여다보면서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냥 '힘든 사람들'이라는 단어 하나로 제 마음 한 구석에 치워버렸던 그들에게도 나와 똑같은 소소한 일상과 희노애락이 있음에 놀랐고, 그 당연한 사실에 놀란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더 불행한 타인을 보며 나 정도의 인생이면 감사해야지, 하는 알량한 우월감은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쉽지 않은 인생을 헤쳐가며 세상의 불의에 맞서고 있다고 (적어도 동조하지 않고 있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누군가에게는 내가 무심코 하는 생각과 말이 상처가 될 수 있겠구나, 이미 나도 어느 면에서는 편견에 젖은 '갑'일 수도 있겠구나, 좀 더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여주는 여자>는 "오락"으로서의 영화적 재미, 즉 엄청난 몰입감이라던가 극적인 반전이라던가 카타르시스를 주는 전개라던가 하는 것들은 별로 없는 영화입니다. 사실 줄거리 자체는 예고편만 보아도 전부 파악이 가능합니다. 예고편 이상의 대반전이 숨어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참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입니다. 조용히 가만히, 그리고 조금은 씁쓸한 시선으로 이웃집에 사는 평범한(??) 박카스 할머니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으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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