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컬렉터 BK에 관하여

by 쏭쏭

BK를 처음 만난 건 신규 교사 임명장을 받으러 서울시 교육청에 갔을 때였다. 옆으로 눈을 돌리니 BK가 앉아 있었다. ‘뭔가 다부진 느낌을 지닌 사람이군’ 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는데, 그녀와 같은 학교에 발령 났다는 장학사의 멘트가 들려왔다. 사회초년생으로서 5년 동안 갖은 고난을 함께 겪고 지금은 다른 학교로 옮겼는데 모임을 함께 하며 10년 넘게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먼저 연락을 잘하지 않는 내가 그녀와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아름다운 순간 중 단연 첫 번째로 떠오르는 장면은 그녀가 노오란 꽃을 한아름 사들고 와 우리 집 벨을 눌렀을 때의 모습이다. 나는 2021년 코로나 사태 때 반 학생이 코로나에 걸려, 2주간 강제 격리를 해야 했는데 그녀가 내게 필요한 게 없는지 물었다. 나는 어디 오도 가도 못하여 우울해져 있던 탓에 "노란색 꽃이 있으면 기분이 좀 나아 질 것 같아."라고 말했고, 그녀는 맛있는 빵 꾸러미와 함께 꽃다발을 사 와 우리 집 앞에 두 고 갔다. 꽃을 부탁하는 일도 통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녀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서울에 발령받았을 당시 나는 3년 차, 그녀는 1년 차 신규였는데 수업 발표 때 그녀의 목소리 강단에 흠칫 놀랐다. 음악 교과목을 가르쳤는데 1년 차에 6학년을 데리고 저리 차분하 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니 매우 감탄했다. 그뿐 아니라 다음 날 수업을 위해 퇴근 시간까 지 준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양손에 수업 자료를 이고 지고 퇴근했다. 내가 1년 차에 저랬던가 싶을 정도로 ‘시작하는 자’의 열정으로 똘똘 뭉친 그녀였다.


청소년 단체를 함께 맡은 선배가 일을 자꾸 미뤄 눈물, 콧물을 짜고 맥주 한 모금에도 얼굴 이 빨개지던 그녀를 귀엽게 보던 때가 엊그제 같기만 한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생활부장을 맡아 학교폭력 업무처리로 고군분투 중이며 가끔 만취하여 소주병과 함께 찍은 인증샷을 보내고 있다. 다행히 여전히 귀여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귀여움이 폭발하던 때가 있었으니 바로 올해 초 제주도 여행에서였다.


소파에 누워 있던 그녀의 눈이 매우 슬퍼 보였는데 마치 주인을 잃은 시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왕리본을 머리에 묶고 슬퍼하고 있는데 미안하게도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엉덩이를 한 방 차주고 싶었다. 그녀는 말했다.


"인생에 낙이 없어요..."


정확히 이 문장은 아니었는데 정리하자면 인생이 무료하고 달려갈 곳을 잃었다는 의미였다. 작년에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교직 환경 개선을 위해 발로 뛰었다. 서이초 사건 이후 발발한 교권 회복 집회에 집행부, 홍보부, 질서 유지부 등의 역할을 맡아 뜨거운 여름, 가을을 보냈다. 그녀가 말했다.


"저는 이 일을 계속하고 싶거든요. 이 직업이 꿈이기도 했지만 여기서 더 힘들어지면 저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더 나빠지지 않게 하고 싶어요."


첫 만남에서 느껴졌던 단단함, 동료 장학 수업 때 들었던 목소리의 다부짐, 고향 집 화재 사건 때도 조금씩 회복되어 가던 탄력성,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어제도 새벽까지 집회를 준비했다며 피곤한 목소리에도 어떤 힘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우리는 이런 그녀를 보며 ‘난세에 영웅이 난다더니, 3·1 운동 유관순 열사가 떠오른다' 며 혀를 내 둘렀다.


제주도 여행 시기는 바빴던 대학원 생활도 끝나 더 이상 닥친 과제들이 없었고, 집회도 마무리됐던 때였다. 그녀의 고민을 들은 또 다른 친구는 그녀에게 별명을 하나 지어줬 다. 바로 '고난 컬렉터'.


BK는 고난이 닥쳐올 때 그것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희열과 생동감을 느끼는데 지금은 그녀 앞에는 이렇다 할 고난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 곧 고난이 또 올 거야..."


지금은 그로부터 약 5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그녀가 얼마 전 말했다.


"진짜 죽겠어요... 숨이 막힙니다..."


드디어! 그녀는 또 다른 고난을 맞이 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의 기원은 생활부장 업무다. 최근에 그녀가 맡은 사안들은 여러 학년 학생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자전거 도난 사건, 운동장 미끄럼틀 위에서 학생이 노상방뇨를 한 일 등이다. 이 밖에도 내가 직접 듣지 못한 생활지도, 학교폭력 사안들이 많다고 했다. 이번에 그녀가 겪고 있는 고난은 그녀가 수집'한' 고난이 아니라 그녀에게 수집'된' 고난이다.


헤세는 '외로운 밤'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행복과 고통은 우리의 삶을 함께 지탱해 주는 것이며 우리 삶의 전체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을 잘 이겨 내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산 것이라는 말과 같다. 고통을 통해 힘이 솟구치며 고통이 있어야 건강도 있다. 고통은 사람을 부드럽게도 만들고, 강철처럼 단단하게도 만들어 준다.'


우리는 어느새 30대가 되어 고난이자 고통이 삶의 필수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BK는 요즘 새로운 고난을 맞이하여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고통을 미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고통은 사람을 부드럽게도 만들고 강철처럼 단단하게도 만들어 준다니, 노오란 꽃들을 한아름 안고 온 부드러움과 고난을 헤쳐온 단단한 마음을 이미 지닌 BK는 얼마나 더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해지려는 것일까?


학교를 옮기면서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던 BK, 자신이 하는 일에 누구보다 진심인 BK.


'BK야! 슬플 때마저 너무 귀여워서 감정 이입이 잘 안 될 지경이지만 네가 지금껏 해 왔던 것처럼 잘 헤쳐 나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귀여움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이번 고난도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기를 바라고, 감당이 안 된대도 그 또한 살아내야 하는 것 이 삶이라니...허허 우리가 다가오는 고난과 고통은 어찌할 수 없다면 우리를 위로해 줄 맛 있는 음식을 찾아 마음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선택하자!


식당으로 가는 길, 배경 음악은 나훈아의 이면 좋겠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2024. 作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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