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나를 키워준 건 모두 콤플렉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성격과 모습이 모두 콤플렉스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크게 영향을 준 세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다.
첫 번째는 둘째 아이 콤플렉스다.
어렸을 때부터 초등학교 때까지 귀한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다는 서러움이 컸다. 언니가 잘못해도, 동생이 잘못해도 늘 혼나는 건 나였다. 엄마는 잘못을 가려주는 데 있어 공평하지 않았고 늘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셨다. 부모님으로부터 "넌 행동이 굼뜨고 눈치가 없어. 애가 고집만 세고 미련하잖아."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혼자 놀면서 책만 읽었기에 스스로는 꽤 영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증명할 길이 없었다.
다행히 중학생이 되고 공부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그 고민은 사라졌다. 부모님의 관심이 나에게 집중되었고, 매달 상장을 받아오면 아빠는 셋 중 자랑거리는 나밖에 없다며 칭찬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제 몫을 한 것 같아서 뿌듯했다.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긴 했지만) 그 덕분에 둘째 아이 콤플렉스는 점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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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키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고등학교 때는 그 콤플렉스가 극에 달했다. 초등학교 때 맨 뒷줄에 있던 내가 키 때문에 맨 앞줄에 앉게 되면서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중학교 1학년 때 158로 성장이 멈추었다) 어떻게든 키가 크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당시 키 크는 수술이 막 발명되었는데 기사를 보고 아빠를 졸라서 해당 대학 병원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다. 당시 진료를 봐주신 의사 선생님은 나를 보고 아빠를 보더니 여긴 난쟁이라고 불리는 정도의 심각한 사례만 치료하고 있다고, 이런 일로 여길 찾아오면 어떡하냐고 호통을 치셨다.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대학생이 되어서도 한참 동안 키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나와 단짝인 친구 둘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모두 키가 170이 넘었고, 당시 유행이었던 10센티가 넘는 하이힐을 신고 다녀서 그 사이에 있는 나는 더 작아 보였다.
키 콤플렉스는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극복할 수 있었다. 외모에 대한 인식이 바로 잡히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훈련으로 내 키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정도로 바뀌었다. 그리고 눈을 돌려 보니 주위에는 나 정도의 키를 가진 사람도 꽤 많은 걸 알았다. 이건 나의 특성이고 또 다른 나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비율이 좋아 보이는 스타일링도 콤플렉스 극복에 한몫을 했다.)
콤플렉스는 내가 그것을 단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단점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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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때는 반장과 부반장 후보 요건을 갖추었음에도 한 번도 투표에서 뽑히거나, 추천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나는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하는 것 외에는 반 아이들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성격이었고, 그 때문에 아이들은 나를 잘난척하는 새침한 아이로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그럴만했다.) 대학교 때도 성인이 되어서도 리더를 맡아본 적이 없었다. 솔선수범하면서 다른 사람을 챙기는 이미지는 아니었으니 내가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리더가 될 일이 없었다. 누군가를 앞에서 이끄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리더 콤플렉스였다.
그런 내가 리더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다. 독서모임과 클래스를 운영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지금은 내가 운영하는 모임만 3-4개가 된다. 다른 모임에 가서도 주도적으로 이야기하는 일이 꽤 자연스러워졌다.
어렸을 때의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나를 다른 사람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나를 성장시킨 건 모두 콤플렉스가 아닐까. 나는 콤플렉스에 걸려 넘어지기보다 언제나 그것을 안고 올라가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또 다른 콤플렉스가 생기면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줄지 기대하며 지긋이 웃으며 바라볼 일이다.