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석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쿵쾅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주차를 했다. 내리기 전에 외투와 귀마개를 챙겼다. 이곳의 바람은 '불어오는' 보다 '몰아친다'가 어울리는 곳이니까 말이다.
눈 앞에 보이는 저곳은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냉기가 모여있었다. 얼른 달려가고 싶었지만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3일 전 제주에 도착한 그때부터 말이다.
나는 컨셉을 잡고 가치를 만드는 일을 한다. 그러다 보니 접하는 '모든 것'에 컨셉을 넣는 게 직업병이 되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처음으로 가는 제주 여행에도 컨셉이 필요했다.
구글을 켜서 "겨울, 제주"를 검색한다. 겨울의 제주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구글링으로 찾고 빠르게 정했다. 여기서 나와 구글링 결과의 공통점을 찾았다. 이미지는 모두 파란색이다. 난 파란색을 가장 좋아한다. 이게 비딩도 아닌데 깊게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 이번 컨셉은 '파랑'이다.
파랑을 컨셉으로 잡았으면 무엇을 해야 할까? 역시 길게 고민하지 않고 즉시 할 수 있는 것들로 정리했다.
첫 번째는
작년 말, 동묘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파란색 체크 코트를 챙겨갔다. 색이 강해서 지하철을 타면 가끔씩 시선이 느껴지는 옷인데, 이번 제주에서 아주 잘 입었다. 옷도, 배경도 예뻐서 그런지 찍는 사진마다 만족스럽다.
컨셉이 파랑이니까, 입는 것도 파랑으로 맞춰보았는데 꽤 괜찮다. 설령 혼자 가는 여행이 아니라면, 같이 드레스코드의 색감을 맞춰보는 것도 좋다. 쉽게 준비했을 지라도, 사진 속 나는 프랑스 패션쇼 프레타포르테가 부럽지 않은 모델이다.
이어서 두 번째는
숙소의 선택 기준은 푸른 바다가 보이는 곳이어야 했다. 아침에 비몽사몽 한 상태로 기지개를 켤 때, 눈 앞의 광경이 일상과 달랐으면 했다. 고민 끝에 고른 숙소는 제주도 북동쪽, 구좌읍 하도리에 위치한 하도36. 에어비엔비로 예약한 곳이다.
처음 숙소 위치, 가격, 편의성을 비교할 때는 오히려 호텔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그렇게 고민이 며칠이 계속되니, 이것도 고민이더라. 그래서 제주에서 지낼 숙소에 원하는 느낌들을 단어로 적어보았다.
조용함
정리됨
여유
차분함
머리를 비울 수 있는 곳
하도 36의 호스트가 올린 사진을 보았을 때, 노트에 적었던 단어들이 떠올랐다. 맞네. 여기였네. 나도 모르는 내가 원하던 곳이.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 도보로 10분 이상을 걸어야 한다. 조용하다. 주변에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밭들만 고요하게 있다. 원한다면 사색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또 하나 좋았던 것은 조식. 나는 아침에 꼭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 편인데, 숙박 비용에 조식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제공하는 메뉴도 숙소의 느낌과 비슷한 점도 숙소 선택에 한몫했다. 돌고래 카레와 에그치즈 머핀, 아침을 안 먹던 사람도 숟가락을 들게 하는 비주얼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글의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곳,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곳은 해변 도로의 어딘가다. 제주에 왔을 때 현지인들만 가는 곳을 가고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좋은 식당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전복죽이 맛있다는 이 곳은 특이하게도 비닐하우스로 되어 있다. 육지 사람이면 정말로 무심코 지나갔을 곳이다.
전복죽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1시간 동안, 식당 앞에 위치한 부두로 향했다. 200m 정도의 끝에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바람도 많이 불어 파도도 매서웠지만 너무 좋았다. 눈 앞의 모든 풍경이 파랑으로 시작해서 파랑으로 끝나는 이 곳, 육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곳이었다.
어느덧 제주에서 돌아온지도 몇 개월이 지났다. 파랑 컨셉의 제주 여행에 이어 다음 여행은 어떤 컨셉을 해볼지 기대된다. 다음 여행은 베트남인데 어떡하지? 초록색으로 가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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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갈 때 나만의 컨셉을 부여해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의 일상은 여행 같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