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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utiPo Sep 22. 2017

[Movie] 나답게 살기.

<캐롤> 20160204 토드 헤인즈 作


1950년대 맨하탄의 클래식한 풍경. 묘한 기대감, 긴장, 설렘이 뒤섞인 크리스마스 즈음. 과하지 않게 똑 떨어지는 두 여배우의 패션. 영화 전반을 흐르며, 때로는 화면보다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재즈 음악.


영화 <캐롤> 풍부하고 감각적인 매력이 넘칩니다.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그냥 그 자체로 충분한 로맨스 영화입니다.


첫 눈에 반해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 두 사람. 그리고 위기와 갈등. 아름다운 재회. 완벽한 로맨스 영화의 흐름입니다


영화 <캐롤>은 이처럼 가장 평범하고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에, '동성애'라는 다소 파격적인 주제를 얹었습니다.  그것도 1950년대를 배경으로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구태의연하게 동성애의 정당성에 대해 목놓아 주장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 <캐롤>은 그저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을 화면에 담아냅니다. 그리고나서, 관객들이 둘의 뜨거운 사랑에 깊이 빠져들고 나서야 슬며시 물음을 꺼내놓습니다. 아주 태연한 자세로 관객들에게 묻습니다.  


캐롤을 캐롤답게, 테레즈를 테레즈이게, 그리고 결국은 당신을 당신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서로를 만나기 전, 캐롤과 테레즈의 세계는 회색빛이었습니다.


캐롤은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알콜중독에 폭력적이었고, 그녀는 딸의 양육권 문제를 정리하던 중이었습니다.


테레즈는 무료한 결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남자친구와의 여행보다 고물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 것에 더 설레지만, 그녀는 여전히 관성처럼 결혼으로 향한 길에 묶여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북적이는 백화점에서 둘은 점원과 손님으로 만납니다. 캐롤과 테레즈는 서로에게 총천연색 무지개 같은 눈부신 존재감을 가집니다. 두 사람이 백화점 매대를 사이에 두고 처음 마주 선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 듭니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은 음소거되고, 오로지 캐롤과 테레즈, 둘만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관객에게까지 전해집니다.




테레즈는 커다란 불씨를 품고 사는 여자였습니다. 다만 그 누구도,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도 불씨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만 백화점 점원으로 일할 뿐이었고, 뜨뜨미지근한 감정인 남자친구와 관계를 지속했습니다. 



테레즈의 세계에 캐롤은 바람처럼 불어 들어왔고, 테레즈는 바람을 타고 뜨거운 불꽃이 되었습니다. 캐롤은 테레즈의 뮤즈였습니다.


인물사진을 찍지 못하던 테레즈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캐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은 캐롤이 일깨워준 불씨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점심 메뉴조차 본인이 결정하지 못하던 테레즈와 달리, 캐롤은 강렬한 자아를 가진 캐릭터입니다. 캐롤의 등장은 강렬합니다. 화려한 차림새, 압도하는 눈빛.


캐롤과 테레즈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가던 캐롤은 돌연 뒤를 돌아 계산대 너머의 테레즈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I like your hat." 이라는 전형적인 '작업멘트'를 던지며 테레즈에게 찡긋 윙크를 합니다.



언젠가 남편이 "싸이 해리슨의 처(妻)가..." 라고 말을 시작하자, 캐롤은 단호하게 남편의 말을 정정합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그 여자는 누구누구의 처가 아니라 '지네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고.


또 어느 파티에서 한 여자가 캐롤에게 '망을 봐달라' 며 담배를 태웁니다. "남편이 담배피는 걸 싫어해요." 라며 대수롭지 않게 웃는 그 여자에게 캐롤이 묻습니다. "그래서요? 당신은요? 당신은 담배피는 걸 좋아하나요?"


그만큼 캐롤에게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테레즈는 캐롤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게 해 주는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그 누구의 아내도 아닌, 엄마도 아닌 캐롤 말입니다.







(아래는영화 <캐롤>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내용입니다.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캐롤은 테레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딸의 양육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합니다. 그리고 선택을 강요 받습니다.


그것은 '테레즈냐 딸이냐', 또는 '사랑이냐 모성애냐' 사이에서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녀 자신으로서 인정받느냐, 아니면 영원히 가면을 쓰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얼마간은 캐롤이 굴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캐롤은 테레즈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떠나버립니다. 캐롤은 남편의 집에서,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고, 의사에게 동성애를 '치료'받는 '정상'의 모습을 보여야 겨우 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캐롤은 테레즈와의 관계를 인정하며 이야기합니다.


"날 부정하며 산다면 린디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참 캐롤다운 대사입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딸을 빼앗기고 평생 가슴을 치며 사는 불쌍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평생 가면을 쓰고 '척'하며 사는 여자를 택하지도 않습니다. 참 캐롤다운 결정입니다.



마지막 장면입니다. 캐롤과 테레즈의 재회. 개인적으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캐롤을 찾아 복잡한 연회장으로 들어온 테레즈. 저 멀리 사람들에 둘러싸인 캐롤의 모습이 마침내 눈에 띕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멈춥니다. 주변의 소음이 모두 차단됩니다. 둘의 시선이 뜨겁게 교차합니다. 마치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던 처음 그 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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